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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이 복음되어야 하는 이유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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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우리는 오늘 스킷 드라마를 통해 복음이 복음 되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모든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복된 소식이자 인류에 대한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나의 죄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죽으셨던 예수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믿으면 인류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마귀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동시에 누린다는 것입니다.

빌3:20절에 보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라 말을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가 되며 그 복음의 은혜를 받으면 구원받은 사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멘으로 답해 보십시오. 나야말로 이 엄청난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임을 확신하십니까? 여기에 아멘 하셨다면 이걸 확신한다면 여러분은 축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이 나에게만 머물러 있다면 복음이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복음이 내게만 있다면 이는 주님의 원하심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주의 복음을 듣고 영접하여 천국백성이 되게 하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대는 복음이 복음 되는 것인데 이는 바로 내가 아는 복음이 다름 사람에게도 복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드라마가 보여 주었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주어진 이 땅의 삶은 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는데 홀연히 이 땅의 삶을 접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소개되고 있으니 먼저 부자입니다.
한사람은 부자이니 왕족들이 입는 자색 옷을 입었으니 그의 권세를 알 수 있고 실크 옷을 입었으니 그의 부유함, 그의 재물이 어느 정도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의 삶은 연락하는 삶이니 잔치하며 즐기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자신만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부자의 삶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삶인 것은 분명합니다. 어찌하면 나를 즐겁게 할까 어찌하면 나를 행복케 할까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삶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이요 바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또 한사람의 죽음이 소개되니 거지 나사로입니다. 그는 삶이 심한 박대와 헌데를 핣는 개의 동무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고 살 정도로 허기진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자와는 너무나 상반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똑같이 죽었으니 누가 먼저 죽었느냐 어떤 모습으로 죽었느냐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부자는 지옥이요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해방이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모두에게 외면을 당해야 하는 삶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죽음은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롯의 아내가 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했는데도 돌아보아야 할 재물이 많았던 것 처럼 부자에게는 많은 재물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 두고 가야 하는 재산이 많았을 것이니 장례의 모습도 상당히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의 입에서는 이 두 사람에 대해 무어라 회자 되었을까요
거지에게는 “잘 죽었어 저렇게 살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하며 나사로의 죽음을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이고 부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식들만 좋은 일 시켰구먼...마누라는 재혼 할꺼야...죽은 사람 만 불쌍하지...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장례식에는 어떤 말을 듣고 싶습니까?

목사 개인적으로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사로가 들었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잘 죽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죽음자체가 복 되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험란한 삶을 살아서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잘 죽었다는 말이 아닌 하늘나라에 들어 갈수 있는 죽음이었기에 복되고 잘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잘 죽었어 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것은 목회하면서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서가 아닌 이 땅보다는 하늘에 많은 것을 쌓아놓아 하늘을 그리워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늘에 재물을 쌓아놓으라 했는데 이 땅에 내 이름으로 쌓아 놓은 것보다 내 이름으로 하늘에 기록된 것이 더 많아야 복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내 이름으로 이 땅에 쌓아 놓은 것이 많은지 아니면 하늘에 쌓아 놓은 것이 많은지 어디에 쌓아 놓은 것이 많은가? 여기에서 믿기는 믿었지만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복된 것은 험란한 삶을 살다가 죽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어 있기에 복되다 라는 것입니다.

지난주간 파주시장이 100억대의 재산을 두고 투신자살 했습니다. 운전기사 또한 구하려다 함께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장소에서, 시간에 죽었지만 죽음의 모습은 다릅니다.
한사람은 자살이고 한사람은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죽음은 복된 것이 아닙니다. 자살은 죽음 중에 가장 비극적인 종말입니다.
자살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에게 마귀는 네 힘으로도 가능해 하며 속삭입니다. 마귀는 죽음이 하나의 탈출구라고 속삭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지옥에 간 것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짐을 스스로가 질려 했기 때문입니다.
착한사람이 죽으면 천국 간다는 소리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어리석은 말장난을 해봅니다. 택한 백성은 자살해도 천국간다구요 아닙니다. 택한 백성이 자살 할 일도 없구요 이런 비극의 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택한 사람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우리는 누가 택 자인지 불택자 인지를 알 수 없지만 사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사람의 표시로 머리에 뿔 하나씩 달아 주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술집도 못가고 죄의 자리에 동석하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겉모양에 있어 다른 것은 없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놀랍게 예수님을 3년 반을 따라다닌 12제자 안에 가룟 유다가 심겨져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던 사람들의 틈바구니속에서 놀랍게도 사도바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외에는 택한 자에 대해 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전도했더니 택한 백성이었구먼 하며 결과를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자살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보면 그가 신앙으로 색칠해 있어도 결과를 보면 택한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때 성령 충만한 집사 일곱을 택하여 사역하도록 했는데도 그 집사 중에도 니골라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줍니다.

OECD 국가 중에 자살증가율이 최고치로 높습니다.
너도 나도 죽는데 유행인 것 같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어떤 명분이 있어도 온당치 못한 일이며 자신의 죄의 문제, 수치와 생명의 문제를 스스로가 해결하고자 하였으니 자살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주님에게로 가지 말고 죽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 죽었으면 좋겠어 죽어 버릴꺼야’ 하며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하나님의 사람 사도바울도 죽고 싶다고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표현은 진부한 삶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있어서 이 땅보다는 하늘에 쌓아놓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자신했기에 그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쌓아놓음이 없다고 생각되는 분은 할 수 있거든 많아 쌓아 질때까지 이 땅에서 그저 800년 900년 사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무조건 죽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 안하든 지옥과 천국은 있습니다.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고 질병이나 상처가 없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다시는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모하는 주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옥은 불구덩이 흑암 어두움, 구더기들, 불과 유황,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아시는지요? 천국은 우리들이 아는 것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곳이지만 지옥은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곳보다 훨씬 더 참혹한 곳임을 아십니까? 지옥은 하나님을 거부한 악한 귀신들을 가두기 위해 준비된 곳인데 마귀가 억울해서인지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불구덩이 같은 지옥과 너무나 아름다운 천국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질병도 고통도 끝이 있습니다. 가난이 왜 두려운지 압니까? 그것은 가난이 병이 영원할 것 같아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착각합니다. 부자가 착각합니다. 돈을 쌓아놓고 이것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땅의 끝은 홀연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옥과 천국은 끝이 없습니다.

2년여 전 장로님들하고 회의를 하고 사우나를 간적이 있습니다. 일명 에덴놀이입니다.
뚱뚱한 장로님 몇 분하고 샤워를 하고 땀 빼고 하면서 마무리 회의를 하는데 나중에야 안 이야기 이지만 우리교회 여자성도가 그 뜨거운 곳에서 있다가 저와 장로님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갈 때까지  2시간동안 나오지도 못하고 그 뜨거운 곳에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이곳이 지옥입니다. 잠깐 ,두 시간이라도 있다가 나왔으니 다행이지 2시간이 아닌 영원토록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를 보십시오 음부에서 물 한 방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재물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놀랍게도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는 큰 구덩이가 있어 오고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나도 믿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기회는 한번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의 삶이 최고나 영원한 것처럼 날마다 호화로이 살았는데 죽어보니 죽음다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죽은 다음에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땅의 삶은 영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선택할 최고의 카드는 천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천국 갑니까?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나사로의 천국의 자격은 결국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품, 다윗의 품에 엘리야의 품에 있을 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품은 나사로가 믿음 안에서 살았고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수 없었던 나사로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천국의 길임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결단하셔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죽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복된 죽음은 이 땅에서 호강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들의 죽음이 천국으로 가는 죽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청원합니다.
그 첫 번째 청원이 28절에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자에게는 형제 다섯이 살고 있었다 하니 부자는 아마도 장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청원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부자는 지옥이 왠만만 하면 외로이 같이 있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부자의 소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부모님도 믿지 않아 지옥에 있으니 의리가 있지 하며 지옥행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갔던 천국에 갔던 죽은 부모의 소원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예수 믿는 것입니다. 제사상을 휘황찬란하게 차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두 번째 청원이 나옵니다.
천국에 온 사람은 천국에 온 이유를 모른답니다. 아마도 은혜로 왔구나 하며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지옥에 간 사람은 내가 왜 지옥에 왔는지 잘 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묻겠습니다. 부자가 교회를 다녔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부자가 아브라함을 알아보았고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부자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있습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내치지 않고 몇 년 동안 꾸준히 대접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보통사람들은 한번은 해도 이 부자처럼 오랫동안 섬기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선에 있어서는 상당한 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어서야 믿음의 가치를 알았고 회개 없는 신앙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부자의 결과를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우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고 뉘우치고 고치고 바꾸는 것입니다. 걸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삶을 바꾸지 않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나를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으면서 죄 속에 있다면 이는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내안에 오면 세상의 것을 거부합니다. 아직까지도 세상의 것들이 나를 잡고 있다면 복음의 능력이 나에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년들이여! 복음의 능력을 알고 이를 위해 회개하고 믿음의 고귀함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시몬을 베드로로 사울을 바울로 바꾸어 버릴 정도의 능력입니다. 부자는 죽은 다음에야 복음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마지막 청원에서 전도를 요청합니다.
이곳은 너무 고통스러우니 모세와 선지자를 보내어 나머지 형제들에게 말해주기를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나사로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면 나사로야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니? 복음에 대해서 말이야? 통곡하며 절규 했을 것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현주야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니? 응 부끄러웠어... 죽음이 이렇게 빨리 올지 몰랐어?

아직도 여러분이 여유를 부릴 만큼 믿음에 대해 확신하십니까?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저 땅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저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누가 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전도는 천사들이나 앞서간 사람들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에게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간 나사로의 이름은 있는데 지옥에 간 부자의 이름은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고 영광스럽게도 천국 간 사람은 나사로인데 그런데 주님은 지옥에 간 사람을 부자라 말하고 익명, 공란으로 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당신이 책임지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익명의 공란을 채운다면 어찌 할 겁니까?  여러분의 친척, 가족, 직장동료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면 얼마나 참혹한 일입니까.
나에게 맡겨진 사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웃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다음주일은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던 새 생명 축제의 날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하나님은 금번주간에 누구에게 보내실련지요?
또 하나는 여러분은 어디에 쌓아놓고 살 것인지요? 하늘입니까 이 땅입니까?
이 땅에서의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삶의 결과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하늘에서 결판이 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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