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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영성 (행 18:24-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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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기름이 모자라 경고등이 들어와 본적은 있으십니까 고속도로위에서 운전을 하다가 혹 경고등이 들어온다 치면 참으로 애 닳습니다. 혹시 가다가 서는 것은 아닐까 휴게소 주유소를 만날 때까지 기름이 유지될까 하며 그렇게 경고등이 들어왔다치고 휴게소를 만나면 지나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영성에는 경고등이 들어와 있지는 않는지요? 그럼에도 내 삶에 영성이 경고등이 들어와 있음에도 설마설마 하며 달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지난번  부활주일 저녁에  호주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인데 예배를 잘 드렸니? 하니 응 아빠 교회에 가긴 갔는데 예배를 못 드리고 그냥 기도만 하고 왔어 하며 많은 사람들이 할리데이라 놀러 가버려 교회는 할머니 할아버지 4명밖에 오시지 않아 목사님은 기도만 해주시고 교회가 유지하기 힘들어 곧 문 닫아 할거라며 그렇게 부활주일을 보냈다 합니다.
이렇게 유럽이나 서구 교회들은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씩 문을 닫고 성령의 능력은 상실한 채 너무나 빈약한 교회들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머무나 마음이 아파옵니다. 만약에 이대로 간다면 그렇게 피 값으로 유지해 온 조국 강산의 교회들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분명한 것은 조국강산 교회가 가는 길에도 경고등이 켜져 있지만 개인 신앙에 경고등이 켜져 있지만
경고등을 무시하고 그대로 간다면 유럽교회들의 전처를 우리는 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오늘 저녁에 우리 교단 총회원로 목사님들이 한 20여명정도 방문하시어 저녁예배를 함께 드리신답니다.
그 원로목사님들은 오늘 우리교회에 방문하신다는데 저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한평생 교회를 섬겨오던 목사님들이 젊은 목사에게 우리교회에 지적해주고 당부하신다면 무어라 하실까요?
아니 우리주님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며 무어라 하실까?

3차 전도여행중인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들러 몇 명의 제자들을 만나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첫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 명령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성령의 임하심은 우리 모두가 사모해야 하고 소화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너희가 믿을 때에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불신자들에게가 아니라 바로 믿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의 사건은 놀랍게도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사건은 유대교가 기독교가 되는 사건이요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택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의 가장 큰 재산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성령의 능력이요 영성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재산은 절대 사람이 아닙니다.
유럽교회가 오늘날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사람이나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들은 부자가 되어가면서 그만 자유주의 물결이 오면서 기도를 상실했고 영성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정한 재산은 성령입니다. 영성이 넘칠 때에야 교회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내용은 성령의 역사이어야 합니다.

15년 전 초년병 전도사가 안산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최고의 갈증은 성령이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앞으로 어떻게 목회하고 싶느냐 묻는다면 저는 사람이 가득한 교회가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게 하고 싶은 것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사람으로 부흥되기를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들이 찬송을 부르다가 성경을 읽다가다 간혹 한 줄을 빼놓고 읽을 때가 있습니다. 간혹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럴 때 아마도 목사님이 오늘 복잡한 일이 있는 갑다 합니다.
대체로 이런 실수를 하는 경우에는 바로 와야 될 성도가 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참석한 성도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면 아버지가 죽었나? 가정이 어렵나 하며 간혹 이런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을 기다리며 예배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예배를 점검할 때 보니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을 기다리는데 집중했었다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서 사람이 많든 적든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 온힘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새 가족이 오더라고 내가 아닌 성령이 그의 마음을 터치하게 하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예배를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소망은 무던히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성령 충만 한 예배를 꿈꾸며 그분께만 집중 할 려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7:7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똑 같은 말씀으로
눅11:11 에도 나와 있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입니다.

둘째: 성령의 대 전제 - 구하는 자에게
여러분! 여기에 대전제가 있습니다. 성령을 필요한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고로 주시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솔직하십시오 돈이 아닙니까?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고 싶은 것이 있으니 바로 성령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 말에 성도들은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의 모든 사역은 바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또 하나의 목적은 바로 성령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은 거듭 났습니까? 이 말에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당신은 성령받았습니까? 이것은 직분의 임직의 요건이요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를 다니다 보니 구원받은 자가 되었구요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내개 태어나 보니 김씨 이씨 박씨가 된 것처럼 구원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배고파하며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7장 7절을 제대로 이해하면 구하라 그러면 성령을 주실 것이다라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은 사모하지 않으면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조국강산의 교회에 가장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교회모습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성도들은 세련되디 않았지만 그때는 기도해야 살아 은혜를 받아야 살아 하며 하나님에 대해 갈망할 때가 조국교회의 부흥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안타깝게도 교회는 교회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세상 것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쳐버리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명자의 대전제 - 성령충만
적어도 우리가 사명의 사람이라면 울며 목매는 것이 그리고 구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추구하고 목적하는 것이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의 영성에 경고등이 들어와 있는데 그냥 주유소를 지나칠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있지는 않겠지요? 너희가 믿고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면 믿고 난후 시간이 지나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사건과 동시에 성령의 임재를 맛보는 사람이 있구요 또 어떤 사람은 시기적으로 따로따로 받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볼로씩 목회를 한다든지 성도들도 그리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아볼로가 등장합니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설교 나 가르침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박사학위가 몇 개 되고 지식에 대하여 능통한 자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사람에 대해 성경은 성경에 능한 자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뿐 성령에 대해 모른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선은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문제가 영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외모적으로 외형적으로 사회적으로 뒤처지지 않을 려 노력은 하지만 진정한 내실인 성령충만을 위해 몸부림 치치 않는 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영성의 결여입니다. 예전 조국교회가 얼마나 성령의 능력을 사모했는지요 가난해도 구하는 것이 성령이었구요 당장 굶어도 성령을 사모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부흥회를 자주 다닙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참으로 열심히 했는데 이제는 꾀가 생겼습니다. 성령을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에는 그다지 열심히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교회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교회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냉랭한 교회들의 모습이나 개인의 신앙의 모습을 볼 때면 그 예전 한얼산 기도원 원장이었던 이천석 목사님이 그리워지는 시절입니다. 설교도 얼마나 투박한지 혹시라도 졸면 저년 조네 하거나 얘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면 저년은 왜 애를 낳아갔고 하며 욕도 하는 등 이 목사님에게는 인간적 약점이 있었지만 오는 사람들이 어느 때에는 시험이 들어 돌아가기도 하지만 왕창 중창 주자장창 깨어지라고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목소릴 높이셨던 분입니다.
얼마나 성령충만을 외쳤는지 한얼산 기도원의 개도 3년이면 방언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개도 방언을 하는데 하며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예전에는 동네에 집회가 있으면 몇 달간을 교회가 기도로 준비하고 준비하여 강사목사님이 몇 시간을 말씀전해도 전혀 거동하지 않고 불평하지를 않았습니다. 마음을 쏟아 기도하고 목소리를 높혀 찬송하고 손이 터져라 박수를 칩니다. 집에 가라고 해도 집에 가질 않고 새벽 때까지 기도하다 성령을 받아 떼굴떼굴 구르며 회개하며 각종 은사가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면 다들 목이 쉬어서 강사목사님과 비슷한 소리를 낸 적들이 많았습니다. 이때가 바로 한국교회의 부흥의 시기요 성령님의 임재가 왕성하던 시기였습니다. 방송에 나갈 만큼 세련된 설교들이 쏟아져도 그런데 오늘날은 여느 누가 보더라도 교회들은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바로 영성이 결여 된 것입니다.

옛날 목사님들은 목회하다가 잘 안되면 산으로 갔습니다. 산으로 가서 소나무하나씩 붙잡고 밤새 기도하고 다시 성령 충만을 받고 돌아가 목회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들은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러 갑니다.
박사학위라도 받아놓으면 목회가 저절로 되는 줄 압니다.  세상의 어느 교회도 박사학위로 회복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아닙니다. 목회는 하나님과의 문제이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영성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기대하지 않고 우리교회 강대상은 어느 재료로 만들었어... 십자가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어? 오르간이 얼만지 알어? 우리교회는 국회의원이 있어, 장관이 있어 하며 엉뚱한 것을 자랑하다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망조 드는 것입니다.

넷째: 성령충만에 따르는 표적
성경은 또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을 전하니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충만은 반드시 표적이 따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두 사람쯤 되더라
여러분 성경이 얼마나 정확한지 아십니까? 족보를 적을 때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60만명의 대 인원을 지파별로 기록할 때도 유다지파는 오만육천칠백삼십명이요 르우벤지파는 삼만칠천오백육십명이요 하며 수많은 인원을 정확하게 기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겨우 그렇게 많은 숫자도 아니고 12명을 이야기 할 때 12명쯤이라고 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가 보기에 열한명은 확실히 받은 것 같은데 나머지 한명은 받은 것도 같고 안 받은 것도 같고 감이 안 잡혀서 쯤이라고 표현한 것일 겁니다. 가끔 우리가 집회하면서 은혜를 받을때보면 불 받은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폼은 그럴싸한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체험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머릿속보다는 가슴에 불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과 이야기 하다 보면은 이상하다 저 사람은 배운 것도 없는데 말하는 것이 범상치 않다 합니다. 무엇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두려움도 염려도 겁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은 누구 보다고 내가 잘 압니다. 받았는지 않았는지를 말입니다.
성령충만 받아 보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은혜 받고 성령 받으면 술 담배를 끊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노름을 하는데 손 발 다 짜르고도 끊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사람을 달라지게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어느 순간에서부터 하나님이 목적이 됩니다.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에는 예수가 목적이 됩니다. 전에는 고기 잡으로 돌아가던 사람들 일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니 달라졌습니다. 성령 받아보십시오 땅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하늘에 쌓아 놓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특징은 앉아서 믿지 않습니다. 가슴이 부글부글해가지고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합니다. 전도도 하고 봉사하고 싶고 기도도 하고 그렇습니다. 누구 섬기고 싶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풍선에 바람 빠진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거룩하게 폼을 잡아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성령 받으면 예배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이 다릅니다. 성령 받으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엡5: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은 지금 너희가 성령충만한 삶을 살고 있느냐라는 질문으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술에 취한 것을 성령 충만한 것과 대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받으면 술 취한 사람처럼 담대해집니다.
계집종 앞에서도 몸이나 사리던 베드로가 산헤드린공회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이 많아집니다.
술 취한 사람은 말이 많아집니다. 떠벌이가 됩니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그럽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기 줄줄줄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술 취해봅시오 걱정근심이 없습니다. 리어카 밑에서 자도 그 어디나가 하늘나라입니다.
여러분 더 큰집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 집에 사랑 빠지고 은혜 빠지면 지옥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우리는 사모해야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은 자기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먹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 오면 살어! 하며 전도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너도 나도 다 데리고 옵니다.
술 취하면 거리가 멀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가면 물이 좋다나... 아무튼 저는 길거리를 가다보면 속이 터집니다. 아이들 지나가는데 그 사람들 자식은 안키우는지...무슨 과부촌 120명 대기...등등 궁금해서 가보고 싶은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일단 눈이 뒤집히면 거리고 뭐고 없습니다.
당신 성이 뭐요 하고 결혼 합니까 거리를 보고 결혼 합니까? 제 처가가 전라도 여수입니다.
한번씩 갔다 올라치면 거의 반죽음입니다. 내려가니 14시간입니다. 2시간 누워있었더니 병원에 누가 입원했다고 연락와서 다시 올라오니 12시간...힘들어도 그럼에도 사랑하는 아내의 친정이자 사랑하는 처가 식구가 있기에 거리를 잊어버리고 갑니다. 한 대전쯤에 사는 여자하고 결혼 할걸...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불이 붙으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합니다. 거리를 보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술 취하면 특징이 시간이 가는 줄 모른 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지루해 하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이 길다고 투덜대지도 않고 시계를 보지도 않습니다.
술 취하면 원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아봐요... 모두가 친구이자 사랑의 대상입니다. 원수가 없습니다.
어어 털어버리자고...
술 취하면 꼭 무엇인가를 사들고 옵니다. 오다가 도중에 놓고 와서 문제이지만 뭐라도 사들고 옵니다. 주고 싶어 합니다.
술 취하면 계산 감각이 없습니다. 술을 더 시키고 안주 더 시키는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술 취한 사람이 시킵니다.
교회 헌금하는 사람은 부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술을 요, 잘 배워야지 잘 못 배우면 집도 뿌시고 살림살이를 남아나지 않게 합니다.
어디서 성령충만도 제대로 받아야지 어디 지하에서 엉뚱한 것 받아오면 교회공동체는 흐트러집니다.

결론

: 성령충만의 목적은 교회세우는 것입니다.
술 취한 것과 성령충만 한 것은 모습을 같아도 본질적으로는 다릅니다.
술 취함은 타락한 육의 본성이지만 성령 충만함은 영의 본성입니다.
술 취한 것은 육체적이지만 성령 충만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술을 많이 먹으면 필름이 끊긴다든지 하지만 성령의 능력은 맑아집니다. 깨끗하게 합니다.
정신 몽롱해진다고 해서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십시오 그리고 은혜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런 질문에 에베소 교인들은 솔직히 겸손하게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요한의 세례만 알지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체면차려 대충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그런 걸 믿는다고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해야 합니다. 이래야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게 한다면 얼마나 쉬울까요?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라면 은혜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인도가 자신을 인도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 교회가 살아나고 여러분을 통해 전도되고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여 조국강산이 성령의 불꽃이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들은 잃어버린 영성인 성령충만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를 통해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면 좋겠습니다. 큰 교회 대단한 교회 이야기 하지만 성령 충만한 교회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소원은 성령충만입니다.
옆 사람에게 물어 봅시다. 나 때문에 당신 살아 날꺼요...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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