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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온 아들 그 이후의 이야기 (눅 15: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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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무 목사 (영신교회)

  높은 언덕을 넘어 비탈길을 내려오던 한대의 버스가 있었습니다. 찻길 바로 옆은 가파르고 높은 벼랑이었습니다. 버스 안에는 많은 승객이 타고 있었고 워낙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이라 버스는 속도를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도중에 고장을 일으켜 수리를 하느라 지체하였기에 제시간에 정류장에 도착하기 위해 버스는 약간 속도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버스 앞으로 다섯 살 정도의 아이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버스기사는 당황하였습니다.

  급정거를 해버리면 버스는 균형을 잃고 길 옆 벼랑으로 떨어져야만 했고 직진하면 저 앞의 어린이가 죽음을 당해야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이 짧은 시간에 선택을 하여야 했고, 많은 승객을 구하기 위해 어린이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쿵하는 충돌의 소리가 나고 버스는 계속 직진하다가 잠시 후에 겨우 멈추어 섰습니다.

  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피 흘리며 죽어있는 어린아이의 시신을 보며 승객들은 운전기사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꼭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느냐고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운전기사는 그 어린아이의 시체를 안고 한없이 울며 하늘을 향해 통곡했습니다. 운전기사가 안되어 보였던지 이제 승객들은 운전기사를 향해 위로의 말을 던졌습니다.

  그때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던 운전기사가 승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은 이 아이는 제 아들놈입니다.” 승객들은 모두가 얼굴을 땅으로 떨어뜨린채 숙연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이 장은 우리가 익숙하게 잘 아는 3개의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잃어버린 1마리를 찾기 위해 목자가 수고하다가 그 잃은 1마리를 찾아 기뻐 돌아와 잔치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잃은 동전의 비유입니다. 10개의 동전을 가지고 있던 여인이 동전하나를 잃어버렸기에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동전을 찾아서는 이웃을 불러 기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는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잃어 버렸다기 보다는 그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미리 받아 먼 길로 나갔습니다. 그는 방탕하게 살다보니 거지신세가 되었습니다. 돼지를 쳐주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연명했지만 그것도 얻어먹을 수 없게 되니 그제서야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 집에 종노릇이라도 하려고 돌아옵니다. 집나간 작은 아들을 날마다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 나가 그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했습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집나간 죄인을 기다리시고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용서,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 동전을 찾는 한 여인의 마음, 그리고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주님의 품을 떠난 우리를 기다리시고 간절히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3번째 잃은 아들의 비유는 두개의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로 인해 기뻐하는 아버지와 불평을 터뜨리며 못마땅해 하는 큰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큰 아들의 예상치 못했던 행동에 더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생각할 교훈은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종종 이산가족의 상봉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대할 때마다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부모와 자식이, 형제가 몇 십 년 만에 마주대할 때 그 감격이 대단히 크리라는 것을 느껴 보곤 했습니다. 집을 나가 몇 년을 소식 한 통 없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을 때 그 부모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요, 우리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기쁨으로 맞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난주일 초청잔치를 통하여 저희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드렸던 분들 중에 37분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하여 하나님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말씀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본문을 보면,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의 형체를 멀리서도 알아보고 달려가서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종의 한 사람으로 대해주기를 기대하고 왔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그를 사랑스런 아들로 대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기쁨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동양에서는 나이든 어른이 황급히 뛰어가는 것은 그 풍습이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아버지는 자신의 품위나 체면에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아들이 살아서 돌아 왔다는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사무엘하 14:33절에서 다윗이 형제를 살해한 압살롬을 용서하면서 입을 맞춥니다. 그것은 압살롬의 잘못을 다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의 죄를 지금 용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함으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말씀 22-24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 이 내 아들은 죽었습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습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본문에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여 아들의 누추하고 냄새나는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새 옷을 입힙니다. 옷이란 당시에 신분의 상징을 나타내었습니다. 아들로서 그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손에 가락지를 끼웁니다. 가락지는 아들의 권리입니다. 이것으로 아들의 권리까지 회복되었습니다. 발에 신을 신긴다는 것은 그를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맞이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대근동에서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본문은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마음의 즐거움을 잔치를 통해 나누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의 귀향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본문은 “내 아들은 죽었습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습니다가 다시 얻었노라”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이미 그 영적 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다시 살리셨도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이미 잃어버려진 영혼입니다. 그러나 돌아옴으로 다시 찾은 영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9: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새 가족 한 분이 등록하면 사실 살찐 소를 잡아 잔치를 벌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즐거움, 기쁨이란 단어가 6번이나 소개됩니다.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그와 같이 기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기쁨, 교회의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1년 365일 잔치집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축제입니다. 찬양은 기쁨의 노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어찌 우리가 슬퍼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아버지의 기쁨과 대조되는 큰 아들의 분노요 불평입니다.

  본문말씀 25-28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큰 아들은 집에서 울려나오는 잔치소리와 노래 소리에 영문을 몰라 종에게 물었습니다. 잔치의 연유를 알게 된 큰 아들은 당연히 함께 기뻐하고 동생을 환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작은 아들의 귀향에 아버지도, 종들도 기뻐하고 모두가 기뻐하지만 큰 아들만은 예외였습니다. 왜 큰 아들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큰 아들의 마음과 같은 분은 없습니까? 어떤 면으로 큰 아들의 분노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큰 아들의 불평처럼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일을 했지만 내게는 잔치 한번 벌여준 적 업지 않은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하고 돌아온 이 못난 놈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까지 잡으셨다니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마 큰 아들은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말에 더 흥분되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종으로 부려먹어도 시원치 않은 놈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다니요?

  그래서 그런 퀴즈도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가장 싫어한 두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일까요? 답은 첫 번째로, 살진 송아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잡아먹힐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왜 이 잔치에 함께 참여하고 즐거워하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도 오해를 합니다.

  한 젊은이가 버스를 탔습니다. 마침 빈자리가 보이길래 민첩하게 얼른 가서 앉았습니다. 잠시 후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한분이 버스에 오르셨습니다. 이 젊은이는 착한 마음으로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리에 앉아 주머니를 뒤지시더니 이 젊은이에게 돈 천원을 내미시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아 할아버지 이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 얼마나 고마우셨으면 그러실까? 그러나 이까짓 일로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정중히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계속 젊은이에게 천원을 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까 싶어 ‘감사합니다’ 하고 돈을 받아서 그 돈을 주머니에 넣는 순간에 할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놈아 뭐하고 있어. 빨리 가서 버스 요금 내구와” 하고 말입니다.


  왜 큰 아들은 이런 오해를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지만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잃어버린 재산보다, 그가 허비한 세월보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기쁨이 더 컸던 것입니다. 죽은 줄로만 아들이 살아있었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온 것에 비할 기쁨이 아버지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까짓 재물은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의 영혼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라고 경멸하지만 아버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4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곧, 아버지의 마음과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잔치에 방관자요 불평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2)아버지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 29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일이 없더니”
 
  본문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뭐라고 항변하고 있습니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명령)을 어김이 없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을까요? 아들은 아버지의 일상적인 명령에 충실하게 순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밭일도 열심히 하고 소도 잘 돌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아버지의 명령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간 상황에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뭐라고 요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이런 요구(명령)를 하셨을 것입니다. 

  먼저는, “네 동생 좀 찾아 보아라” 는 요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동생을 찾아본 흔적이 없습니다. 만약 동생을 찾아보았다면 돌아온 동생에게 이리도 냉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란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 일입니다. 이일은 한두 번하고 지나갈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생애를 살아가는 날 동안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 옆에 있는 분들하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동생 찾으러 갑시다” 고 말입니다.


  다음은, “네 동생 좀 돌봐주어라. 고생하다 돌아온 동생 좀 사랑해라” 는 요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동생을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 모두 옆에 있는 분들하고 인사해 봅시다. “돌아온 동생 좀 사랑해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큰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복음 전파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는 말씀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랑의 명령입니다.  요한복음 13:33-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 두개의 큰 명령을 무시하고 살았다면 그것은 우선순위의 잘못입니다. 모든 봉사가 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전도와 사랑의 명령에 늘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종종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세세한 율법의 요구에는 충실했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길에 서서 기도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명령에는 순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아들의 자격이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은 그 시간까지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본문 29절에도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큰 아들은 모범생이요 성실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 착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큰 아들은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열심히 일하였기에 아들의 자격을 얻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의 기준에서 보면 작은 아들은 이미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고 아들이라 불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노력이나 공로,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켜 업적을 쌓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으스댑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한 세리와 창기들을 멸시합니다.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1-2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큰 아들의 기준처럼 바리새인의 기준으로는 세리와 죄인들은 말씀을 들을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도 없습니다. 같이 음식을 먹기만 해도 불결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예수가 왜 그런 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24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7-28절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이 복을 누릴 자격도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축복을 믿고 들어오는 자 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준비한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탕자는 살진 송아지를 먹을 자격도 없습니다.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 그 은혜 때문에 그의 잘못은 용서받고 그 아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가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품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이런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공로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에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넘치기를, 그리고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구원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저희에게 아버지의 자녀가 될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없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불러주시고 자녀 삼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형제를 사랑하며 늘 복음전도에 힘쓰는 저희들이 되도록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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