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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겸손합니다.(빌 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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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하기 50일 시리즈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성품 가운데 겸손만큼 자주 오해되는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 겸손이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겸손은 수줍음이 아닙니다. 소심함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함도 아닙니다. 연약함도 결단력이 없음도, 무기력함도 아닙니다. 확신의 결여도 아닙니다. 불안정도 아닙니다.

겸손은 자신에 대해서 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잘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을 비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사실 겸손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겸손은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자신에 대한 높은 평가를 오히려 요구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안정감을 가질 때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자만심이 많은 사람이나 자랑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은 불안감을 감추는 사람입니다. 자만심은 언제나 불안감을 덮어보려는 노력입니다. 온 세상을 손에 다 넣고 있는 것처럼 큰 소리 치는 사람은 사실은 가장 큰 두려움을 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랑하고 과장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모두 불안감을 감추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겸손의 극치의 자리에 서셨지만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았습니다. 누구에게 속해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엇 하러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겸손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겸손한 자에 대한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건지십니다. 구원하십니다. 도우십니다. 인도하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높이십니다. 겸손하면 존귀케 하시리라는 약속이 거듭 거듭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죄를 열거하면서 첫째 자리에 교만을 두었습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를 하늘에서 쫓겨나게 한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를 쫓겨난 사탄으로 만든 죄입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사랑하십니다.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 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참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를 보배처럼 여기십니다. 집에 돈 좀 나가는 귀한 물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그것을 어떻게 간수하시지요? 그냥 되는대로 내 돌립니까?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여기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겸손을 그처럼 귀히 여기실까요? 그것은 겸손이란 사랑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이란 또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듯이 마음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교만을 없이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 보다는 자기 스스로 교만한 생각을 중단해야 합니다. 거만하지 않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이 되지 않기로 행동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선한 것이 없어”라고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것이고 자기보다 남의 최선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다른 사람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아 망각이 겸손에는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다보니 “이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묻는 일조차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면 나하고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도우려고 하는 것,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겸손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신을 적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실천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3장18절은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연습한다는 것은 반복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보고 마는 것은 연습이 아닙니다. 피아노 연습도 그렇고 운전 연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자연습도 그렇고 달리기 연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해서 실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해서 실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한번 안 해보고 끝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없어요. 열매한번 달아보고 일년 가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하기 위해서는 애쓰는 반복훈련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같은 훈련을 매일 두 주간 이상해야 연습이나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가 별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힘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계속 하다보면 잘 할 수 있고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베일 수 있습니다.

사랑과 겸손이란 여러분이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실천할 수 있는 네 가지 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다른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을 연습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기가 어려웠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형매장에 가서 물건을 사서 값을 지불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방송이 나옵니다. “4번 계산대를 열겠습니다.”라고 하면 그 순간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면 주일 예배에 오시면서 주차를 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보니까 한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두 대도 그것을 보고 접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1)액셀레이터를 밟는다.  2)브레이크를 밟는다. 3)다른 차가 거기 대도록 기다린다. 여러분은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말합니다.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롬12:10, 표준새번역) 존경한다는 것은 그런 경우에 우선권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느 장군들처럼, 승리자들처럼 백마를 타고 입성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그의 죽음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삶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가 자신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했기에 우리가 이 영광스런 예배의 자리에 모두 나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먼저 한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2. 겸손을 연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열려 있고, 지적에 대해서도 열려 있으며, 비판조차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겸손의 주요요소입니다.

겸손이란 가르침이 통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듣고 배우려고 하면서 자라가는 마음입니다. 지적하면 고치려고 드는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 할 수 있다고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 비난을 수용해야 합니까? 주위의 사람들이 지적하면 그걸 받아들입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잠언 15:12) 거만하면 남이 충고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가까이 가서 도움말 구하려고 전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언제나 그 밑바닥에 불안감이 자리합니다. “남의 충고를 따르면 내 권위가 상실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폭로될 텐데” 그러나 지혜로운 충고를 받아드리면 교만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위에 있는 거만한 사람을 좋아합니까? 물론 좋아할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느껴질 것입니다. 모두들 거만한 사람보다는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드리면 충고를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15:32) 책망의 말일지라도 달게 받으면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정을 받는 일에 열려 있기에 언제나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을 우리 바로 옆에 앉아계신 분이 알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여러분은 덜 다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교정해주면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한번 해보지요” 그런데 싸움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티격태격 싸우시는 부부들을 한번 보십시오. 교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다툼이 일어날 때 잘 살펴보시면 교만이 추한 머리를 내밀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간 외울 구절은 잠언 13장 10절입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듣는다고 하는 것이 겸손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우리는 거꾸로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듣기에는 느리고 말하기에는 빠른. 누구와 대화를 해도 상대방을 존경하면, 그리고 자신이 겸손하게 처신한다면 그 사람이 말 하도록 듣는 일을 먼저 할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경하는 사람은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배우자를 존경하면 말할 때 듣습니다. “내말 들어봐요”하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3. 잘못을 수긍하는 것은 겸손을 연습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이것이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라면서 한번도 부모들이 잘못했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커서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고 가장이 되어도 자기 실수에 대해서 인정을 잘 못합니다. 하면 가장의 권위가 무너져 내릴까봐서 불안 해 하는 사람입니다. 혹 여러분은 “내가 잘못 했어”라고 말 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게 사람들이 잘 못 했다고 말할 때는 어떤 때인 줄 아십니까? 잘못했다고 말해놓고 다음 순간이 조심스럽더라고요.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너는 . . .” 그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닙니다. 잘못한 것을 정말 알면 그렇게 나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했다는 전제가 아니라 자기 잘못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요 솔직한 인정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는 자라면서 한 번도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면 사람들이 무시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수를 인정하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여러분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 이미 알고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이나 손아래 사람에게 여러분의 실수를 인정한다고 여러분을 무시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히려 존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관계를 개선하는 첫 걸음은 겸손으로부터 언제나 시작합니다. 겸손을 선택하시고 연습하시고 잘 할 수 있기까지 계속하십시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복의 지경을 넓히는 중보 기도자가 되라”이렇게 붙어있지요? 어제 오후에 중보기도에 동참하실 분들을 모았더니 80명 필요한데 100명 넘게 신청을 해서 왔습니다. 제가 보니까 중보기도에 은사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보니까 우리교회에서 열심 있는 사람들은 다 온 것 같더군요. 일단 맡으셨으면 열심히 일주일에 한 시간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죄를 고하며 서로 기도하는 것을 보편적인 훈련과정으로 삼게 되면 건강한 개인, 건강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죄 고백과 중보의 기도가 있는 곳에는 건강함이 찾아오게 됩니다. 울산교회 좋은 교회라고 늘 말하는데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중보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4. 여러분의 계획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것을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대개 우리는 하나님과 의논도 하지 않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복 주시길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은 계획을 복 주시도록 요구합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면 기분 별로 안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제직회에 열심히 참석 안하는지 압니까? 참석해봤자 별로 결정 되는대로 시행되는 것을 못보잖아요. 다 결정된 것 결과 보고만 듣고 하니까 시간을 누가 거기 내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제직회에 열심이지 않는 999명의 제직들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더군요. 한번 어떤 선교사가 오셔서 자기가 선교한 나라에 선교센타를 짓기로 결정을 했다고 도와달라고, 후원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어요. “누가 그 결정을 했습니까?” 하니까 어떤 위원회에서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그 위원들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그랬습니다. 선교사님이 오셨으니 식사대접 하고 주무시도록 하고 뒷날 갈 때 차비하라고 봉투까지는 드렸지만 더 이상은 제가 지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결정하는 일에 동참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요새 총회선교부에서 규정을 바꾸어서 선교후원교회 협의회 회장은 자동직으로 실행위원회에 들어오도록 했더라고요. 그래서 결정할 때부터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결정하는 일에 참여를 해야 뒤에 결정에 따라서 행동을 하지요. 결정은 딴 사람들이 해놓고 뒷감당만 하라고 그러면 여러분 중에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렇게 대우를 하지 않습니까? 계획을 세울 때는 하나님을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잖아요. 의논도 안 해 놓고 “하나님 이 일에 복 주십시오” 기도해놓고 생각한대로 빨리 안 도와준다고 실망을 하죠.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담하지요. 불평하지요. 그것을 보고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교만인줄 모를 때는 그랬다손 치더라도 이제부터는 그렇게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처음 첫 단계부터 그분이 주인 같으면 주인하고 의논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 눈치봐가면서 결정을 해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기로 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해야 일이 풀리지 않겠어요? 결정은 여러분들이 다 하시고 하나님보고 축복하는 일에만 가담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이라도 화 나겠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미워하십니다. 교만한자를 원수처럼 여기십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시죠? 교만한자는 물리치지만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 삼아서 도움이 안 되는 경우들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복식 탁구를 쳐도 잘 치는 사람과 한 편을 먹어야 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탁월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반대편으로 삼으면 이길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승산이 없는 일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원수로 삼으면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게임 끝난겁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젊음, 여러분의 청춘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돌아서 버리면 여러분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쳐다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교만하면 하나님이 원수처럼 대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수처럼 여기는데 누가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약4:7) 야고보의 충고에 귀를 기울입시다. 하나님께 순복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라고 권면합니다. 자신을, 그리고 자기 계획을 하나님께 내어맡기십시오.

“여러분은 육신의 한 부분이라도 죄에 내맡겨 악의 도구가 되게 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처럼 여러분을 전부 하나님께 드려 의로운 일에 쓰일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롬6:13, 현대어성경)

우리 생명 모두와 우리 계획 전부를 하나님께 맡겨드립시다. 그 분이 뜻이 있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직도 여기 머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이요 그 분의 뜻에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격려하는 눈빛 사랑하는 눈빛, 귀를 사용 할 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온갖 흠담하는데 귀를 기울고 따라다니면서 함께 동참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고, 입을 사용해도 한 마디 격려의 말을 해주고 위해서 기도해주고 우리 지체의 어느 부분이든지 바른 데에 써야 됩니다. 특히 울산교회 제직 여러분들은 올해 흠담하지 않기로 연초에 모두 헌신 서약을 했습니다. 우리 생명 모두와 계획 전부를 하나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분이 뜻이 있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직도 남겨두신 것 보면 하나님이 할일이 계신 것 같아요. 우리를 쓰실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게 겸손이고 그것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보통은 여자가 무드에 약하다고 말하는데 마리아는 예외인 것 같습니다. 따지고 있습니다. “아니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쳐녀인데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그러므로 태어날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불리울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아듣도록 설명하니까 마리아가 응답하지요? “당신의 계집종이오니 당신의 뜻대로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오해와 조롱,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협당할 수 있는 처지였지만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기를 드리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겸손은 그런 것입니다.

겸손이란 자기의 한계를 알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진지하게 말씀하실 때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바로 자신이 인간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면 잘 할 수 있는 것도 있어요. 그러나 연약한 부분도 있습니다.

겸손이란 정직하게 이 두 가지 사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진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가진 약점에 대해서 없는 것처럼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이란 언제나 거짓된 자기 평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능력과 연약에 대해서 공정한 정확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진리에서 출발하실 때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불변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한히 사랑하시며 여러분에게 놀라운 재능을 주셨고 동시에 여러분은 치명적 결함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이 모두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놀라운 재능을 받은 자들입니다. 동시에 치명적 결함을 가진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머리가 똑똑하지만 양심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똑똑한 지혜가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능력이나 업적을 보고 사랑하시질 않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겪는 많은 스트레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지 않는 일들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더 잘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나는 지금보다 더 할 수 있어, 지금보다 더 성취할 수 있어, 더 많이 가질 수 있어, 모두 다 손에 넣을 수 있어” 하지만 여러분은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가질 수 있다고 선전하지만, 대한민국 1%라고 유혹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시간도 재능도 능력도 결코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것 이상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십니다. 수퍼맨이 아닌 것도 아시고, 수퍼 우먼이 아닌 것도 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겸손은 스트레스의 치료제입니다. 겸손이 쉼에로의 초대입니다. 교만이 가득하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해놓았는데 안되니까 스트레스 받을 수밖에 없지요. 겸손해지면 스트레스 대신 쉼을 얻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멍에라고 하는 것은 한국 소들이 끄는 멍에하고는 다릅니다. 한국소는 힘이 좋아서 한 마리 목 위에 멍에 하나씩 얹혀집니다. 그러면 쟁기질을 하잖아요. 써레질도 하고 밭 갈기도 하고 다 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소는 두 마리 위에 같은 멍에가 얹혀져 있습니다. 그게 “내 멍에를 메라, 나하고 같이 멍에를 메자”는 주님의 초대의 진의입니다.

멍에라고 하는 것은 동업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힘만 가지고 살려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 가볍고 쉽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그 멍에를 메고 가니까 인생길의 모든 수고와 부담을 혼자 떠안을 일이 없습니다.

멍에는 또한 통제의 상징입니다. 두 마리의 짐승 위에 하나의 멍에를 두면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보폭으로 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멍에를 하시면 방향을 설정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보폭을 결정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같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두 마리의 소가 수레를 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힘은 힘 있는 쪽에, 큰 쪽에 다 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멍에를 메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그래서 없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많은 일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저도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내가 감당도 못할 많은 일들을 다 맡겨서 내가 스트레스 받도록, 불평하도록 짜증내도록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 아니라는 것을 저는 확실히 알거든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피곤하고 만들고 짜증나게 만들고 그러면서 좋아하시는 하나님 같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믿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쁘게 당신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20년 전에 개척교회 시작하면서 제가 사랑하는 두 여인에게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교회일 열심히 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짜증내면서 까지 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십시오.” 제가 20년 전에 그 말 했는데 내가 요즘 보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그 말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신경 곤두세우기까지 해서 일할 것 없다. 네가 기쁘게 하는 것만큼만 일해라. 네가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만큼만 울산교회 담임목사 일 해라” 하나님 그러시는 것 같아요. 혹시 제가 앉아서 쉬고 있더라도, 졸고 있더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쁨과 평강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은 목사란 직업 때문에 말이죠 제가 여러분한테는 웬만하면 친절하게 상냥하게 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되는 사람이 있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 그렇죠? 내가 바쁘고 한데 옆에서 자꾸 말시키면 내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별로 예전과 같이 교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아직도 내가 제대로 못하고 있구나. 진짜 친절해야 할 사람, 내가 죽고 나면 제일 많이 울 사람한테 내가 아직도 친절하지 못 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삶을 의미 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많은 일정으로 인해서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만한 것만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때는 내가 계획을 다 짜놨지요. 그러나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나를 만나자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당한일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건 내가 계획 안했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는 내 계획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우선입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내셨으면, 하나님이 그런 전화 받게 하셨으면 내가 계획대로 안 된다고 짜증 부리는 대신에 “하나님 당신이 주인이지요? 내 시간의 주인은 당신이시지요? 나는 원치 않았지만, 계획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이 있으니까 내가 이 일을 잘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기도하면 갑작스런 방해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무슨 삶입니까? 미가서 6장 8절이 말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바른 것 실천하고 인자를 행하며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을 사는 게 아니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단순합니다. 바른 일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기도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시119:37). 온갖 모든 것 추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 보면서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짜증내고 그렇게 인생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그랬죠? 택시 기사를 하면서 손님이 자기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짜증을 내는사람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인생이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택시 핸들을 잡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 운명, 우리의 직업, 우리의 가정, 우리의 수입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처럼 생각해요. 하나도 여러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뭐가 된다 싶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줄 알고 겸손해야 되요. 그게 신앙인 이예요. 안된다 싶으면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게 신앙 아닙니까? 그 가운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기루입니다. 환상입니다.

여러분은 다음 숨을 들이키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이 부딪힐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그것은 여러분이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 오 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정확하게 여러분은 모르잖아요? 오 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 일을 여러분 마음대로 어떻게 다스려요?

가장 바르게 그리고 안전하게 인생을 사는 방법은 운전대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고 나를 통해서 주께서 계획하신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될 때에 우리는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한 평생 신앙생활 하신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타가 모두 신앙인이라고 인정하는, 동네사람들도 여러분이 교회 나가는 줄 알고 있고 교회 오면 믿음 좋은 집사님으로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혹시 아직도 여러분이 운전대를 잡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주님이 그것을 잡도록 내어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놀랍게 변합니다. 만약 거부하면 여러분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신 그 분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주보에 보니까 김수동 강도사님이 글을 썼네요. “섬김의 기쁨이 가득한 해” 저도 칼럼을 “섬김의 기쁨” 이랬는데 우리가 짜고 한 건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쭉 읽어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네요. 교회 나온지 2년밖에 채 되지 않은 아직도 그 흔한 집사라는 타이틀도 없는 분이 주위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잘 섬기고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 보다 주위의 필요에 더 민감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잘못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겸손해지는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계획을 하나님께 내어맡기십시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37:11)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온유한자가 난폭한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라.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하나님의 복은 겸손한 자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복을 평온한 가운데서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귀중히 여기십니다. 보배처럼 아끼십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함께 다음과 같이 기도드리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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