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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견고한 언약 (느 9: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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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대략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어진 상황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 적응하며 살다 보니 농부가 되었다는 식입니다. 또 살다 보니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태어난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 몸에는 질병이 찾아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 돌아볼 겨를 없이 당장 앞에 주어지는 일 처리하기에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노라는 사람들입니다.
   
또 자기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정을 버리기도 하고 다른 것들을 희생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 가서는 정작 목표하는 바는 이루었는데, 그 보다 많은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합니다. 이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출발을 위해 분주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의 두 방법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위대한 사람, 그렇다고 잘 알려진 사람, 남들이 볼 때 칭찬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삶의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알고 살아가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인생을 검토 없이 무턱대고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능한 선장이라면 배의 속도보다는 진행 방향에 신경 쓰듯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 보아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지난 52일 동안 오백 여명의 성도들이 새벽제단을 쌓으며 마땅히 가져야 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환경에 따라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목표를 성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온 공허함 때문에 인생의 의문점을 안고 있던 사람들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52일간 우리를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질문하며 기도했습니다.

52일간은 공교롭게도 ‘목적이 이끄는 삶’ 이전에 나누었던 말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성을 쌓았던 52일과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힘들었던 만큼, 느헤미야가 성을 쌓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숙원 사업이던 예루살렘성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치를 벌일 만도 한데 곧바로 또 다른 일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을 건축한 데서 멈추지 않고, 성 건축을 통해 공동체의 흐름을 바꾸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면에 주께서 주신 감격과 기도의 응답을 안고 이 자리에 나와계신 분들이 많은데, 바로 여기서 우리 또한 52일간의 놀라운 체험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로 인해 잔치를 벌일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할 이유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과 교회의 많은 일을 성취해 보았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축복으로 남는 성취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경험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취가 또 다른 상실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이 우리 가운데 계속 축복이 되게 하고, 외형적인 축복이 내면적으로도 진정한 생명력을 갖게 하고 공동체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52일간의 새벽제단을 통해 단지 내 삶의 목적을 찾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민족의 체질을 바꾸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완공하고 나서 행했던 일들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더듬어 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9장 1,2절, “그 달 이십사 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백성들은 자신과 열조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회개란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범한 죄를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샅샅이 찾아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구체적으로 아파하며 돌아보는 것입니다. 조상이나 이웃 등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탓과 책임으로 돌리며 다시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반성하며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두 가지 기준에서 합당한 회개였습니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지거나, 자기 양심에 찔릴 때 회개 합니다. 이런 회개는 세상에 너무나 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율법을 따라 회개했습니다. 9장 16절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에서 알 수 있듯이 주께서 주신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아주 차원 높은 회개였습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를 수없이 주셨음에도 그 기회를 짓밟아버리고 무시했던 자신들의 무지한 행동까지도 회개했습니다. 9장 29절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 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들의 죄와 허물과 교만한 태도를 감추지않고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긍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하고 거역한 자신들의 완악함을 뚜렷하게 대비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죄 된 백성인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말씀의 기준에 따라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끊임없는 권고를 거절한 것까지 회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타락하고, 사회가 왜 이렇게 타락했을까요? 회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기독교가 타락하고 병들게 된 시점을 A.D.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시작한 때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박해 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릴 때는 진리가 살아서 생명력이 있지만, 국교화되고 공인되어 제도화 되었을 때는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 부류의 학자들은 교회 타락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지적합니다. 초대 교회 때는 교인들이 죄를 범하면 공동체 앞에 나와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그 사람의 죄 사함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었고,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적합한 징계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몇 주 동안 성찬을 받지 않도록 하거나, 몇 주 동안 서서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죄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공동체가 나서서 감시해주고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책임져 주었습니다.

원래 교회 권징이라는 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회복의 통로였는데, 현대 교회는 징계하고 교회로부터 축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부폐한 속성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죄를 짓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지켜볼 때는 죄를 잘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훨씬 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속성을 고려하여 공동체는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갈 수 있었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공동체 앞에서 죄를 고백하던 이 행위를 신부에게만 하도록 바꾸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지적에 동의합니다. 회개할 수 없고, 회개를 받아 줄 수 없고, 함께 책임져주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체는 곧 병듭니다. 이것은 교회 부흥의 역사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교회 부흥은 공동체가 죄를 회개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회개는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백성들 마음 속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입니다.  남이 자기 잘못을 지적할 때 누가 그 지적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올 때 죄가 보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인생의 기준이 될 때에야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을 두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합니다. 포스터모더니즘이란 한마디로 ‘상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드라마, 문학 등 우리가 접하는 매체 속에 숨어있는 공통적인 사상으로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꼭 남자와 여자가 살아야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요즘 동성연애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성끼리 부부관계를 이룹니다. 십 수년 전만하더라도, 꼭 신앙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윤리와 도덕이 가정을 지켜주었습니다. 이제는 그것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깨져가고, 집단적 이기주의에 마약, 성인 포르노, 도박, 스와핑, 자살, 사교집단 등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살고, 그러한 생활 방식을 합리화시키고 체계화시켜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파괴문화가 예술과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를 실험이나 하듯 세상과 우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라는 기준을 잃어버린 이 세대는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닌 자기 쾌락과 지식, 경험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있으니 회개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진정한 회개를 하나님 앞에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전부다 의로운 사람밖에 없습니다. 정치를 보더라도 모두 다 의로운 사람 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자도, 386세대도 국민들이 보면 다 보이는데 스스로 의롭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 아닙니까?

진정한 회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기준을 따라 어디서부터 우리가 잘못되었는지, 변질되기 시작했는지,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하나하나 더듬어보며 회개하는 데에 있습니다. 회개를 통과하지 않고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회개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로운 가정,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스스로를 다듬었기에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오늘 우리도 각자 살아온 삶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야 할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기준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 가정과 교회와 민족 그리고 우리 교회사를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회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합리화 시키기 위해 되돌아보지는 마십시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회개하여 깨달은 역사를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문서로 작성하여 늘 반복해서 읽고, 후대에게도 알려주겠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9장 38절,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새 출발을 이야기 할 때 크게 세가지, 즉 교회와 가정 그리고 내면의 변화를 많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습관과 관계의 변화로 이어지고, 실제적인 적용은 교회와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알려면 직장보다는 외적인 제약이 없는 가정이나 교회와 같이 순수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곳에서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출발을 결심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과 약속이라는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굳은 결심이라 할지라도 현실 앞에서 얼마나 쉽게 깨지고 타협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고, 물러설 때도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또 기회를 놓친다면 이제는 영영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백성들은 문서로 남기기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당대 백성들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후대에게도 전하고 그들도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공감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0장에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0장 1절에는 총독인 느헤미야와 당시 부총독이었던 시드기야가 나옵니다.  2~8절까지는 21명의 제사장 명단이, 9~13절에는 17명의 레위지파 사람들이, 14~27절까지는 44명의 각계각층의 두목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10장 29절에는 하나님의 율법, 즉 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겠다는 맹세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는 우리와 우리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에 따라 자기 삶의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면서 두 가지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 있는데, 우선 하나님 말씀을 잃어버림으로써 말씀보다 세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무엇인가를 세세하게 살피겠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말씀 외에 받는 영향은 무엇이든 차단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본문의 뒷부분을 보면,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모습이 나오고, 심지어는 이방족속과 결혼한 사람들까지 이혼하도록 합니다. 바른 가치관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로를 다 끊습니다. 스스로 작성한 문서에 따라 백성들이 다시금 새롭게 결단하는 장면입니다.

어느 잡지사 기자가 의문을 가지고 두 가문을 조사한 결과에 대해 여러분도 한번쯤은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미국의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드와 친구 맥스쥬크의 이야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12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부부는 자녀들을 세속적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앙의 5가지 원칙을 세우고 믿음으로 길렀습니다. 그 결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11명(1명은 사망)의 자녀와 873명의 후손들 중에서 대학 총장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성직자 100명, 군 장교 75명, 저술가 80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의원 3명, 상원의원 1명, 부통령 1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들 후손 중에는 미국 사회에 재정적으로 폐를 끼치거나 손해를 입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같은 때 뉴 잉글랜드 지방에서 자란 친구 맥스 쥬크는 아무런 의식 없이 주어진 대로 살다가, 방탕한 여인과 결합하여 자신도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 1292명 중에는 유아로 사망한 사람 309명, 직업적 거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 50명, 도둑 60명, 살인자 80명, 그저 그렇게 산 사람 53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교로 하나님의 섭리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가치관의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목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백성들이 문서로 작성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여호와의 단을 중요하게 여기겠다라는 헌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과 물질사용의 중심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 사용, 그 중심에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예배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물질사용, 그 기준은 십일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편리와 유익을 따라 살기시작하면서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성전 중심의 생활은 너무나 쉽게 깨지고 부서질 수 있기 때문에 문서로까지 남기며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결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52일 동안 새벽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구체적으로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결단했습니다. 이제는 말과 느낌 그리고 생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도전합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가족들을 다 불러모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다 불러모으십시오. 그리고 함께 기도하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칙, 우리 삶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가르쳐주신 다섯 가지 원칙을 온 가족의 동의 하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 사인하십시오. 한 자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떠날 때 마다 복사해 주면서 원칙을 계속 지켜 나가도록 하는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혈육으로 인한 가족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영적 자녀로 양육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을 영적인 예루살렘성, 그 속에서 자라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들로 양육해 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살기 어렵고 또 어두운 시대에 있습니다. 무턱대고 환경 속에 그리고 주어진 상황 속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중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제껏 품어왔던 꿈과 인생의 목적이 많은 경우 미처 알지 못했던 상처와 아픔 속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음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십시오. 진정한 가치와 영원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 그 속에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삶의 희망, 가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걸어가는 여러분의 걸음 걸음 위에 하나님 나라가 활짝 열리는 복이 계속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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