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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는…….(몬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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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바울은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의 종(노예)입니다. 그런 그가 도망을 했다가 잡혀서 옥에 갇혔는데 다행히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합니다. “전에는 네게 무익한 자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가 유익하게 되었으니 오네시모를 받아 달라”는 겁니다.

이 바울의 편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봅니다.

1. 오네시모입니다.

당시 종들이 도주하는 경우는 주인의 재물을 훔쳤거나, 아내와 딸들을 강간 또는 악의를 품고 살해 했을 때입니다. 바울의 편지에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해라.” 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오네시모는 재물을 훔쳤을 겁니다.
이 빌레몬서의 정절은 11절, “전에는”, “이제는”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전과 이제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수양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나아지기 위함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완전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의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은 완전히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네시모의 거듭남은 그냥된 것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옥중에서 나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마치 여인이 해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낳았다고 하는 것은 “나처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양자 삼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과 같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 믿습니다.” 정도가 아니라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가슴까지 바뀌어졌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어린아이 같았는데 이제는 어른 되었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도와 줄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되는 것 아닙니다. 신앙은 곧 삶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네시모. 전에는 종이었습니다. 책임이 없었습니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됩니다. 소망도 없었습니다. 종이었으니까. 자유도 없었습니다. 종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자신의 것이 없었습니다. 그 생명은 주인의 것입니다. 뭐하나 신나는 것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언제나 짜증  나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하고 이들은 또한 화평을 만듭니다. 그러나 종은 아닙니다. 종으로 있을 때는 불평, 불만, 짜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다투게 됩니다. 어쩌면 사회에, 그 인생 자체에도 별로 도움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자유도 얻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는 그의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나에 대해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 믿음이요, 이웃에게 대한 응답이 사랑이며, 자신에게 대한 응답이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응답한다는 것은 책임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기쁨이 생겼습니다.

창세기 3장에, 죄로 인해 사람이 추방되었습니다. 어디서? 에덴입니다. 에덴은 희락,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에덴에서의 추방은 곧 기쁨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거기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기쁨이 있을 때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는 이제 누구에게나 유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앙일 때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신앙인이 되어야 유익한 존재가 됩니다. 쓸모없는 존재와 유익한 존재를 구별 지은 것은 신앙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우선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이 주업이고 사는 것이 부업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그분이 내 생애를 책임지실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어떻게 하신다고요? “더 하신다.”고 하십니다. 더 하신다는 것은, “더욱 많게 하신다.” “더욱 풍성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염려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 풍성케 하시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갈수록 더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OUTSIDE  예수 믿는다면서도 거꾸로, 먹고 마시고 입는?것이 먼저인 사람들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니 갈수록 뭐만 늘어요? 염려만 늘지요.

신앙생활은 남는 시간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먼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겁니다. 월급타면 먼저 십일조를 준비합니다. 시간도 먼저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배시간부터 정해 놓고 나머지 시간으로 약속을 하든지 뭐하든지 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뭐가 달라졌다고요? 삶, 생각, 행동, 가치관, 우선순위 등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뀌어야 진짜 예수쟁이입니다.
가나의 혼인집.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본질이 바뀌었습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돈이 생기면 먼저 무슨 생각부터 먼저 합니까? 술입니다. 그러나 본질이 바뀌면? 그래서 가정을 사랑하게 되면? 그럴 때 돈이 생기면 무슨 생각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초대 교회.
사도행전 2장 45절에 보면, 자기가 아끼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답니다. 그게 과연 가능 할까요?
그러나 생각이 바뀌니까, 우선순위가 바뀌니까, 가치관이 바뀌니까, 전에는 내 욕심대로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로 바뀌니까 가능한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예수 믿고 뭐가 바뀌었습니까? 여전하지 않아요?
야고보서 3장 5-12절에, “어찌 너희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할 수 있느냐?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무화과나무가 어찌 감람나무 열매를 포도나무가 어찌 무화과를 맺겠느냐?” 고 하십니다.
이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구별 되어져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전에는 땅만 보고 살았지만 이제는 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와서는 변해야 합니다.
근심하던 사람이 평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괴롭히던 사람이 남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게으르던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투기만 하던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도 변해야 하지만 또한 남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변화시켰습니다.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 오네시모가 이제는 유익한 사람으로 바뀌어진 것은 그냥 된 것 아닙니다. 바울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내가 옥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믿음의 할머니, 믿음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아닙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소망도 없었습니다. 삶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많은 기도,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오네시모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냈습니다. 달라진 오네시모를 글로 써서 돌려보냈습니다. 혹 가능하면 자신에게 되돌려 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보낼 것 없이 그냥 데리고 있어도 됩니다. 그리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내가 데리고 있다.” “그가 전에는 무익한자였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익한 자가 되었다.” 뭐 그래도 빌레몬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오네시모의 죄를 빌레몬이 용서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가 되어야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복음 증거로 말입니다. 사랑을 심어가고, 화평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저를 생각할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다면? 누가 저를 생각할 때마다 괜히 기분이 나쁘다면?
좋은 중보자가 되어야합니다.

로마서 15장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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