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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되는 성령행전 (행 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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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병의 목사 (후암교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싸운 대상은 둘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만 카토릭으로 부터 기독교를 개혁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기 쉬습니다만 사실 그것만은 아닙니다.  루터가 싸운 종교개혁의 가장 큰 적수는 理性主義와 神秘主義라고 합니다.

理性主義라 함은 스콜라철학을 말합니다. 이것은 啓示와 理性을 混同하며 인간이 세운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의미합니다.
또 神秘主義라고 하는 것은 신비하고 또 다릅니다. 자기의 神秘體驗에 집착해서 主觀的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도 하나의 人本主義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한 루터의 신앙은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理性中心으로 생각할 때에는 계시보다 이성을,  신앙보다 지식에 앞세우게 됩니다.
또 한편 神秘主義者들은 자기의 체험을 소중히 여겨 주관적 신앙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감정을 啓示化 하고 자기의 신비체험을 絶對化하는 또 하나의 人本主義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感情을 啓示化 하거나 꿈을 마치 성경처럼 絶對化 시키려하는 것 역시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0장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이미 아시는데로 고넬료라는 로마의 백부장이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강림과 다를 바 없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심 같이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처럼 복음이 땅 끝까지 퍼져나가는 繼續되는 聖靈 行傳의 신비하고 놀라운 역사입니다. 성령행전의  특징을 발견합니다.

1. 성령의 행전은 개혁의 연속입니다.(2-3절)

행11장 1-3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할례자들) 베드로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고 “당신이 어찌하여 유대인으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었느냐 그럴 수가 있느냐.
유대인으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 고 심각한 반발에 부딪칩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유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고넬료는  이방 사람일 뿐 아니라 게다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민족적인 원수인 로마인이요 그것도 일반인도 아닌 군인입니다.
이런 고넬료의 집에 유대인이 들어갔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행전은 이와 같이 외부적인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지만 결국 성령의 역사는 기독교를 초월적인 개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율법과 민족과 국경과 전통을 초월합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해명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해명이라기보다는 사도행전의 전체를 뜻하는 사도행전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이와 같이 하셨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성령이 이같이 하셨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절대로 사도의 행전이 아니라 성령의 행전이라고 함이 맞다고 봅니다.

2.  성령의 행전은 사로잡힌 자를 통해 계속됩니다.  17절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11:17절
나는 성령이 시켜서 나는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이 사건은 지금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전통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지금 기독교로 바뀌고 기독교가 낡은 전통을 무너뜨리고 세계적인 종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가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이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합리적이냐 불합리하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것이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해로우냐 , 이로우냐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셨다고 할 때는 우리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습니다.
No comment, No Choice입니다. 성령이 하셨다하면 우리는 누구나 어떤 관습이나 규례나 협소한 민족주의도  초월하게 됩니다. 12절에 다시 봅시다. “성령이 네게 명령하셨다. 나는 다만 순종했을 뿐이다.”의심 말고 가라는 데  어찌 안갈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 그리스도인라면 주님과 한 몸을 이루신 자라면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인도 하시는 데로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롬 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세상  적으로 가난해도  세상 적으로 사면초가로 포로가 되어도 그렇게 심령은 평안하고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과 기쁨과 희열을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나를 부르시고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고 성령이 나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성령이 나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이 나로 찬송하게 하고 성령이 나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죄와 교만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후회할 것입니다. 결국 절망과 허무에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3.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15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절
성령은 말씀과 언제나 함께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은 성령이 타고 다니는 수례라.”고 루터는 증언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데 성령이 고넬료에게 임하였습니다. (행 10:44-46)
이렇듯 성령은 말씀과 동시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요3:5, 벧전1:23)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 군인에게도 나타났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이 시간에도 말씀을 그렇게 사모하며 기대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들을 때 성령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4. 성령의 행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의 마지막 18절 말씀을 봅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가 규례에 맞지 않는 일을 했다고 여론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와 같이 행하셨기에 순종하였노라고 해명하였습니다. 결과는
“이 말을 듣고 잠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 하였습니다.
서로 인생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지만 이 말씀을 듣고서는 성령 안에서 마음을 열고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입니다. 말씀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행전은 계속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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