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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받을 사람들 (느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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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미국의 국립묘지인 알링톤에는 독립전쟁이후 미국의 역사를 지켜낸 사람들의 묘가 있습니다. 이곳은 관광코스로도 유명하지만, 단순한 관광코스 외에도 미국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알링톤을 방문하도록 합니다. 알링톤에 가면 미국을 빛내고 지켰던 유명한 사람들의 묘와 함께 마지막 코스에 무명용사의 묘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무명용사의 묘가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희생했던 이름모를 용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일수록 또 강대국일수록 무명용사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도시마다 무명용사의 묘와 꺼지지 않는 불이 있어서, 러시아의 신혼부부들은 이곳을 반드시 참배하면서 기념촬영을 한다고 합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역사의 요구 앞에 조용히 사라져간 사람들의 희생을 문화와 생활 속에서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는 결코 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여러 신문을 훑어보고 방송을 보았지만 현충일에 관한 기사나 특집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희생은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와 화해에 걸림돌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현충일을 단순히 과거에나 존재했던 사건으로만 기억한다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자원하는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갈 뿐 아니라 이 사회는 개혁과 법률, 철저한 이해관계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 11장과 12장은 성벽을 건축한 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냈던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일을 이루어낸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공로는 잘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쉽게 잊혀질 수 있는 무명용사들의 역할에 대해, 성전의 문짝하나 단 사람의 이름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느헤미야라는 한 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역사 속에 잊혀졌던 수많은 사람들-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는 분명히 포착된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공평하고 실수 없으신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한국의 주변 상황은 정말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국방, 자주독립을 말하지만, 좀더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열강들의 각축장으로서 한국은 강대국 사이에서 수없이 줄타기를 해왔던 아픔이 있습니다. 강대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해야한다고는 하지만 이상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남북의 끝없는 대결과 강대국들의 이익 사이에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써갈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을 어떻게 풀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만약 2004년 6월 동안교회와 동안 청년들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 기록하신다면 어떻게 기록이 남을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당시 성을 건축한 이후 역사의 전환기에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특히 느헤미야가 무명용사들의 역할을 클로즈업 시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노라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우리도 작지만 크게 쓰임 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느헤미야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무명용사들을 통해 그 삶의 원리를 찾기 원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명용사들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기 삶을 헌신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미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7장 4절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예루살렘성은 참으로 화려했던 도시로 다윗을 거쳐 솔로몬에 이르러서는 세계 전무후무한 문화와 문명을 자랑했고 뛰어난 건축술과 예술성을 자랑했던 도시였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화려함도 솔로몬이 누렸던 영화와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하기를 원했고 누리기를 원했고 흠모했던 성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영광과 영화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부터 90년 후에 느헤미야가 와서 성을 건축할 때까지 160년간이나 폐허가 된 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70년간의 포로기 이후에 성을 재건하겠다고 사람들이 돌아왔던 적이 있으나 또 적들이 쳐들어와 일부 회복해놓은 것마저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풀과 무너진 벽돌, 옛날 화려했던 잔해들만 나뒹구는 참혹한 곳이었습니다.

성에 머물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치워야 할 수많은 쓰레기와 잔혹한 잔해들 때문에 시 외곽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로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사장의 나라요 왕 같은 족속으로 삼겠다 하셨으며, 메시아를 보내어 전 세계를 통치하겠다고 약속하셨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성을 건축했어도 성에 거할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에 거한다는 것은, 적들이 쳐들어올 때 제일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는 일에 헌신해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두목들, 즉 지도자들이 거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성에 거하는 조건으로 상여금이 주어졌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거하면서 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어림없었기에 제비뽑기를 해서 성 외곽에 사는 사람들 중 10분의 1을 성안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제비뽑기에 뽑힌 사람들을 보고 재수 없게 걸렸다고들 얘기했겠죠.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들이 아닙니다. 나머지 10분의 9, 제비 뽑히지 않은 성 외곽에 부유하고 사치스럽게 살던 사람들 중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생긴 사람들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생긴 사람이란, 내적으로 새로운 충동과 변화가 일어난 사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아쉬울 것 없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제비에도 뽑히지 않았으며, 건설되는 예루살렘 성만 보면 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 성은 어떤 성인가. 하나님 약속하신 영적인 세계가 아닌가.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는 땅이 아닌가. 성의 외곽 지역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 보다 힘들고 수고스럽다 할지라도 이웃과 후손들에게 물려줄 영적 유산을 개척하고 쌓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 비전과 꿈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우리끼리 사는 것 보다 저곳에 들어가 약속하신 믿음의 유업을 세워가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겠는가.’ 불 같이 뜨거운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자원하는 자들, 안락함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무너진 조국을 위하여 자기 삶을 던지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성을 다시 세울 수 있었고, 후손들에게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줄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 역사는 새롭게 기록될 수 있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서 외에도 출애굽기 35장 성막을 지을 때 달란트대로 자원하는 무명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성막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무명의 사람들은 광야 길을 걸어갈 동안 성막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막에 나와 죄를 회개했습니다. 백성들이 성막을 통해 공급받은 힘으로 포기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무명의 용사들이 섬겼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수동적인 사람 수천 명 수만 명이 자원하는 몇 사람에 의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살아있는 소수가 중요합니다. 우리교회는 출석 교인이 약 사천 명 가량 됩니다. 지난 52일 새벽기도 때는 오백 명 전후로 꾸준히 출석하는 것을 보며 사천 명 중에 불과 오백 명 뿐인가, 재직이 천여 명이 넘는데 중직자만 해도 그렇게 되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제 마음에 감동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성도, 새벽에까지 나와 기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새벽에 누가 깨운다고 나오겠습니까? 엄마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청년들이 새벽에 나와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들이 자기 문제만을 놓고 기도했을까요? 개인적인 어려움도 없건만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겠기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허락받은 자기 삶을 함부로 쓸 수 없어 주님께 자원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눈물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 일이 아닙니다, 내 일입니다. 국가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내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사명입니다.’라고 받아들이며 새벽 기도와 새벽성가대,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깊은 절망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만드실 것을 확신합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드오리아(D'Auria)의 소설 중에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진 케리 쿠퍼 주연의 하이눈(High No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보안관은 마을의 법질서를 사수하려고 합니다. 악당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총 잘 쏘는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이 일이 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이  어렵다 할지라도, 유혹이 많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역임을 믿고 자원하는, 바로 여러분같이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만드실 것입니다.

성 외곽에서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무명용사들을 통해 주님은 당신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간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2004년 6월 하나님의 역사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저는 간절히 소원합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민족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헌신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둘째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또 다른 자원하는 무명의 용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전의 일을 맡아 섬겼습니다.

11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이들이 성전 안의 사역에 헌신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독을 아시지요? 다윗과 솔로몬 때에 제사장을 말합니다. 또 스라야라는 사람은 잡혀가기 전의 제사장을 말합니다. 그 자손들이 새 역사관을 가지고 해야 할 수많은 일 중에서도 성전의 예배를 돕는 일에 헌신하며 봉사했습니다. 새 역사관이란 이스라엘 역사가 패망한 이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에 실패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언약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언약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부터 자기 쾌락과 이익을 쫓기 시작했으며, 윤리와 도덕은 무너지고 공동체는 파괴되어 서서히 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죄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사유하심을 맛봅니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삶을 살다가 와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보니 버려진 인생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러한 예배의 기적과 이적을 무명용사들은 알았기에 예배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배는 진정 우리 삶을 바꿉니다. 말씀이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찬양이 지친 마음에 새 힘을 불어 넣고, 기도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시야를 밝힙니다. 그리스도 안의 참된 교제는 세상에 찌들고 지쳐있던 몸과 영혼에 용기를 주고 격려해줍니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통해 이렇듯 새롭게 될 수 있다면, 예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 세파에 지친 사람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진정한 자기 가치를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도록 돕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다. 예배위원으로, 찬양대로, 안내 위원으로 그리고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팀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섬김과 봉사가 있습니다.

저는 새벽 4시 30분쯤 혼자 본당에 올라와 볼 때가 있습니다. 6시 쯤 되면 예배를 안내하는 집사님들이 와서 무릎 꿇고 기도한 후에 본당 안을 다 살핍니다. 여러분이 버리고 간 휴지조각도 다 줍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인상 찌푸리지 않도록, 예배하는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분들입니다. 오늘 어쩌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 가운데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는 계기가 되도록 준비하고 섬기는 마음, 주님은 이들을 통해 생명을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영적 역사를 일으키는 예배에 실패한다면 다른 모든 것에도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으면 영적으로 심각한 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 찬양의 감격, 하나님의 음성과 사인 그리고 비전이 없다면 몸부림 치셔야 합니다. ‘주님! 제게 예배를 통한 만남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격을 사모하십시오. 예배는 우리 피조물 됨을 확인하고, 가는 길과 그 의미를 공급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를 확신 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12절에 나오는 아다야는 가르치는 사람, 교육하는 사람들입니다. 소그룹으로 모여 하나님의 기준을 삶 가운데 바로 세우도록 말씀으로 교육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열어가셨습니다. 이렇듯 주차장에서 주방에서 카페에서 서점에서 교회 구석구석 말없이 섬기며 예배가 예배되도록 숨어서 섬기는 봉사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 가십니다.

셋째, 무명용사들 중에는 기도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17절 말씀 “또 아삽의 증손 삽디의 손자 미가의 아들 맛다냐니 저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 되었고”, 기도할 때 말씀을 인도하는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라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무릎 꿇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하나님께서 그를 지도자라고 명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는 기도로 하나님 역사를 인도하고 주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의 지도자로 누구를 명하실까요? 돈 벌어오는 사람일까요, 가장일까요, 나이 많은 사람일까요?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 문제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위치에서 발휘되는 지도력도 있지만, 저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 생사화복을 주관하심,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움직이심을 믿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인 사람 느헤미야의 눈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진정 공동체를 움직이는 지도자로 발견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5장에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이야기한 후, 결론적으로 6장에서 이 일을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강함을 입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절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사도 바울 같은 영적 대가들도 성도들에게 분별하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담임목사인 저와 여러분을 영적으로 가장 가까이 묶어두셨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공급원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세워주셨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역을 평가 받고 기쁨과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둠의 영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할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제가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만들고, 영적으로 성도들을 무장하고 성숙시키는 일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게 하고자 저를 방해할 것입니다. 또 저와 여러분의 의사소통 통로를 차단하여 건강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담임목사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고 해주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 라인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이 기도제목을 적어 중보기도 카드를 내시면 적어도 쉬지 않고 매일 열 시간 이상씩 중보 기도하는 팀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예배와 말씀의 기름부음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아들이고 헌신하며 새롭게 결단하도록 기도하는 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 기도할까요? 눈에 보이는 예배라는 사건 이면에서 기도가 맡고 있는 역할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할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어쩌면 작고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눈 말씀처럼 작지만 하나님 눈에 포착될만한 일이기만 하면 됩니다. 모세처럼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는 육체적인 이득을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자원하는 마음, 예배 자리에 나아가 자신의 피조물 됨과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함과 동시에 자신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대신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겸손한 간구, 나아가 현상 뒤에서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개인의 삶과 역사를 위탁하는 기도 용사로 서는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의 역사를 새롭게 써 가신다는 사실을 이제 영적인 눈을 들어 살펴보셔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유명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 대신 보다 더 중요한 주님의 관점에 있어서 소중한 삶이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여 한 행위는 결단코 잊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느헤미야와 같이 영적으로 예리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책에 기록하여 기억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주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를 잊지 않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2004년 6월 한반도와 한국의 역사적 기록에 저와 여러분이 겸손하고 진실하게 쓰임 받았던 무명용사처럼 쓰임 받고 칭찬받아 기록되는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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