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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분노를 극복하십시오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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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춘수 목사 (강동교회)

오늘 교회 오시느라 고생들 많이 하셧지요.
혹시 교회 오시면서 분냄을 갖고 오신 분들은 없습니까?
저는 종종 어디를 가거나 할때 이런 분냄의 문제들이 발생할때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어디 한번 가려면 왜 그렇게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모릅니다. 남자들은 먼저 준비를 하고 차에서 기다리는데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도 교회 오시는데 서로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서 분노하실 수 있습니다. 또 길이 막혀서 화가 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을 흔히 감성세대라고 합니다.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감성이 발달되었지만 반면에 감성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문제가 많은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많은 현대인들이 감정의 문제를 겪습니다. 감정조절을 못하고 감정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많은 어려움을 겼습니다. 여기에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여 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미숙한 감정처리 때문에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겪습니다. 특히 많은 경우에 현대인들은 분노의 문제를 갖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소개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나자 그 죄는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같은 가정의 형이었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입니다.
왜 가인은 살인하게 되었을까요? 분노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서 분노로 인해서 일어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가인이 분노하여서 결국 살인을 낳습니다.이것이 단지 가인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 때문에 병을 앓는 분도 많습니다.많은 경우에 질병의 원인이 분노로 인해서 생깁니다. 분노 때문에 서로 대적하면서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분노 때문에 신앙 생활의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얼마전의 일입니다.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기다리던 사람이 앞에서 전화를 하던 사람이 오래 전화를 하는 것에 분노하여서 그만 살인을 하고 말았습니다.심지어는 부부지간에도 부부싸움을 하다가 분노하여서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났을때 가장 먼저 그 죄가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바로 감정입니다. 죄는 우리의 감정을 쉽게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  분노하는 감정이 나를 주장하면 통제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노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가인이 분노하였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풀지 못하고 마음에 계속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상황 앞에서 어떤 일 앞에서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성을 타고난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함의 감정 그 자체를 죄악시여기지 않습니다. 바울은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분을 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분을 내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도 우리가 분을 내시는 것을 이해하십니다.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분노 그 다음의 해결방법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가인과 같이 분노의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때로는 씻을 수 없는 문제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1. 왜 분노합니까?

첫째 분노는 억울함에서 옵니다.
5절에 보면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여기 가인이 분노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왜 동생의 제사는 받아주고 자기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는가에 대해서 억울한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어떤 억울함이 있을까요? 자기나 동생이나 다같이 지은 소산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와 동생을 차별하는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까?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히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제사를 드리는 행위는 같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기쁘게 보시고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자들을 상주시는 자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아벨의 제사에 드려진 제물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벨은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최상품의 정성이 들어간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릴때 먼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여기 가인이 분노할 때 그는 자기의 문제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먼저 자기 밖에서 문제를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가인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당하고 나는 문제가 없다”라고 지극히 주관적으로만 자기를 볼 위험이 많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때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가?
나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직장에 분노하십니까? 나를 잘 받아주지 않는 부모에게 분노하십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분노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며 친구들에게 이 세상에 대해서분노하십니까? 그 억울함이 무엇입니까?

둘째 분노는 시기심에 옵니다.

본문의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해서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들에 있을때에  가인을 쳐죽이게 됩니다.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벨이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동생 아벨 때문에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를 본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저 동생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동생에 대한 시기심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형인 동생보다 동생인 아벨이 인정받는 것이 자기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분노가 많습니다. 그런데 시기심이 많은 사람들의 경우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경쟁관계로 여깁니다. 비교하면서 경쟁하면 자꾸 마음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인정을 받는 입장이 되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내가 대장이 되고 1등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가인처럼 내가 높아지지 않고 내가 인정받지 않고 남이 높아지고 남이 잘 되는 것에 대하여 시기하는 본성이 다 있습니다.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는 거룩한 질투 거룩한 시기가 필요합니다.
남이 잘해서 잘되는 것을 보고도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다면 그 사람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남이 잘 되고 인정을 받는 것을 보면 나도 그 사람처럼 열심히 하거나 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동기로 삼으면 좋다고 여겨집니다.

나보다 더 봉사를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열심히 봉사하면 됩니다.나보다 더 찬송을 잘하는 사람이 시기심이 일어납니까? 그렇다면 더 열심히 찬송을 배우고 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잘하는 것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둘다 잘 되는 기회가 됩니다.
목회자인 저는 교회 부흥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이 되면 저는 마음이 좋습니다. 그러면서 저 교회는 어떻게 부흥이 되었는가 바라보면서 배우는 기회가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탐방도 보내고 배우게 합니다. 여러분 부흥하는 교회, 큰 교회 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여야 정치인들이 많이 하는 말이 ‘상생’이라는 말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함께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강조하는 'win win'의 삶의 방식이요 ‘I am  OK You are ok'의 삶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시기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시기심은 나만 잘되고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 가인은 시기심보다 먼저 형제의식을 갖아야 했습니다. 오늘 교회 속에서 시기심으로 인해서 분노감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동생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삶에 이런 형제의식을 갖기를 바랍니다.

셋째 분노는 감정조절을 못해서 오는 죄입니다.

7절에 보면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면서 ‘죄의 소원“을 ’너가 다스릴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인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분노할 때 감정을 조절하는 것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믿음이 있어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모세는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고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그렇지만 모세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한번 표출하고 만 사건이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광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회중들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합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기를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아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의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였으냐“라고 원망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분부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합니다. 그때 모세가 외치기를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을 쳤습니다. 모세가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감정대로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 사건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믿음의 사람도 온유한 사람도 감정조절을 하는데 있어서 실수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런 실수와 문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외성적으로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 분노를 표시햇다면 어떤 사람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 자기 자신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신대학교의 정태기 교수라고 계십니다. 이 분은 한국의 내면치유의 대가입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상담을 공부할 때 일입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클레이런스 발톤 교수에게 상담을 공부하던 중에 어느날 상담실을 찾아갔는데 갑자기 발톤 교수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태기 자는 자네를 더 이상 지도할 수 없네 차라리 공부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게 어떻겠나?”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정교수님은 배신감과 분노로 이를 갈아야 했습니다. 6년여동안 고생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면서 교수실을 나왔습니다.그리고 힘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뒤에 와서 정교수님의 어깨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조금전의 그 교수님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태기 자네 이제 나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미가 조금 보이네”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문제는 바로 정태기 교수님이 상담을 공부하면서 조금도 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얌전하게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정태기 교수님에게 많은 분노와 문제가 있엇지만 그는 남에게 자기를 내보이고 표현하지 못하는 소위 얌전병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의 많은 어머니들이 화병을 갖고 살았습니다. 분노를 안으로 삼키면서 온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 밖으로 잘 표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분노를 안으로 삼키면서 독기를 품고 가만히 있는 것도 문제인 것입니다.분노는 무조건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어떻게 분노를 극복합니까?

첫째 자기에게서 문제를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인이 화를 내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6절에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라고 합니다. 여기 가인이 조금만 자기에게서 문제를 찾았다라고 가정하여 보십시오. 분명히 가인이 잘못 드리는 제사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가인이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기 위해서 냉정함을 갖고 생각을 했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자기에게서 문제를 찾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조금만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에게서 문제를 찾으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만약 가인의 입장에서도 “내가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잘못해서 제사를 잘못드려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셧구나‘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서 문제를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의 문제가 대부분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너탓이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탓이라고 하면 사실 문제는 간단하게 풀려가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사 쉽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내가 공부를 못하는 이유를 어디에 돌립니까? 부모님이 충분히 뒷바라지를 해주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한 이유를 말할 때 내가 실패한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나쁘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목회자인 저 자신조차도 때때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어려움이 있으면 나에게서 문제를 찾기보다는 성도들에게서 문제를 찾을때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부부지간에 서로 분노하고 서로 싸우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너때문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어떤 청년 자매가 올린 글을 소개합니다.
결혼 8년차에 접어드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한 3년전쯤에 이혼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습니다. 이 남자의 경우는 딱히 큰 원인은 없었고 주로 와이프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 화근이 되었습니다.그리고 남자도 회사생활과 여러 집안일로 지쳐있던 때라 맞받아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각방쓰고 말도 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커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서로가 밉게만 보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암묵적으로 이혼의 타이밍만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도 눈치가 있는지 언제부턴가 시무룩해지고 짜증도 잘내고 잘 울고 그랬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 아내는 더 화를 불같이 내고 남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계속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외박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가지 긁을 때가 좋은 거라고 저에 대해 정내미가 떨어졌는지 외박하고 들어가도 신경도 안썻습니다.아무튼 뱀이 자기꼬리를 먹어 들어가듯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기를 몇달..하루는 늦은 퇴근길에.. 어떤 과일아주머니가 떨이라고 하면서 귤을 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에 남은 귤을 다 사서 집으로 들어갑니다.그리고 주방탁자에 올려놓고 욕실로 바로 들어가 씻고 나오는데, 여자가 남자가 사온 귤을 까먹습니다. 몇개를 까먹더니 이런 말을 합니다. "귤이 참 맛있네" 하며 방으로 쓱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이 남자의 머리를 쾅 치듯이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아내는 결혼전부터 귤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하고, 결혼후 8년동안 내 손으로 귤을 한번도 사들고 들어간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미처 생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순간 먼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예전 연애할 때에 길가다가 아내는 귤좌판상이 보이면 꼭 1000원어치 사서 핸드백에 넣고 하나씩 사이좋게 까먹던 기억이 나기 시작합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져서 내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게 됩니다.시골집에 어쩌다 갈때는 귤을 박스채로 사들고 가는 내가 아내에게는 8년간이나 백원도 안하는 귤한개를 사주지 못했다니 맘이 그렇게 아플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결혼 후에 어느덧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게되었다는걸 알게 된 것입니다. 아내는 자기를 위해 철마다 보약에 반찬한가지를 만들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신경 많이 써 줬는데 자기는 너무 이기적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남자는  며칠 후에도, 늦은 퇴근길에 보니 그 과일좌판상 아주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귤을 살짝 주방탁자에 올려놓았습니다.남자가 씻고 나오는 사이 아내는 그 귤을 몇개 까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묻지도 않는데 말도 꺼내지 않던 아내가 " 이 귤 어디서 샀어요? " 묻습니다.그러면서 " 귤이 참 맛있네 " 하고 몇달만에 아내가 미소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아내가 주방에 나와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사이가 안좋아진 이후로는 아침을 해준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그냥 갈려고 하는 남자를 잡고 아내가 ‘한 술만 뜨고 가라구요’하면서 붙잡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밥을 뜨면서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아내도 같이 웁니다. 그 뒤로 이 가정의 위기는 잘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둘째 분노를 바르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분노할 때 잘 해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분노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정서를 순화할 수 잇는 적절한 채널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람은 단지 하루 3끼 밥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에게는 정서적인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순화할 수 있는 적절한 취미생활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제가 아는 어떤 여자분은 분노하면 쇼핑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시장에 가서 사고 싶은 옷,화장품등을 실컷 사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뒷감당이 문제가 됩니다. 어떤 분은 화가 나면 밥을 실컷 먹으면서 푸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살이 쪄서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교회에서 장로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화가 난 목사님이 볼링장에 가서 공을 치면서 ‘아무개 장로 받아라’하면서 분노의 스트레스를 풀었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제는 건전하게 분노를 풀수 있어야 합니다. 엣날에 우리 어머니들은 시어머니아 남편에게 받는 화가 있으면 빨래터에 가서 빨래방망이로 열심히 방망이질을 하면서 가슴에 맺힌 것을 시원스럽게 털어냈다고 합니다. 또 집에서 다듬이질을 하면서 마음의 울분을 쓸어냈다고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 생활을 하면서 찬송하고 교제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감정이 많이 순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마음에 분노가 맺히게 될 때 토해내는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분이 울적하고 좋지 않을때 실컷 소리를 내어서울고 남녀 마음이 시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의 울분과 화를 실컷 토해하면서 기도하면 얼마나 마음이 시원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더러 분노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흉도 보고 욕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구약에 시편에 기자 다윗의 시를 보십시오.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깨 토해냈습니다. 가령 시편 58편을 보면 다윗이 자기를 공격하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지은 시를 보십시오.하나님이 저희 입에서 이를 꺽으소서,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꺽임같게 하시며 소멸되어 가는 달팽기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같게 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응답되고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말을 하면서 자기의 분노와 상처를 거기에 함께 고백할 때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화나 나면 욕을 합니다. 아주 가장 저주스러운 육두문자 쌍욕을하면 자기의 감정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대신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면서 시원스럽게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누가 들으면 문제가 되니까 그 사람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조심해야 하겠지요. 분명히 분노는 위험한 감정입니다.

셋째 마음의 평화를 발전시키라

여기에 가인이 분노할 때 하나님은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나 저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속에는 죄의 소원도 있지만 성령의 소원도 있습니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잠16;32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나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좀 더 노력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법을 스스로 잘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말씀을 매일 지속적으로 묵상하게  되면 그 말씀의 힘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주장하시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꾸 암송하니까 죄성의 독기가 빠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마음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한번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항상 말씀을 마음의 신조로 삼고 암송하면 그 말씀처럼 마음이 변해집니다.

우리의 인생에 분노는 축복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우리 인생에 분노는 재생산의 인생을 제한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분노는 우리의 인생에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져옵니다. 마음을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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