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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의 본분 (전 1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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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인 먹사 (목양교회회)

늘 저는 “사람의 본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본분(本分)의 사전적인 의미는 “그 사람이 마땅히 하여야 할 본디의 의무” 또는 “자기에게 알맞은 분수”입니다.  물건은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냄비가 있어야 할 자리는 부엌입니다. 냄비가 현관에 놓여 있으면 보기에 흉합니다. 만일 쓰레기통이 식탁 위에 놓여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쓰레기통의 분수에 맞지 않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그것은 본분을 다하는 것이나, 그들이 지위를 이용해서 부정축재를 한다면 그것은 본분을 망각한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에 힘쓰면 본분을 다하는 것이지만, 학교에는 가지 않고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학생의 본분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본분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은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반면에 본분을 망각하면 보기에 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대하여 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본분”이 무엇일까요? 지혜자 솔로몬은 말씀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사람의 본분 중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 함은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은 경외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 줍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경외’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두려움과 사랑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하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알지 못하는 그들이 그렇게 묻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본분을 다하려면 먼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입니다. 시편 100편 3절에 보니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음식물을 오래 내버려두면 저절로 곰팡이가 생겨나는 줄 알았습니다.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몸의 때가 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축축한 흙이 지렁이를 만들어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과학자인 파스퇴르는 세균과 아메바, 그리고 박테리아와 같은 작은 미생물조차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있었던 생명체 곧 그것들의 부모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습니다. 생명은 이미 존재했던 생명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백만 종류의 생명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때가 이가 되고, 음식찌꺼기에서 바퀴벌레가 나오고, 늪에서 저절로 물고기나 개구리가 생겨났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오는 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늘날 과학자들이 첨단 생명공학을 이용해서 아주 미세한 아메바라도 하나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났고 최초의 생명체인 아메바가 진화해서 수백만 종류의 동식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고 미신에 불과합니다. 천지만물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초과학적인 방법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지만물의 기원에 대하여 알려면 성경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됩니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의 첫 구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엿새에 걸쳐서 해와 달과 별들과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내용을 말씀해 줍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 현대 과학이 감탄할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동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소나무는 애초부터 소나무로, 감나무는 애초부터 감나무로 창조하셨고, 소는 애초부터 소로 만드셨고, 말은 애초부터 말로 만드셨습니다. 원숭이는 처음부터 원숭이로, 고릴라는 처음부터 고릴라로 만드셨습니다.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사람을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로 28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지구상에 수많은 동물이 있지만 오직 사람만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과학을 탐구하고 윤리적인 행동을 추구합니다. 사람과 흡사하게 생긴 고릴라나 원숭이를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이 한갓 이성 없는 짐승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원숭이나 고릴라보다 낫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처럼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저마다 용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목적도 없이 무슨 물건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다 목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9편에서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고 했습니다.

광대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무수한 천체들은 우리 귀에 들리지 않지만 큰 소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만물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이 없을 리 만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루려고 힘씁니다. 예를 들면, 직장인은 승진을 목표 삼고, 사업가는 매출 목표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진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삽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그는 다윗 왕의 아들로서 유력한 형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후계자로 지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귀를 주셨습니다.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다 조공을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파격적인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부유했던지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또 궁전에서 사용하는 그릇은 다 금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식물에 관해서도 조예가 깊어서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서 노래를 일천 다섯 가지나 지었습니다. 또 후비가 칠백인이고 빈장이 삼백인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를 천명이나 두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전 2:10)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솔로몬처럼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의 조건을 모두 다 갖추고 평생 동안 누렸던 사람은 솔로몬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모든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방 왕비들의 말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위해 산당을 짓고 그 앞에 분향하며 제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가 말년에 이르러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기록한 책이 전도서인데, 이 책은 솔로몬의 탄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솔로몬의 실패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솔로몬처럼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자칫하면 우리도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미스 코리아나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미인대회에서 입상한 여성들을 보면 자기들의 미모를 과시합니다. 저는 자기의 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들의 아름다움은 자기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것인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영광을 받으려면 그들에게 아름다움을 주신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비단 육신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나, 뛰어난 두뇌를 타고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영광을 받기보다는 그들에게 뛰어난 재능과 두뇌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가지고 사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었으면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텐데, 오직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4장 7절에는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 가지고 우상 숭배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것은 아무리 찬란한 업적이라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지라도 결국은 헛되고 헛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일을 이룰지라도 바벨탑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 것은 영원한 상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녀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것은 모든 부모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부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못한다고 반드시 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못해도 운동이나 예술, 또는 사업과 같이 자기가 잘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계발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 잘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낙제하면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께서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앞길에 열린 문을 두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와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한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명령이라면 몰라도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기슭에 당도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게하고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산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곳에 이르러 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놓고 이삭을 결박해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빼어 잡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급박하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불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사자가 말씀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그들은 주전 605년에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항복했을 적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포로로 잡아온 유다인들 가운데서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재주가 있고 총명한 소년들을 뽑아 왕립학교에서 삼년 동안 교육을 시키게 했습니다. 왕은 이 총명한 젊은이들을 가르쳐서 자기의 신하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왕은 이들에게 매일같이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왕이 하사하는 음식은 먼저 바벨론의 우상인 마르둑에게 제물로 바쳤다가 물려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왕의 진미를 먹으면 그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고, 이는 우상숭배에 참예한 것과 같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바벨론 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에 물과 채식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행동은 너무나 고지식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동료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왕의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한 네 사람을 한심한 듯이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감수한 네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네 사람이 비록 채식과 물만 먹었지만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욱 얼굴이 윤택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네 소년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뛰어나게 하셨으므로, 삼년 후에 느부갓네살 왕이 면접해 보니 모든 면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와 같은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을 택하여 왕을 모시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비록 손해가 나고 위험이 따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그 진실함을 인정받을 수 있지, 만일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의 분수를 압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한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분수를 망각한 결과였습니다. 마귀의 화신인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꾀인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음 받은 인간이 어찌 감히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도무지 가당치 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와는 뱀의 말에 넘어가서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분수에 맞지 않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분수를 모르고 마음이 교만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 해졌다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나 않으실까 해서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이 잘 살게 된 것이 우리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된 것임을 알고 우리 자신이 영광을 차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우리는 이 민족이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기독교인의 수가 천만 명이 넘습니다. 만일 일 천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불의를 거부하고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을 동경하고 세속화됨으로써 이 사회를 선도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완전히 세속화된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보고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돈과 쾌락이 현대인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문제를 만나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감정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 체면 따위를 거들떠보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 유리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타락했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본분”을 지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본분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계심을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 있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대에 설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킨 성도들은 사람의 본분을 지킨 사람으로서 영생에 들어가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기 욕심에 따라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불 못에 던짐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믿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심으로 사람의 본분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은혜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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