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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씨 (요일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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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예용범 목사 (여의도제일교회)

개와 고양이는 비슷한 것 같아도 본성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 개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주인께 충성하고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주인을 알아보고 아주 좋아합니다.

◦ 반면 고양이는 「공간」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따뜻한 공간, 부드러운 공간,
주인은 곧 잊어버립니다만 그 공간만큼은 잊지 못해 찾습니다.
그래서 이사 갈 때에는 고양이를 상자에 넣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와 고양이가 집을 찾아온다면
개는 주인을 찾아오는 것이고,
고양이는 집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속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 사람

사람도 겉모양은 비슷해도 다른 성품과 다른 기질이 나타납니다.
그 속에 씨가 다르기 때문인데
인생에게는 두 가지 씨 중 하나가 심겨졌습니다.

① 마귀의 속성을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신자 모두가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 불의를 좋아하여 죄를 짓고
◦ 피차에 미워하여 살인까지 합니다.

옛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이 씨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모든 자연적 성품의 사람들은 마귀의 속성 따라 마귀 짓을 합니다.
신사는 신사답게
숙녀는 숙녀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학자는 학자답게 할뿐 하는 짓은 마귀의 짓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을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반대로
②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곧 성도입니다.

  요 8:41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이들에게는 죄를 짓지 아니하려는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기회를 엿보고. 성도 일지라도 연약해서 죄를 짓습니다
다른 것은 죄 생활을 계속하려 하지 않기에 습관적 죄 생활이 없습니다.

  시 19: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불신자와 다릅니다.
불신자나 불신의 때에는 죄에 매여서 지었다면
이제는 옛 습관에 따라서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종전에는 「죄」가 나를 주장했다면,
이제는 「내」가 죄를 선택한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진 이후의 모습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죄에 대해서 자랑하는 모습이 아니라 애통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 유다와 3번 부인한 베드로의 차이를 아십니까?
가롯 유다의 경우 예수님을 판 「사실」에 대해서 후회를 했다면,
베드로의 경우는 후회 정도를 넘어서 마음으로부터 크나큰 애통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교도소는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범죄를 배웁니다.
그 안에서 죄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더 높은 담과 큰 형량이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참 교정은 하나님의 씨가 주입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아가페교도소를 설립 운영케 되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똑 같은 죄에 대한 각각 다른 반응!
아시겠습니까?

③ 서로 사랑합니다.
성도가 행할 사랑은,
세상의 때처럼 내 식의 사랑이 아니라

  23절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하여

하나님 식대로의 사랑으로 구별됩니다.

하나님 속성으로 사랑하는 사랑은 온갖 것을 다 사랑하지 않습니다.
◦ 주님과 주님의 관계된 것을 사랑하며
◦ 신령한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종전의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그 사랑에 비하면 얼마나 다릅니까?

2) 자연스러움

이러한 속성은 자연스럽습니다.
개가 개다움은 꾸민 일이 아닙니다.
고양이가 고양이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꾸미는 속성이 있습니다.
억지요, 부자연스러움이기에 「외식」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경건한 성품이 없습니다만 억지로 꾸며 모양을 냈습니다.
이러한 외식은 곧 드러납니다.
비나 땀이 오면 화장은 지워지듯이 환난이나 위기나 고통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참 좋은 모양은 자연적인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 성품!언제나 일관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전파와 구령에 있어서는 큰 사랑과 정열을 쏟았습니다.
어느 한곳에서나
어느 한때가 아닌 평생에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깊어만 갔기에 마침내 순교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런 하나님의 씨가 일관된 성품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뿐만이 아니라 동물도 곤충도 똑같습니다.
굼벵이는 살고자 하여 새벽에 이슬을 먹고자 흔적을 남깁니다.
부나비는 죽고자 하여 어둠 속에 날아들다가 불속을 뛰어듭니다.

내가 무엇을 자랑합니까?
내가 어디에 관심과 사랑을 쏟습니까?
곧 나를 웅변합니다.

3) 예수님의 오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죄 짓고 미워하는 마귀의 일을 멸하여 그 속성을 근절시키기 위함이요
무덤에서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씨를 우리에게 심기 위함입니다.

감사하게도 이 숭고한 생명의 일은 이미 일어났고,
내게도 믿음을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새 생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이 일을 이루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씨가 내게 심겨야만 그 씨의 생명력으로 새로워집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누구든지 이 씨를 주입받는 순간부터
영적 이해를 갖게 됩니다.
영적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나아가 생활조차 달라져서 「변했다」는 칭찬도 받게 됩니다.

또한 새로운 명령 체계에 들어가는데 명령자는 마귀가 아니라 성령님이시며
새 명령은
어느 성경에 기록되었던지
「신령한 삶을 영위하라」인 것입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 씨를 받은 자임을 믿습니까?
분명한 성품과 기질이 나타납니까?

4) 문제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씨가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밭에 상태가 어떤가? 따라 씨는 일찍 싹트고 늦게 싹트고 어쩌면 싹을 트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① 돌밭을 가리킵니다. --> 말씀을 받았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핍박 때 넘어지는 상태와
② 가시떨기 밭은 -->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것입니다.
③ 옥토는 --> 결실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 외에 또 다른 큰 문제는 비록 옥토라 할지라도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서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의 믿음이 요청됩니다.
더 이상 죄 짓는 죄인이 아니요 의인이며 미워하는 가인의 후예가 아니라 「사랑이니라」 하셨던 하나님의 자녀임을...

  결  론)

서양 격언에 「챔피언은 링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거기서 안정될 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씨가 심겨졌습니다.
이제 세상 안에서 의롭고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증명하며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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