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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앞에 서서 가는 교회 (막 10: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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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지 목사 (목양교회)

신약성경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네 권의 복음서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마가복음은 제일 간결합니다.  다른 복음서들보다 분량이 작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다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무엇보다도 행동적인 성경입니다.
1장부터 예수님이 공생애 활동을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론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뛰어듭니다.
마가복음은 ‘씩씩한 성경’ ‘박력이 넘치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도 마가복음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데 예수님이 앞에 서서 가시는 것으로, 앞에 서서 가시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20장과 누가복음 18장에 있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이 앞에 서서 가셨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쓸 때, 또 누가가 누가복음을 쓸 때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기록했는데  예수님이 앞에 서서 가셨다는 이야기를 왜 뺐는지 궁금합니다.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마태와 누가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 때 물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고하는 말씀에서 저는  예수님께서 앞에 서서 가시며 그 말씀을 하셨다는 점에서 제일 감동을 받는데 두 분은 이 이야기를 왜 뺐습니까? 복음서를 기록할 때 아주 간결하게 기록한 마가 사도님은 이 말을 넣었는데 두 분은 이 말을 왜 뺐습니까?’ 물어보려고 합니다.
마태 사도와 누가 사도가 뭐라고 대답할지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궁금한 것들이 많지요? 이 다음에 천국 가면 다 물어보세요.
그 때 물어볼 것들의 리스트를 미리 작성하세요.
예수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 바울 사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 이것들을 정리해 보세요. 그렇게 하면 천국 가는 것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천국에 가서 그렇게 하실 것을 생각하면서 목사인 저는 지금 말씀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 좀 더 정확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힘써야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전한 것이 그 때 예수님, 바울 사도, 그 밖의 성경인물들이 대답하는 것과 다르면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 엉터리!’ 하겠지요.
그 때 ‘우리 목사님 잘 가르치셨네! 짱이네!’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 물어볼 것들 가운데는 이 질문이 꼭 들어가야 합니다.
아니, 이 질문부터 해야합니다.
‘예수님, 나와 같이 부족한 것을 어떻게 해서 자녀로 택해 주셨습니까? 나 같은 값어치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 구원해 주셨습니까?  나와 같이 허물이 많은 존재를 어떻게 해서 이 천국에 오게 하셨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니라’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 때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앞에 서서 가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오늘은 이 질문들의 답을 찾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질문,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앞에 서서 가시는 것은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는 무언의 설교요 명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혼자 가세요. 저는 가기 싫습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고난 받을 것을 이미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9장 31절,

이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하신 오늘의 본문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자세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들이 나중에 그대로 다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진 것,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것,  그들이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준 것,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이방인인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서 사형 판결을 얻어냈습니다.
34절,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이 말씀이 이루어진 구체적인 모습을 우리는 얼마 전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요즘 다시 상영하는 극장들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 수난 예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수난을 대하는 태도를 몸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 사형 결의, 능욕, 채찍질,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피하지 않고 가셨습니다.
가시는데 앞에 서서 가셨습니다.
행위예술이라는 것이 있지요. 이것은 일종의 행위설교입니다. 행동설교하고 할 수도 있는데
설교 가운데 행동설교가 가장 강한 전달효과를 냅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설교에도 그대로 해당이 됩니다.

지난 금요일, 전교인 금요심야합심기도회 출석의 날, 특별 강사로 육군 군종감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오실 때 군복을 입고 오시라고 부탁했습니다. 6·25 쉰네 돌을 꼭 한 주일 앞두고, 군복을 입은 목사님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도들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군복을 입고 오셨는데 하얀 군복을 입고 왔습니다. 저는 육군 장교가 하얀 군복을 입은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처음에 차에서 와이셔츠 바람으로 내릴 때는 흰 양복을 입고 온 것으로 알았습니다. 저고리를 입는데 보니까 계급장과 명찰이 달려 있습니다. 물어보니까 군복 가운데 예복이랍니다.
저는 사실은 얼룩덜룩한 전투복을 입고 오셨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종감님은 ‘군복을 입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하니까 이 말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 일부러 예복을 입고 오셨던 것 같습니다.
또 예배를 인도하니까 예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군종감님은 예배에 참석하는 자세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앞에 서서 가시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계십니다.

찬송가 360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의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찬송가의 그 다음 가사입니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되려네

후렴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

여러분 과연, 주님을 따라 주님과 같이 가기를 원하십니까?
이 찬송가 가사 그대로 어디든지, 겟세마네 동산까지, 피땀 흘린 동산까지,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와 같이 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질문,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자,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는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어떤 모습으로 따라 가십니까?
짜증을 내면서, 마지못해, 주저주저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면서 따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왜 놀라고 두려워했을까요?
너무 당당한 모습으로 앞장서서 가시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연한 모습으로 앞에 서서 가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는 그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씩씩하게 가셨을 것입니다.
아마 빠른 걸음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중국어성경을 보니까 32절의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가 ‘야소 재 전두 주 문도(耶蘇 在 前頭 走 門徒)’라고 되어 있습니다. 걷는다는 보(步)자를 쓰지 않고 ‘달린다’는 주(走) 자, 경주한다고 할 때의 그 주 자를 썼습니다.
‘예수께서 앞에 서서 달려 가셨다’인데 무엇인가 근거가 있어서 이 글자를 썼겠지요.

저 위 고기리로 올라가는데 오른쪽에 오리 농장이 하나 있습니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다니는데 앞에 있는 오리가 뒤뚱뒤뚱 걸으니까 뒤에 따르는 오리들도 뒤뚱뒤뚱 열심히 걷습니다. 그것을 보고 앞에 가는 오리가 바로 걸을 수 있다면 뒤따르는 오리들도 바르게 걸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 뒤를 따르는 우리가 뒤뚱뒤뚱하면 안 되지요.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서 가십니다.
고통과 문제가 많은 세상을 향해 그런 모습으로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너무 좋아 초막 셋을 짓고 여기 있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물리치고 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밑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이 때도 앞에 서서 힘있는 모습으로 내려 오셨을 것입니다.
‘내가 재충전을 했으니 내려가서 일을 계속해야지! 전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요?
성서주석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눴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 내가 말씀을 힘써 선포했는데 말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시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십시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예수님, 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가지고 율법을 온전히 이루어 주십시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사명을 다시 확인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사명을 다시 확인했으니 더 풍성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야지’ 하시면서 앞에 서서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저는 좀 멀찍이 따라 가겠습니다. 예수님이 위험한 일을 만나면 저는 얼른 도망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고 따르겠습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바짝, 긴장해서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당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갈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멀찍이 따라 갔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님이 체포 당해 끌려가고 베드로가 그 뒤를 따라가는 이야기에는 모두 ‘멀찍이 따라갔다’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마27:58, 막14: 54 눅 22:54)
그것을 보면 정말 멀찍이, 마지못해, 주춤거리면서 따라갔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멀찍이 따라 간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선교회나 속회에서 자동차 여러 대를 가지고 어디를 갈 때 인도하는 사람이 ‘내가 앞장 설 테니 따라 오세요’ 합니다. 그럴 때는 그 차를 바짝 따라 가야합니다.
틈을 주어서 중간에 다른 차가 끼어 들면 놓치기 쉽습니다.
분당에 신학교 동창생이 있는데 이 사람이 얼마 전에 동창생들을 다 초대했습니다. 동창들이 오래간만에 그 사람 사무실에서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가 ‘내 차 따라와!’ 하고 앞장섰습니다. 처음에는 잘 따라 갔는데 밤이라서 앞차 확인하기도 쉽지 않고 중간에 다른 차들이 끼어 들고  그래서. 뿔뿔이 다 흩어졌습니다. 저도 앞의 차를 놓쳤는데 떠나기 전에 제가 ‘서 장로, 오늘 어디로 가려고 그래?’ 하니까 무슨 오리집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고. 그 오리집에 전화해서 위치를 확인하고 찾아가니까 그 친구 혼자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지금 어디 있느냐?’ 연락하고 안내하고, 찾아나가고 했는데 두어 명은 끝내 오지 못하고 ‘나 집으로 간다’ 했습니다. 모처럼의 모임이 좀 어색해졌습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들도록 틈을 주면  예수님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앞차 따라 가다가 놓치면 핸드폰으로 연락하거나 지도를 봅니다.
예수님을 놓쳤을 때 연락하는 핸드폰은 기도이고 지도는 성경입니다.
요즘은 지도문화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장거리 심방이나 문상을 갈 때 저는 위치를 말로 확인하려고 하는데 부목사님들은 얼른 지도를 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문화가 지도문화 이상으로 발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고통과 십자가와 죽음이지만 그 너머에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면, 아니 믿으면 우리는 당당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고난을 세 번 예고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세 말씀이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결론은 부활!’ 이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그  다음,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9장 31절,

  이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그 다음,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오늘 본문 가운데 34절,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 다음,

  그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십자가만 보고 부활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근시입니다.
육신의 근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 근시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영적 근시에서 벗어나 십자가 저 편에 있는 부활을 볼 때 우리는 당당하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앞에 서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예수님을 본받아 당당한 모습으로 따라 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셋째 질문,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앞서 가시고 그 뒤를 성도들과 우리들, 교회가 가고 그 다음에 다른 것들, 그리고 세상이 따라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행진 순서입니다.

믿음을 앞세워야 합니다. 다른 것들을 믿음 앞에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 있어야지 세상이 교회 앞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찬송가 가운데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 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 해 있다’ 이런 내용의 가사로 되어 있는 찬송이 있지요.
256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이 6·25 쉰네 돌인데 이 찬송가는 6·25 때 피난지 부산에서 사람들이 소망을 갖지 못하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세계가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가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이럴 때 교회가 ‘나를 따르시오!’ 하면서 앞에 서야합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좌표확인이라고 합니다.
비행기가 비행을 할 때 중간 중간에 반드시 좌표를 확인해야합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레이더를 보는 일을 했는데 레이더 기지에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전투기들에게 ‘지금 당신의 좌표는 어디이다’ 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1983년 9월 1일 알래스카 앵커라지 공항을 떠나 서울로 오던 KAL 007기가 소련 영공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에 맞아 269명이 승객이 희생 당했습니다.
그 비행기가 왜 항로를 벗어나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는지 그 이유는 파악되지 못했지만 좌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하기 전에 자동항법장치에 좌표를 입력하지 않았거나 잘못 입력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이 가장 유력합니다.
항해중인 배들도 좌표를 확인해야 합니다.

영적인 생활에서도 좌표 확인 작업이 꼭 필요한데 좌표를 확인할 때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①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는가?
② 믿음이 내가 가진 다른 것들 앞에 있는가?
③ 교회는 세상의 앞에 서서 가고 있는가?

여러분, 이 세 가지를 오늘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찬송가 389장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불렀습니다.
오늘은 찬송가 가사를 여럿 인용하게 되는 데요, 이 찬송에는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찬송은 사빈 바링고울드(Sabine Baring-Gould 1834~1924))라는 영국 목사님이 작사를 했습니다.
바링고울드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요크셔 주 호부리(Hobury)라는, 광부들이 많이 사는 가난한 마을에서 첫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월요일에는 어린이들이 흰옷을 입고 십자가와 군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세 번째 주일이지요,
이제 대림절(11월 28일)까지는 ‘성령강림절 후 몇 번째 주일’ 매 주일 이렇게 부르게 됩니다.
고울드 목사님이 부임한 곳에서는 성령강림절 후 첫 월요일에는 하얀 옷을 입는다고 해서
그 날을 ’화이트‘와 ’몬데이‘를 합해서 ‘휘트몬데이(Whitmonday)'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의 교회에 새로 부임한 바링고울드 목사님이 그 해의 휘트몬데이 행진의 앞에 서서 인도하게 되었는데 이 목사님은 행진하면서 부를 찬송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전 날 밤에 급하게 이 찬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해  호부리 마을 휘트몬데이 행진이 어떻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성도들은 이 찬송을 부르며, 십자가와 군기를 바라보면서 그 어느 해 보다도 힘있는 행진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원후 4세기초에 로마의 콘스탄틴이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자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힘겨운 싸움이었는데 하루는 햇볕 사이에서 십자가가 보이고 ‘이것으로 이겨라’하는 글을 전 장병이 보았다고 합니다.
콘스탄틴은 십자가를 군기로 하여  앞세우고 싸웠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체험 때문에 그는 황제가 된 다음에 기독교를 승인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싸움을 밀비안(Milvian) 다리의 전투라고 하는데 이것은 312년에 있었고 기독교를 승인하는 밀란 칙령은 그 다음 해인 313년에 내려졌습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이 명령 때문에 초대교회는 300여 년에 걸친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앞에 서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갈 때 우리는 세상의 앞에 서서 가게 됩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앞에 서서 가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앞에 서서 세상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앞에 서서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위해 힘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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