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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별하여 지켜야 할 일(삼상 6:19- 삼상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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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인터넷 뉴스에서 본 한 가지 소식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영생교 교주였던 조희성씨가 신도를 살인 암매장한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 심장마비로 안양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어제 새벽 5시경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육신도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다며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던 그가 안타깝게도 보통 사람들이 다 사는 평균 80도 못채우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전도관을 이끌던 박태선씨가 자신을 감람나무 성령이라고 주장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 재림하실 산이라며 범박동 뒷산을 시온산이라며 정착을 시킨 것이 60년대 후반입니다. 재벌기업 못지않은 시온산업을 통해 세력의 확장을 꿈꾸던 그는 종말에는 자신을 천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다가 얼마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파생된 영생교의 교주 조희성씨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하게도 부천에서 유명한 적그리스도 집단들이 자주 발생하는 일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만, 가까이에서 말세의 징조를 보며 미혹케 하는 영들의 말로를 보는 일은 우리를 각성케 하시는 은혜임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극심한 영적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해 있는 21세기를 사는 성도들에게 다시한번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의 모습들을 점검하며 되돌아 보는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잃어버렸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영토로 돌아오는 감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2번이나 전쟁에서 실패하며 법궤까지 빼앗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조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 법궤를 빼앗긴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자문했던 그들은 이제 법궤가 돌아옴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고통은 해소가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법궤를 들여다 보다가 70명의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 중에는 70명이라는 숫자 앞에 괄호를 열고 5만이라는 숫자가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필사자의 실수라고 성서학자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벳세메스 지역의 인구를 다 포함해도 그 숫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70인역이나 당시 최고의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도 70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근본적인 부분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를 통해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부분까지 알려주시면서 이를 위하여 공교한 기술자들을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은 다름아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그 일의 지도자로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선택하였고 그들은 유감없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한줄로 믿습니다.

12지파가 세 지파씩 둘러싼 성막을 들어서면 뜰에 번제단이 있어서 번제를 통하여 죄악된 삶을 용서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어서 수족을 씻고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 상이 있고 왼편에 등대가 놓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든 분향단이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을 상징했습니다.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라고 하여 그곳에 법궤 곧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는 곳에는 제사장 중에서도 그 해의 책임자인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혹 그도 육신을 가졌기에 범죄하였다면 죽음을 면치못했습니다. 발목에 단 방울 소리가 나면 살아있다고 여겼고, 방울소리가 멈추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지성소의 권위는 이렇게 두렵고 떨린 곳이었습니다.

민수기 4장 20절에 보면, 지성소의 법궤는 잠시라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는 경고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만질수도, 들여다보아서도 안될 지극히 거룩한 법궤였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린채 그저 법궤가 돌아왔다고 하는 반가움으로 들여다보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 결과 벳세메스 사람 70명이 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그들을 치사 .....죽임을 당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표현입니다. 어쩌다가 재수없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다듬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훗날 다윗 왕은 이 곳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산지에 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그리고 남북을 통일한 이후 예루살렘을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은 다윗이 제일 먼저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바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왕은 이 법궤를 모시고 오는 일을 위해서 무려 3만명이나 되는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법궤를 옮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에 무슨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법궤를 운반하는 일에 필요한 사람과 지원 인력들을 위한 식사준비나 숙소 준비 등 모든 과정에 뒷받침을 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월드컵을 치루는데 각국의 선수단만 챙기면 되지 않느냐 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대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하여는 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다윗은 3만명의 봉사자들을 선발하여 주었고, 법궤를 옮기는 일에 책임을 맡은 각 부야의 책임자들은 나름대로 기도하며 열심히 연구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벧세메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결론 짓기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는 새 수레를 만들어 그것으로 법궤를 모셔오자고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새 수레의 재목은 나무 중에서도 최고인 백향목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목수도 이스라엘 중에 최고의 목수를 불러다가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을 것입니다. 다시말씀하지만 그들은 정성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출발부터 빗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부산을 가야 하는데 목포행 열차를 탄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대전까지는 가는 방향이 같아서 잘못탔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서울역에서 잘 못 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무리 정성과 헌신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출발이 잘못되면 헛수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궤를 실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뻤겠습니까?

법궤가 운반 중 나곤의 타작마당 (역대상 13:9에는 기돈의 타작마당)을 지날 때 소들이 놀라 뛰었는데, 웃사라는 사람이 흔들리는 법궤를 고정시키려 붙잡다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법궤의 흔들림을 막으려고 손을 댄 것인데 왜 죽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학생 시절 저에게 끈질기게 따지며 질문했던 부분이 이것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말입니다. 왜 웃사가 죽어야 됩니까? 책임을 따지자면 출발을 잘못한 다윗에게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지도자는 백성들의 영적인 모든 부분에 대하여 책임을 지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은혜로운 일이지만 준비하면서 확인을 했어야 했습니다. 교회일을 하다보면 가끔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큰 행사를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 책임자를 세우고 여러 일꾼들을 각 부서에 배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분이면 잘 하겠지" 하고 맡깁니다. 간혹 중간 중간에 불러서 잘 진행이 되고 있느냐고 체크하면 두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이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보여주어서 힘이나고 용기가 생긴다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한 번 맡기었으면 알아서 놔둘 일이지 믿지못하고 중간에 챙기고 간섭한다고 언짢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맡겨놓고 확인을 안하면 꼭 일이 터집니다. 중요한 장면, 결정적인 상황에서 준비가 안 되어 있거나 빠진 것들이 드러나면서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순서지 어떻게 됐어요?" "아이고 그거 인쇄 다 했놓고서 안가지고 왔네요...." 그래서 그런 일을 겪고나면 자책을 합니다. ‘싫은 소리 들어도 한번 체크할 걸.......’

다윗의 심중에는 법궤를 어깨에 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일어나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싣고 오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고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 달을 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명은 언제나 어깨에 메는 심정으로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깨에 메는 일은 수레로 끌고 가는 것보다 힘든 일입니다. 지지난 주에 필리핀선교회가 식당봉사를 하엿는데 지난 주에는 베델 14기가 차례였습니다. 우연하게도 이명자권사님은 필리핀선교회장릴 뿐 아니라 베델 14기 반장이기도 하여서 두 주를 연거푸 봉사를 했답니다.

사실 필리핀 다녀오면서 몸 감기가 들어 무척 힘들어했는데 선교지에서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또 장을 보며 공동식사 준비를 진두지휘 하셨습니다. 수고하는 분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좀 쉬어야 할 분들인데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저렇게 희생하는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알고보면 여러분들이 드시는 공동식사 밥 한끼에도 보이지 않는 분들의 눈물겨운 사랑과 수고가 있음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법궤는 어깨로 메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신 사명은 어깨로 메는 희생과 정성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의 일은 편리 위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메세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창조주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인간 위주의 편리를 추구하는 행사, 특정 인간의 자랑이 되는 행사가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다윗은 또 생각합니다. 어깨에 메는 일을 위해 구별된 레위인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구별된 레위인 중에서도 성결한 사람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나오는 성도들 중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가릴 사람이 아닌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들을 선별하여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깨끗한가요? 교회 나온다고 다 거룩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교회를 가끔 목욕탕이라고 비유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목욕탕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와 겉옷을 벗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때 다 밀고 사우나 들어갔다 나와서 상쾌한 기분으로 옷을 입으려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목욕탕에 막 들어오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의 차이는 대담히 큰 것입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목욕탕이라고 하는 건물 안에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안에는 정말 주님오실 때 영과 혼과 육이 흠 없이 보존되어 부끄러움이 없을 "참 그리스도인"이 계신가 하면, 세상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으나 이웃의 권유나 심령의 이끌림으로 예수 한번 믿어보겠다며 이 자리에 함께 한 이들도 있습니다. 남의 지갑이나 돈을 보고 욕심이 생겨 기도 시간에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때면 교회안에도 도둑놈이 있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보면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교회는 엘리트를 받아들이는 곳이 아니예요. 교회는 사실상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곳인줄 믿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져서 마침내 주님에게까지 이르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결단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무릅쓰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자신과 선별된 레위인,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에게 세마포 옷을 준비해 입혔습니다. 곧 예복을 입혔다는 말입니다. 노래하는 자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가대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가대원들이 입는 옷은 그런 의미에서 운동 선수들이 입는 유니폼과는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와 성가대원들이 입는 예복이라면 얼마나 거룩한 특권입니까?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법궤를 운반하는 레위인, 그리고 노래하는 자에게 세마포를 입힌 뒤, 법궤를 어깨에 메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웃사가 왜 죽어야 하느냐고 , 벧세메스 사람들이 왜 죽어야 했느냐고 원망하기 이전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로 구했는지를 우리 모두 자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주님의 뜻 보다는 내 생각, 내 방법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유형은 아니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주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주님에 마음에 맞는 방법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 나갈 때 언제나 주님께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언제나 구별된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다고 만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임을 깨닫게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땀 흘려 충성하되 오직 주님의 뜻에 맞추어 일하는 일군되게 하셔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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