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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보다 나중에(두아디라교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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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주환 목사 (구로중앙교회)

계속이어지는 일곱교회 시리즈의 말씀이다. 오늘은 네 번째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두아디라 지역은 상업이 활발한 도시이었다. 빌립보에서 바울을 도왔던 루디아의 고향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루디아를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주색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아마도 자주색으로 염색한 옷을 좋아했는가 보다. 두아디라의 대표적인 상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상업이 활발한 도시 두아디라를 향하여 주님이 말씀하신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다”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 밖에 볼 수 없다. 사람의 중심을 알려면 한참 지나봐야 조금 알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을 찾으려고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에 간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여기에 있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결국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 」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이다. 그 그림은 그가 43세 때 밀라노의 어느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래의 그림에는 예수님이 오른 손에 컵을 들고 계셨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그림에는 컵이 나타나 있지 않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작품이 완성될 무렵 다빈치의 한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 주었는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이 든 컵은 꼭 진짜 같은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지만 다빈치는 자신의 그림에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진짜 같아 보이는 컵을 지우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모양으로 그림을 수정했다고 한다.

다빈치는 철저히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 불꽃같은 눈으로 주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바라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나의 생각을 아실까? 하나님이 나의 계획을 아실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사야가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를,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는 도다.” 히브리서의 말씀에도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 앞에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난다는 말씀이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이렇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 우리를 향한 기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욱 좋은 모습을 기대하고 계신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칭찬하시기를,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졌다는 말씀이다.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책망하시기를 너희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이 더욱 자라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풍성하였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욱 좋아졌다는 말씀이다.

몇 년 전에 주전자 속의 개구리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주전자 속에 개구리가 헤엄을 치면서 놀고 있다. 이런 개구리를 뜨거운 물 속에 갑자기 집어 넣으면 개구리는 뛰쳐 나오지만, 개구리가 들어 있는 주전자에 서서히 열을 가하면 자기가 점점 죽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죽어 버린다. 갑자기 뜨거운 물에 빠지는 것 보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마치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점점 쇠퇴되어 가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처음보다 나중이 점점 않 좋은 쪽으로 변화되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처음에 가장 신뢰를 받았던 사람은 가룟유다이다. 그러기에 그는 회계를 볼 정도로 처음에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여 결국 예수님을 은 삼 십냥에 팔아 넘겼다. 바울과 함께 전도활동을 하던 데마라는 사람이 있다. 이는 바울에게 신뢰받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세상을 향하여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던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 변화되었다. 점점 좋은 쪽으로 변화된 바울이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세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숨어서 살 수 밖에 없는 천대받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이 변화되어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 점점 좋은 쪽으로 변화된 삭개오를 볼 수 있다.

이같이 예수님을 만나면 처음보다 더욱 좋은 쪽으로 변화된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룬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이다. 혼인잔치가 열렸는데 포도주가 모두 떨어졌다. 주인은 당황한다. 손님들은 아우성을 친다. 예수님께서 하인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넣게 하고 퍼서 갖다 주라고 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처음 보도주 보다 훨씬 더 맛이 좋았다. 손님들이 이상하게 여긴다. 대개 처음에는 좋은 것은 내고 나중에는 질이 낮은 것을 내는데 어찌하여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내느냐?

이것이 바로 예수의 기적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대이기도 하며, 우리 각 사람이 감당해야할 책임이기도 하다. 처음 보다 나중이 더 나은 삶을 주님은 기대하고 계신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 보다 많도다. 우리 교회도 이러한 칭찬을 받기 원한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처음보다 나아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를 위해 충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그 뜨거운 마음이 식어진다. 점점 열정이 식어진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 칭찬하셨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책망할 내용이 있었다.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당시 두아디라 도시는 상업도시이었기에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 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계와 같은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우상 신 앞에 제사를 지내며 그 신 앞에서 그것도 신전에서 음란한 일을 함께 저질렀다. 이러한 조직에 들어오지 않으면 왕따를 당해서 견디기가 어려운 정도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책망하신다.

이같은 일은 지금도 계속된다. 사업을 하려하다 보면 영업을 하려하다가 보면 이러한 문제에 부딪힐 때가 올 것이다.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자니 사회에서 도태당하고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신앙인인 것을 아예 덮어두자니 그래도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그래서 차라리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부인만 교회에 보내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사업을 위해서, 영업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일이 반복된다면 한 동안은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러한 행동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는 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점점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않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란 가운데에 던지리라.” 먹고 살겠다고 내가 성공해 보겠다고 내가 높은 지위를 차지해 보겠다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하게 되면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결국 침상에 던지겠다고 말씀한다. 죄를 짓던 침상이 곧 고통의 병상이 될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유혹이 많다. 영적인 시험이 많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다른 것을 잡지 말고 주의 십자가를 굳게 잡으라. 이 세상에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그럴 듯한 강연으로 우리의 영적인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성경을 굳게 잡으라. 말씀을 굳게 잡으라.

이렇게 말씀을 굳게 잡아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떤 상급을 주시는가? 본문의 말씀을 보라.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 처음보다 나중에 더욱 충성하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어느 왕이 종들에게 한 므나씩 나눠주고 떠났다.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한 종은 열므나를 남겼다. 이 종을 향하여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리라.”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충성된 종을 향하여 열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나 한 므나를 받아서 그대로 땅 속에 감추어 두었던 종은 갖고 있는 것도 빼앗겼다. 주인이 말하기를,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말씀을 붙잡고 처음보다 나은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이 분명히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의 믿음, 우리의 충성심,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우리의 경건생활,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 이러한 모습들이 어제보다 오늘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 오늘보다 내일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에게 이러한 열심을 내도록 내버려 두지를 않는다. 말씀을 굳게 붙잡고, 십자가 굳게 붙잡아 주님께 상급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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