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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말이 진리인가? (요 7: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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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종수 목사 (늘새롬교회)

에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신자의 복음 전파나 설교의 말이 참 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에서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아버지가 주신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하는 말은 또 어떻게 예수의 참 진리로 증거됩니까?

1.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 중심일 때 진리입니다

본질적으로 진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때문에 진리를 따른다는 사람은 예수를 따른다는 말이고,성경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살아 계신 예수를 동행한다는 말입니다. 즉 죽은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머리에 담고 산다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영으로 동행하는 것이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말에,천주교처럼 마리아 말이나 교황의 칙령이나 어떤 신비주의가 말하는 환상이나 다른 복음(갈1:8)을 말하는 자들은 참된 진리를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리가 있는 교회,참으로 진리가 살아 움직이려면 예수님이 그곳에 가장 두드러지게 증거되어야 합니다.그 설교, 그 예배,그 선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합니다.

무슨 가정 행복론이니 하는 것은 진리의 한편이긴 해도 그것만이 강조되면 철학입니다. 세상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수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예수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처세, 그것이 선량한 방법이라 해도 그것은 세상초등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같은 격입니다.철학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진리 면에서  볼 때 허무요, 속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학자였고 존경받는 선생으로 인정받는 자였지만  그 학문을 통해 구원이 없음을 알고 예수 안에서 달라진 상식으로 여생을 오직 진리 안에서 살았습니다.

고전 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우리가 예배를 드렸고 설교 말씀이라고 들었을 때 우리 가슴 속에  예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것은 아직 진리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감동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주간 내내 목사가 기억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기억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경 읽을 때, 설교 들을 때 예수님이 생각나고 두드러지게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아는 순간입니다.


2. 진리는 행하므로써 체험해야 제대로 압니다

본문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들어서 인정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체험이 없이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 그 절대적  가치도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과 동등하신 존귀한 분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만이  구원의 주인인가 하는 부분은 체험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있지만 서로 다른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만 구주가 아니라고도 합니다.성경의 진리는 공부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연구한다고 예수를 구주로, 생명의 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3년 간 교육하셨지만 주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별로 갈등도 없이 금방 본래 직업으로 돌아간 것을 봅니다. 어찌 그렇게 증거 없이 금방 돌아갔습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즉시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감하고 실천하게된 것은 사도행전에서  보게됩니다. 그들이 3년 간 교육 받을 시에 그렇게 열심히 기도 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께서 동무삼아 제자들과 산기도를 가셨으나,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여기,한 시 동안도 그렇게 같이 있을 수 없더냐 하는 말씀을 보면 평소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잡혔을 때, 주님의 무죄와 주님의 권능을 증거해야 하는데, 그들이 목숨 걸고 그렇게 하리라 했지만 그렇게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유언하신 대로 기도함으로 성령을 기다렸더니 그들은 그 결과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 뜨겁게 열심을 다해  주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행 1:14에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한대로 그들은 전에 없는 기도를 하였고 결국 그들은  행2:에서 성령의 큰 감동을 받고야 예수의 말씀의 증인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동행하고 진리의 사람이 되려면  기도와 죽음을 건 증거를 해야 합니다. 핍박과 증거, 전도 생활, 기도 생활이 그들의 새로운 변화였습니다. 오히려 3년간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말씀은 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별로 말씀이 계속 내려지지 않습니다. 가끔 두어 마디 말씀이 있었습니다.주님은 성령이 임하면 주신 말씀대로 기억나고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 하셨고  그들이 그렇게 성령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목숨 걸고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이  그들을 수년간  가르치실 때에는 그만큼 용기도  확신도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까지는 단순히  공부를 하고 책을 한 권 떼고 나면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우리가 귀로 들었다는 것과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과 체험을  통하여 마음으로 말씀의  행위를 보았다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눈으로 보면서 하나님 말씀을 확인하는 것과  체험 없이 많은 말을 듣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거에 촌에서 대부분 서울을 못 가보았을 때, 서울 다녀온 이가 서울 이야기를 하면 서울 못가본 사람이 믿기질 않아서 오히려 서울 가서 보고 온 사람을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서울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기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을 보고 체험을 한 사람이 사실  서울에서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이지요.

주님을 믿으면서 간증거리가 없으면 신앙생할에 문제가 많습니다.  말씀대로 기도하고 살면 체험하게 됩니다. 2-30년 믿어도 간증거리 없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체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확고부동한 말씀의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깨닫고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깨닫지도 못하는 방언을 주절대는 것보다, 고전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소리의 방언이 무슨 큰 은혜인 줄 압니다.자랑하지 말고 차라리 깨달은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들은대로 말한다고 진리를 다 책임지는 소리가 아닙니다.

가령 아무리 좋은 설교의 원고를  내가 해도 그  원고의 본인같이 같은 은혜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확신되어진 바만 역사하십니다. 일반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구주라는 것을 믿지도 않으면 말을 해도 그 말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도 가자면 전도 못 나가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확실이 예수가  중심이면 증거하게 되는데, 분명히 믿게 되면 전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요4:)사마리아 여인처럼 깨달으면 증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히 체험되면 말씀 자체가 우리를 가만 두지 않고 증거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인다는 말이 그러한 뜻에서입니다.

홍수를 만나 죽었던 사람들도 노아가 전할 때 못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못 깨달아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지식적인 표현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면 양심을 열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양심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못깨닫는다는 것은 양심이 어둡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3년 간 주와 함께 했으나 성령 충만 후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체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들어야 합니다. 우선 들어놔야 때가 되면 작용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뇌리에, 가슴에 담고 있으면 때가 되면 체험이 되어지고 제대로 역사하게 됩니다.

다니엘과 사도요한은 주하나님을 뵈올 때 엎어졌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양심이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제대로 아는 순간입니다. 신구약 말씀과 책을 통해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 것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알아도 환경적으로 극한  상황이 오면 아무 생각이 없어집니다. 말씀의 체험이 없어서 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몸으로 말로 행동으로 증거할 때  핍박과 고난이 있어도 그 행위를 통하여 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볼 때 말씀을 증거하고 핍박을 또한 받는 중에 증거할 때, 주의 말씀을 다시 또 체험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참 진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본문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다르게 의역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자기의 영광을 돌리고 그렇게 되면 불의를 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불의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적으로 무슨 일을 나타낼 때는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게 진리입니다. 목사가 자기 영광을 위할 때는 이미 그 목사와 그 교회는 성령이 떠난 교회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살아 있는 진리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진리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요 16:13-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우리가 성령을 받고 우리 교회가 상대적으로 다른 교회보다 이름났다하는 것들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이 증거되야 합니다. 기도도 대개 개인 이기를 위해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요14:13에서 영광을 위한 기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그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 그 끝에 자신이 기뻐할 마음이 들면 응답을 받아도 그것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는 믿음과 이해가 있어야 바른 기도입니다.

어떤 목사가 신령한 목사인가 하는 것은 그 말씀의 긍극적인 목표가  사람 자신에게 영광과 존귀와 부와 명예를 돌리려고 애를 태우면 영락없이 거짓 선지자이고,  오직 주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을 보이면 그 목사가 참 선지자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자기 사욕을 위하여 간구하는 자들은 생활의 수단으로 예수를 취급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참된 진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진리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는 없는 것보다 보기는 좋습니다.  그런데, 암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유럽의 교회는 많이 쇠퇴했으나 한국에 교회가 많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그러나 이 세대를 볼 때 우리가 진리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많아도 참된 진리가 없어서  이런 우울한 사회로 삽니다.  계속 아픈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된 이 나라의 사정은 교회가 참된 진리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참다운 교회가 못 되었기에 이 나라 꼴이 이렇게 된 것이라 여깁니다.예수가, 참 진리가 있으면 이런 사회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부딛히는 일은 딱 한가지입니다. 진리가 세상적인 것과 만날 때 핍박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잠시입니다. 핍박은 곧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진리대로 산다면 은혜가 내려야 합니다. 진실로 진리대로 산다면 나와 이웃이 평강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목숨걸고 증거했습니다.그들 중에는 자기 사욕을 위해 살았던 자들이 없습니다. 오늘날 수십억을 가진 목회자도 있습니다. 잘 못된 것입니다.  사회가 우리더러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지 않습니다. 잘못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별로 교회가 없었어도 우리더러 하나님이 함께 하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설교도 많이 듣고 교회 종류도 많으나 참 진리의 증인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나와 여러분, 우리들의 말이 곧 진리가 되도록 체험을 위해 진리를 따라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생활에 예수님이 드높여지고, 체험을 통하여 말씀의 증인으로 살면서 하나님께만 오직 주께만 영광을 돌리는 바른 진리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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