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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는 사람의 조건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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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인 목사 (목양교회)

기독교는 은혜에 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은혜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치고 은혜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고 싶다고 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낙비가 쏟아져도 그릇을 준비해야 빗물을 받을 수 있듯이 은혜도 마찬가지로 받기에 합당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을 통해서 ‘은혜 받는 사람의 조건’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간구했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사회상에 비추어볼 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로마 세계에서 종은 곧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는 법적으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으며, 그 생사가 주인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농업의 도구를 세 종류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소리 없는 도구로서 수레나 낫이나 호미와 같은 것이 여기 해당합니다. 둘째는 언어가 없는 도구인데 이는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을 말합니다. 셋째는 언어가 있는 도구인데 이는 노예를 의미했습니다. 쟁기나 쇠스랑이나 가래나 괭이 같은 농기구가 생명이 없는 도구라면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노예가 노쇠하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면 주인에게 짐이 되므로 내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노예를 도구 취급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의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병든 하인을 긍휼히 여기고 동정심을 나타냈습니다. 생각건대 그는 예수님을 만나러오기 전에 자기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용한 의원들을 찾아가서 치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약이 효험이 없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백부장이 병든 종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행동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려움을 만난 사람을 동정하고 긍휼히 여길 때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사랑의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긍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교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긍휼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교만 때문에 분쟁이 생깁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덮어줍니다. 비유컨대, 긍휼은 아픈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으셨다면 지금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하시거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비록 교인수가 많지 않더라도 교회에서 믿음의 형제들 간에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원하십니까? 가정에서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불화하던 가정이 사랑의 보금자리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을 통해서 긍휼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긍휼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올 때 은혜를 받습니다.

이 백부장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참전 경험이 풍부하고, 부하를 다스릴 통솔력이 있고,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중에서 임명했습니다. 따라서 백부장은 로마군대를 지탱하는 기간 장교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주둔군의 장교입니다.

얼마든지 자기를 과시하고 식민지 백성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일본군 장교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깔보기는커녕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을 존중해서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식민지의 가난한 목수였던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 백부장은 나이로 보아도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예수님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그가 더 높았습니다. 그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고, 재산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 고개를 숙이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호소했습니다.

만일 이 백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면 중풍병에 걸린 그의 하인이 고침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겸손히 예수님 앞에 나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는 사람은 이 백부장처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인생들을 향하여 은혜 받기 위해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

누구든지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면 풍성한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데 무슨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에 돈 없는 자에게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잔치에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다 초청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까다로운 구원의 조건을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유대인만 구원하신다면 이방인인 우리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또는 지혜 있는 자들이나 부자들만 구원하신다면 지혜롭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은 애초부터 구원을 기대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조건을 하나도 내세우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중풍병에 걸린 자기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시고 곧바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그 당시의 종교상황에서 볼 때는 파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은 부정한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편견을 무시하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조건이 구원의 자격이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오해에 불과했습니다.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구원 받는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믿음을 고백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 역시 은혜 받으려면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은혜 받으려면 일단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 가정 예배로 모이든, 구역 예배로 모이든, 또는 교회에서 모이든,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은혜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은혜로웠던 때를 들라면, 오순절 직후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말할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사도들을 비롯해서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도행전 2장 46절에 보니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마는, 그래서는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대부분 교회에 자주 나오는 성도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에 나와서 오락하는 것 아니고, 남을 비방하는 이야기 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로써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자연히 믿음이 자라고 은혜로운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 간구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직접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다만 그 하인의 딱한 형편을 말씀드렸지만, 그의 말 속에는 자기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원하는 그의 간절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니,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그 자체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 주시면 좋고 주지 않으시면 할 수 없지, 그래서는 은혜 받지 못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보기에 딱했던지 예수님께 와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거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드디어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모욕적인 대접입니까? 그렇지만 이 여자는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대답하기를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이 말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셨고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의 요청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대방이 이방 여자였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가나안 여자의 진심을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가나안 여자의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감동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간절함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건성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면서 왜 구하기 전에 미리미리 주시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그 편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행하시든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행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간절히 구하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일이 척척 해결된다면 미련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알지 못하고 우리 자신이 잘해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할 것입니다. 그 결과, 자만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믿음에서 떠나 패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구해서 응답을 받게 되면 받은바 은혜가 귀한 줄을 알게 되고, 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실감하게 되어 더욱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 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예수님을 이방인인 자기의 집에 감히 모실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사람 이상의 신적 존재로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고 한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면 부하가 순종하듯이, 예수님께서 명하시면 자기 하인을 사로잡고 있는 중풍병이 떠나갈 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부하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그의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는 것은 그에게 그만한 권위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권위는 로마가 그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백부장의 말에도 그만한 권위가 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의 명령에 중풍병이 순종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이 백부장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어떻게 이방인의 입에서 이처럼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사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죄인시하는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만나보지 못한 큰 믿음의 소유자라는 주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은 혈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 하는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무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그의 믿음으로 인해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차별 없이 주어질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이미 백부장을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구원에서 제외되고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이 백부장과 같이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모든 부정적인 말, 의심하는 말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믿음의 말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입으로 긍정적인 말을 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주님의 칭찬 받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하신 대로,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힘써야 합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이라도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몰라보게 믿음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가버나움 거리에 서 계신 예수님의 한 말씀에 백부장의 집안에 누워 있던 하인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던 주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한 능력과 권세로써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무기력한 것은 믿음이 부족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믿고 나아감으로 주님의 능력을 삶 속에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기독교인들은 많은데 대부분이 신앙생활에 열정이 부족합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감격이 없고 습관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불신 이웃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해야 할 사람이 저들의 세속적인 삶을 동경하고 모방하는 것을 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과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신 주님의 말씀이 실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문밖에 와 계신 때입니다. 그만큼 주의 강림이 임박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영광 중에 강림하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은혜가 충만할 때 비로소 행복한 신앙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아 행하심으로 주님의 칭찬과 함께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는 위대한 응답을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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