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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救援)의 노래 (시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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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이덕재 목사(빛과소금의교회)

<표준새번역>

16:1 하나님, 나를 지켜주십시오. 내가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16:2 나더러 하나님을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하겠습니다.
16:3 땅에 사는 성도들을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하겠습니다.
16:4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 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피로 빚은 제삿술을 그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으며, 나의 입에 그 신들의 이름도 올리지 않겠다.
16:5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나의 운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16:6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땅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16:7 주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그를 찬양한다.
16:8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곁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16:9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 기쁨으로 가득차고, 이 몸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 까닭은
16:10 주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6:11 주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시편 16편 하기 전에 15편 먼저 해야지요?


<암송 점검 - >

시16편을 다윗의 믹담이라고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 믹담이라는 말은 시56-60편까지 도합 여섯 편의 시편에 부제로 붙어 있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밝혀진 바 없고 네 가지 정도의 뜻으로 추측됩니다.

황금시(golden poem), 보석같은 시(jewel like), 감추어진(hidden) 즉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시, 속죄의 시(atonement poem) 이런 뜻으로 추측됩니다.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든지간에, 믹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시들입니다.

오늘 시16편도 내용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주님을 모시고 따르는 선택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가를 고백하고,/ 그 결과로 그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기업,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감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삶의 기쁨이 얼마나 차고 넘치는 기쁨인지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으로 선포하는, 구원의 노래입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기를 “내게 너무 황홀한 구원”이라고 표현하였지요? 여러분 옥목사님의 고백을 들으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아무래도 옥목사님이 책 제목을 과장해서 지은 것같아” 이런 느낌이 드십니까? “어떻게 황홀하다고까지 말하냐, 황홀하다는 것은 뿅 간다는 말인데... 이상한 사람야” 이런 느낌이 드십니까 아니면 “맞아, 나도 그래, 나에게도 딱 맞는 말야~” 이렇습니까?

많은 학자들은 다윗이 이 시편을 생명의 위협을 받는 때에 노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는 모습과 <10절>에서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기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 때에 다윗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때라고 합니다.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국민들이 지난 주에 김선일씨가 무참하게 죽은 사실 때문에 비통하고 분개하였지요?

더욱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장이라는 사람, 외교부, AP통신... 이들의 모습에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딴 이야기인데, 직무 태만이 이렇게 비참하고도 불행한 결과를 낳습니다.

안타깝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지요...

중동 선교를 비전으로 삼고 있었지만, 생명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올 때, 김선일씨, 너무도 불쌍하게 절규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때에, 대다수의 사람은 오금이 저려오고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런데, 생명의 위협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오히려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 이상한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생명의 위협 속에서 마음이 오그라들지 않고, 두려움에 사로 잡히지 않고 오히려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다윗의 신앙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오늘 그의 구원의 노래 속에서 그의 마음에 담긴 신앙의 비밀을 캐보고자 합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부르는 다윗의 구원의 노래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믿음의 정체,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믿음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다윗의 믿음의 비밀, 손가락 다섯 개이듯이,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마음(Lordship)입니다<1,2절>.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하듯이 위급한 때, 어려운 때 주님을 향하는 마음이고 “주는 나의 주시오니”하나님이 주인이고 나는 그의 종인 관계가 분명하여 신앙고백이 명확한 것이고“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하였듯이 나의 최고의 가치가 하나님께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마다 이런 고백 드립니다. 코리 텐 붐 여사가 “주는 나의 피난처”라고 하였고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고 오스왈드 쳄버스 목사님이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마음을 책으로 쓴다면 뭐라고 제목을 지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피난처는 어디입니까? 마음이 슬프고 힘들고 분노하고 두려울 때 당신은 어디를, 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술집이 피난처인 사람, 오락실이 피난처인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여러분의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서는 무엇이 최고봉입니까? 돈은 나의 최고봉, 내 성질은 나의 최고봉, 나는 나의 최고봉 이런 허무하고 웃기는 삶은 살지 마십시오. 

인생은 주인을 잘 만났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주군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선인이 되느냐 악인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관우, 장비, 제갈량 이런 사람이 실력이 제일 뛰어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포, 동탁 등 무술실력이 훨씬 뛰어난 사람이 있었고 봉추, 조조 이런 사람은 지혜가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은 관우, 장비, 제갈량을 주인공으로 인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비, 현덕이라는 주군을 잘 만났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만큼 사랑의 주인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시겠다고 초청하시니 사실 얼마나 황공한 은혜입니까?

그리스도 신앙인의 능력의 체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나의 주인, 절대자, 최고봉, 최고의 사랑으로 모실 때부터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당신의 절대적 주군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다윗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믿음의 비밀을, 내공(?)이 쌓여감을 경험할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즐기는 마음입니다(Enjoy Christian Fellowship) <3절>.

성경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도’라 부릅니다. 문자적 뜻으로는 거룩함을 좇는 무리입니다. 거룩함을 좇는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 도피적인 사람, 재미없는 사람, 손에 흙묻히기 싫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성도는 고상한 척하는 도덕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는 사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원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자신의 삶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가 되려면, 한번씩 뒤집어져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마음과 정서와 가치관의 혁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어떻게 뒤집어집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처음에 교회에 찾아올 때는 어느 때에 찾아옵니까? 인생이 괴로워서, 인생이 고달파서, 내 힘으로 안되니 예수님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이렇게 자기 필요, 자기 유익을 얻고자 찾아옵니다.

이렇게 자기 유익, 자기 필요 땜에 교회에 찾아왔는데, 복음을 듣고 깨달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하여서 한번씩 뒤집어집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자기중심성, 이기심에 달려 있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하실만큼 사랑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인생의 행복은 행복을 추구해서 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거룩함을 추구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오히려 인생은 살 맛나는 행복이 누려지는구나/ 깨우치게 되고 그래서 인생 역전을 결단합니다. 아도(我徒)에서 성도(聖徒)로 뒤집어집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난다, 다시 태어난다, 중생이라고 지칭합니다. 이렇게 아도에서 성도로 한번 뒤집어져야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정말 존귀한 존재,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인 정말 귀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한번 뒤집어진 사람이 성도간에 교제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압니다.  어거지로 교회 사람들만 만나야지가 아니라, 영혼이 한번 뒤집어져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소원, 비전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같은 성도를 만났을 때, 마치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동지를 만났을 때, 기뻐하듯이 즐거워합니다.

아도(我徒)에서 성도(聖徒)로 인생역전을 경험한 사람들, 이들은 교제, 성도간의 fellowship이 얼마나 신나는 것인지, 힘있는 것인지 압니다. 이 교제의 기쁨이 세상을 이기게 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며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이렇게 한번 뒤집어진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아도입니까, 성도입니까? 빨리 한번 뒤집어지십시오.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내 인생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진정한 인생역전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성도간의 교제, 성도간의 fellowship이 얼마나 신나는 것인지, 힘있는 것인지 누려갈 것입니다. 이 교제의 기쁨이 세상을 이기게 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며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셋째로, 죄를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마음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Seperation from Sin)<4절>.

<4절>의 고백, 비장하지요? “나는 더 이상 어리석음에 내 인생을 방탕하지 않겠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마음, 그 괴로움을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데 뭐하러 내가 다른 신에 눈을 돌리겠는가, 추호라도 용납하지 않으리라.” 이런 고백입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라고 표현하였는데, 소위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욕망이 만들어낸 신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의 충족을 바라보게 하는 마음이 우상숭배입니다.

시주 많이 해봐, 떼돈 벌게 해줄게 이런 식이지요?

<4절>은 이제는 더 이상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겠노라는 고백입니다. 그의 마음에서 겨우 죄를 피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는 수준의 마음입니다.

죄를 겨우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다 죄에 넘어집니다. 죄를 적극적으로 미워하고 배척할 때 죄의 유혹에서 벗어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강조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당신은 무엇에 당신의 열정을 쏟아 부으시겠습니까? 그 열정을 세상을 사랑하여 죄짓는데 쏟아 붓는 자는 뼈가 썩어져가는 괴로움이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요일2:17>처럼, 나의 열정, 젊음, 정열의 불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드리는 자는 믿음의 비밀을, 죽음의 위협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감사하는 마음이 능력의 비밀입니다(Enjoy Blessings of God)<5-6절>.

하나님께서 사람마다에게 주어진 산업, 구역, 기업... 유산, 달란트, 조건, 환경은 다 다릅니다. 지능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재능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외모도 저처럼 잘 생긴 사람도 있고, 계속 웃으면서 쳐다볼려면 기도하면서 쳐다봐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왜 불평하고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까? 비교하니까 불평과 원망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르게 만드시고 다른 여건을 허락하시고 다른 모양으로 빚으신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교하고 똑같지 않다고 불평하고 시험에 들어서 어떤 사람은 시험에 쩔어서 삽니다.

여러분,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불평하는 마음에 평안은 없습니다. 불만이 가득찬 마음에 생명력은 역사하지 못합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은 그 마음에 사망의 독을 뿌리고 다닙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허락하신 여건, 모양은 불평한다고 쉽게 안변합니다. 아무리 불평하고 아니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시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가 한 자나 더 하겠느냐?” 제가 40일 금식 기도한다고 160인 제 키가 188이 됩니까?

아이들이 추석 때 송편을 만듭니다. 처음에는 다들 이쁘게 만들려고 하지요? 그러다 한참 만들다 보면, 이쁘게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있게 만들어 봅니다. 송편에다가 소뿔을 만들어 달기도 하고 꼬리도 하나 붙여 놓기도 하고... 그런데 송편 찌고 나면 뭐부터 찾습니까? 특이하게 만든 것, 애착이 있거든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장난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고... 특이하게 고난을 많이 겪게 한 사람, 하나님이 특별나게 찾고 사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 특이하게 허락하신 여건, 무지하게 쪽팔리게 느껴지는 조건들... 하나님께서 그것들 때문에 당신을 더욱 사랑하시고 특별나게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주셨구나 인정하고 희귀한 뜻이 있어서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만드셨구나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역사는 시작됩니다. <시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불평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감사의 천객(天客)이 되십시오.

여러분, 오늘날의 사람들이 얼마나 사는 게 편리해졌습니까? 냉장고, 세탁기.. 한 30,40년 전만해도 이런 것 없이 살았습니다. 매일 손 빨래해야하고 연탄불, 장작불에 세 끼 밥해야하고 그런 때에 석유 곤로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편리했는지 젊은 사람들은 몰라도, 나이드신 분들은 아시지요? 지금의 가스레인지에 비하면, 석유 곤로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모릅니다.

가끔씩 기름 넣어야지요? 성냥불 켜서 덮개 들어서 불붙여야지요, 그것도 잘 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을음 나고 심지가 다 타고.. 또 가끔은 분해해서 심지 올려줘야지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보다 여러 가지로 편리해진 것이 지척에 널려 있는데, 왜 현대인들이 그렇게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쉬 피곤해지고 쉽게 지치고 삶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갑니까? 욕망,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사람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생명의 능력을 누리며 살아갑니까?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오묘하신 뜻에 따라 나의 기업을 줄로 재어줬음을 바라보면, 지칠 줄 모르고 살아가는 생명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스러워하고 불평하고 원망했던 그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지금은 찬바람이 이는 것같지만, 황무지가 장미꽃처럼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의 뜻이 있음을 믿고 감사로 받아들여보시고 나의 인생, 나의 삶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죽음을,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비로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삶의 행복, 능력을 경험합니다.


다섯째는,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마음이 생명의 비밀입니다(Walking with God)<7,8절>.

<7절>은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마음이고 <8절>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마음의 모습입니다.

죄인의 본성이 훈계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훈계를 받으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튑니다. 거부하지요? 한 때 삼행시, 오행시 유행했던 때 있었지요? 그때 이런 것 유행했습니다. 돼지라는 단어의 이행시.

돼 : “돼지야 좀 천천히 먹어라”
지 : “지는”

사람이 훈계를 받으면 속으로 이러지요? “지는.”

이렇게 이 마음으로는 죽음의 위협에서 절대로 구원을 노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조그맣게 자극하는 것도 품지 못하여 “지는”하고 나오는데,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하는데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생명의 능력은 양심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훈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에 부어집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밤마다, 어느 날 우연히 일 년에 한 두 번이 아니라 밤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심장, heart, 마음을 통해서 훈계하심을 듣는 마음이 복되고 이 마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여러분은 아침마다 밤마다 무엇하십니까? 텔레비전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아직도 분노를 삭히지 못하여 부르르 떨거나, 염려를 떨치지 못하여 하염없이 가라앉다가 곯아 떨어지지는 않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기도하며 성경책을 쳐고 밤에 하루의 일과로 육신은 지쳐도 단정히 주님 앞에 나아와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훈계를, 위로를, 용기의 격려를, 용서를 받는다면,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 삶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마음에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느 사람 앞에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전의식이 삶을 요동치 않고 견고하게 세워주는 비밀의 열쇠입니다.

흔들린다는 것, 사람의 심령을 참 피곤하게 하지요? 불안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욕구가 안정감의 욕구입니다. 불안하지 않은 것, 요동하지 않는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직도 주변 여건이 내가 원하는대로 되어져서 해피해지기를 바라는, 유아틱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사람의 심령은 주변 여건이 좋아졌다고 결코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그런 것처럼 속는 기간은 조금 있습니다. 잘 단장된 새 집에 이사가면, 거기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 약간은 있습니다. 영국 속담에 “새 집의 즐거움은 한 달 간다”고 하듯이, 한 달 정도는 갑니다. 외적 조건에 의지하였을 때, 그러나 금새 불안은 다시 올라옵니다.

사람의 심령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일 때에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예) 사도 바울의 로마로 가는 배 <행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저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뜻이 견고한 사람, 날마다 주님과 단정히 교제하며 내 마음을 통해 들려지는 주의 훈계를 받으며 항상 주님을 의식하며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평안을 누립니다. 죽음의 위협이 다가와도 구원을 노래를 부르는 능력을 경험합니다.

오늘 시편의 절정은 <9절>부터입니다. “이러므로” 결론적인 고백이지요? 죽음의 위협이 엄습해 올 때, 다윗은 그의 삶의 바탕과 기둥을 하나씩 하나씩 확인해 봅니다.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심을 다시금 고백드리며 나의 즐거움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안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는 것,/ 욕망의 우상, 죄에게 속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사는 마음,/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주신 나의 기업의 아름다움/ 그리고 하나님과 날마다 단정히 교제하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돌아보며 고백드릴 때, 자신의 영혼 저 깊이에서부터 평안의 산들바람이, 구원의 즐거움이, 생명의 능력이 점점 더 치밀어 오르다가 마침내 화산처럼 솟구쳐 올라 환희의 탄성으로 외치며 노래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키시고 선하신 뜻을 이루시며 거룩한 기쁨과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함께 하여 주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여 주실 것에 대한 체험과 소망이 넘쳐서 안도의 노래를, 가슴 벅찬 즐거움의 노래를, 행복한 소망의 노래를 외쳐 부릅니다.

그 영혼에 행복에 겨운 노래를 흐뭇하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꼭 이런 마음일 것같습니다. “세상아, 마귀야 그래 찬바람 더욱 불어와봐라. 더 난리를 쳐볼테면 쳐봐라.. 내가 끄덕이나 하겠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 내가 끄덕이나 하겠냐..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며 즐거워하며 신나게 살란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까? 세상에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떤 두려움이 내 심령을 도려내듯이 위협을 해도, 마귀가 아무리 내 마음을 회유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는, 즐거움의 노래를, 기쁨이 충만한 노래를 부르는 넉넉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나의 두목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소망, 뜻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소망을 따르기로 마음을 드리십시오. 존귀한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는 즐거움, 기쁨을 추구하기를, 죄를 적극적으로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에 감사하며 밤마다 아침마다 단정히 하나님과 교제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드려가기를 새기며 새기며 주님 앞에 고백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거지로 즐거운 척하려고 하지 않아도, 주변의 여건이 더욱 차갑고 난해하여도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당신의 심령을 가득 채우시고 당신의 마음에 충만하게 임재하심을 누립니다. 당신도 구원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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