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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지일관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마 2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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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봉 목사 (사직동교회)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어휘나 단어들은 “개혁,혁신,속도,빠르기,변화,진보,새로운 것...”등입니다. 일상의 대화 속에 이런 단어들을 자주 사용하면 그 사람은 개방 적이요 진보적인 사람을 평가해 줍니다. 여기다가 고속철도(KTX)까지 개통되어 국민들의 의식 속에 ‘속도감’이 무섭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로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새 길이 만들어집니다. 그 결과 수천 년 우리를 위해 목재와 산소와 아름다운 자연을 제공해 주던 산들이 잘리고 파괴되고 사라져 갑니다. 정부는 전국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도로망을 건설하겠다고 하니 이러다가 앞으로 농사지을 땅이 남아 있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나는 가끔 ‘실컷 이용하다가 사람들이 매정하게 내핑개쳐버린 옛 국도를 따라서 운전을 해 봅니다. 모두들 새로 개통된 진주-대전 간 고속도로가 편리하고 좋다면서 그 쪽으로 몰려가 버립니다. 그동안 30년 이상 묵묵히 헌신해왔던(?) 경부고속도로(부산-대구-대전) 보기에 미안해서 언젠가 한 번은 그 길을 찾았습니다. 한반도의 중앙지점이요612년 동안 우리 민족의 ’수도‘로서 묵묵히 기능을 해오는 서울을 놓아두고 ’새로운 수도‘를 만들겠다고 야단입니다. 고속철도가 처음 발표한 예산보다 무려 여섯 배의 예산(재정)이 투입되듯이 정부발표 45조원 예산으로 기어코 행정수도를 건설하게 된다면 이 또한 지금 발표 보다는 6~7배로 늘어나고 말 것입니다. 이 돈으로 전국 각 지역을 특성화시켜 고루 발전하도록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행정수도 건설의 첫째 이유가 “고리타분한 보수, 수구 세력들이 해방 이후 60년 동안 터를 잡은 현재의 수도에서는 우리 신진, 진보 세력들의 웅지를 펼 수 없으므로 전혀 새로운 곳에 웅지를 펼 수 있는 행정수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니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면 40~50년 지나면 지금의 정치집단 역시 낡고 캐캐묵은 집단이 될 것인데 그러면 또 수도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이러한 조삼모사, 조변석개보다 이런 시대적 풍조와 유행을 본 받아서 우리의 신앙 또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빠른 속도로 신앙의 원리가 무너지거나 원칙들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신앙의 아름다운 전통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꼭 지키고 보존되어야 할 신앙의 미덕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사실 구약 사사기를 읽을 때, 여러 곳에서 「그 때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구절들을 대하면서 설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까지 하였을까? 그래도 출애굽 현장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손길들을 그토록 생생하게 체험들을 하였거늘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고 신앙도 없이, 기도도 없이, 조심도 하지 않으면서 무질서하게 행동하였을까? 하면서 의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요즘 한국 교회의 이상기류를 보면서 사사기의 그 기록들을 온전하게 이해를 하게 되었답니다. 가장 주목해야 할 ‘급격한 변화의 사례’는 여의도에서 평생을 목회하고 있는 아무개 목회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세계를 우리의 교구로 삼아야 하며, 교회는 오직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하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또 ‘오직 예수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설교해 오던 분이 갑자기 불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이 얼마나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급격한 변화 아닙니까!

독재 정권 하에서는 독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 해놓고, 민주주의 하에서는 기독교정당 창당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니, 또 다른 체제가 들어선다면 이 분이 또 어떻게 변할지 정말 걱정됩니다.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여 ‘국회의원’을 4~5명 배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령이라고 공언했는데... 지금은 또 왜 말을 바꿀까요? 정말 슬픕니다. 걱정됩니다. 한국교회의 위상을 심각하게 먹칠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그러고도 ‘건재 하다는 것입니다. 여의도의 교인들 정말 좋은 교인들(?)입니다.

그런데 더 복장 터질 일은 오직 예수님만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평생 설교해오던 그 사람이 갑자기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면 그의 설교를 듣고 열심히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혼란스럽겠습니까! 타 종교에 몸을 담고 그런대로 잘 살아오다가 강력한 전도를 받아서 기독교인이 된 분들이나, 근래 기독교로 개종 해 보려고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던 분들에게는 엄청난 상처와 시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 유감스럽고,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고서 앞으로 마10:28~32이나 요14:1~6 행4:12, 16:31, 롬10:9,10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더군다나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익이나 변덕을 좇아 줏대 없이 행동하는 기회주의자들을 싫어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초지일관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시던 그 하나님이시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에게 보여주시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식언하지 아니하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변함없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14:18, 마28:20)

그러므로 하나님은 초지일관 하는 신앙/일편단심의 신앙을 좋아하십니다.

주후 100년경 사도 요한의 제자 가운데 폴리갑 감독은 비교적 가까운 지역인 서머나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으로 유배를 갔고, 폴리갑 감독은 체포되어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지역 통치자들의 성향에 따라 형량과 형벌의 종류에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신. 불신자 사이에 두루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폴리갑을 압송하는 로마군 책임 장교가 “감독님, 지금이라도 형식적으로 하셔도 괜찮으니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번만 선언하세요! 그러면 제가 책임지고 감독님을 자유롭게 교회로 돌아가시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호소하였습니다. 사형장에 가면 무서운 화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폴리갑 감독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살아온 한 평생 80여 년 동안, 우리 주님 날 보고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신 적 한 번도 없는데 내 어찌 우리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요? 괜찮으니 어서 갑시다

다니엘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어린 소년의 나이에(BC586) 조국이 강대국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참상을 지켜보았으며, 포로 되어 1000Km이상을 끌려갔습니다. 비참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인생을 비관하면서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초지일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우상숭배 거절, 우상제물을 알고는 안 먹기, 하루에 세 번 고국(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 열어놓고 기도하기,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기……. 이 대 여섯 가지 신적철학을 예루살렘을 떠나오던 그 순간부터 무려 50여년을 한결같이 지켰습니다. 바벨론에 제국의 느부갓네살, 벨사살왕, Mede 왕국의 다리우스 왕, 페르시아 제국(오늘의 이란)의 고레스 이렇게 3개 제국, 4인의 왕을 거치면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살벌하고 숨 막히는 이국 땅 정복자들 밑에서 무려 50여년을 초지일관 하였습니다. 이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어찌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찌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 신앙의 지조를 지켜라/ 충성과 봉사의 신의를 지켜라/ 나를 사랑하라/네 직무를 다하라/ 네 경주를 다 달려라!”(마24:13,눅18:13,딤후4:76,히11:13,38,계2:10,엡6:24)

우리교회에도 초지일관하는 신앙인이 많이 필요합니다.

진주 지방의 역사 이야기에 있는 내용입니다. 진주 기생은 조선8도에서 품격(?)높기로 유명하였답니다. 시, 그림, 기악(악기연주) 노래, 춤, 글씨 이 여섯 가지 재주에 능하였답니다. 그런데 진주기생이 전국에서도 정중하게 대우를 받는 데는 「황소 목을 꺾었으면 꺾었지 진주 기생의 지조는 못 꺾는다.」고 하는 이 전통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아닙니까!

로마서 16장을 보면 로마교회를 부흥시키고 지켜서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차지하도록 만들었던 수많은 성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초지일관하는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을 보면 스데바나와 아가이고의 초지일관하는 신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교회의 필요한 부분들을 보충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두 성도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중 칭찬받은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기쁨과 평안 믿음과 소망,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가리켜 ‘부요한 교회’라고 불러주셨습니다.(계2:9) 로마 제국이 서머나 교회를 박해하고 교인 중 몇 사람을 옥에 잡아가두는데도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초지일관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복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우리 사직동교회도 서머나 교회처럼 ‘초지일관하는 신앙의 교회’가 됩시다. 빌라델비아 교회 또한 초지일관하는 교회였습니다.(계3:7~13) 비록 세상 적으로 , 경제적으로는 작은 교회였으나 역시 로마제국의 무서운 박해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직동교회 성도요 주 예수님의 신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왕으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초지일관, 예수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갑시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초지일관’합시다. 내가 맡은 직무에 초지일관 합시다. 초지일관하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만이 주님 앞에 즐거이 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이 목회자보다도 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초지일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초지일관하는 믿음과 봉사, 충성과 헌신은 또 다른 성도들과 청소년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와 나라에도 초지일관하는 사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 왜 목사가 신랑신부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남편(아내)을 사랑하겠습니까?” 이렇게 ‘다짐’을 받습니까?(요즘은 이 한 가지를 더 묻는다고 합니다. “신부 ㅇ 양이여, 그대 옆에 서 있는 신랑 ㅇ ㅇ 군의 머리가 어느 날 대머리가 되더라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도와주겠느뇨?”) 이렇게 다짐을 받는 것은 부부 서로 ‘초지일관’하지 아니하면 건강한 가정을 세워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으로 들어서는 신랑신부 치고 신혼 초장에 깨어지고 결혼생활 중간에 결별하기를 바라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왜 불행하게 끝내는 가정들이 많아집니까? ‘초지일관’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애할 때 먹었던 마음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 다짐하던 그 마음, 결혼 서약할 때 각오했던 그 의지를 시종일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초지일관하는 사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준 직장을 소중히 생각하십시오. 초지일관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직장을 섬기십시오.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 회사의 미래를 그림 그리면서 봉사하십시오. 초지일관하는 정신들이 없으므로 기업들이 흔들리고, 알맹이가 없고 나라의 경제까지 흔들립니다.

나라에도 초지일관하는 사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조국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자유와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삼을 줄 아는 사람, 이 바탕 위에서 통치자가 바뀌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조국의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초지일관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태극기, 우리의 애국가(!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의 소도(서울),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우리의 전통적인 심성(평화 겸손 의지 보은사상~)…….이런 것은 쉽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초지일관함으로 지켜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입니다.

(마침)

고향집으로 찾아갈 적마다 늘 섭섭한 마음 드는 것이 있는데 마당에 우뚝 서 있던 커다란 감나무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5년의 온갖 꿈이 서려있는 감나무였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없으니 너무 안 좋습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 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3절에서 끝까지 견디라고 했는데 그 끝이 바로 14절이 말하는 ‘역사의 끝’을 말합니다. 역사의 끝은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순간에 시작됩니다. 지금 천국복음이 거의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의 끝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더 참으면 됩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습니다. 잘 견뎌왔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면 「끝까지 견딘 자」로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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