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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2 03:34

자기를 비운 사람들 (룻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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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용호 목사 (서울열린교회)

  룻기는 세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시모 나오미와 맏며느리 오르바, 둘째 며느리 룻의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이 세 여인은 공통적으로 똑같은 가족의 슬픔을 경험한 여인들입니다. 시모 나오미는 모압 땅으로 살기 위해 갔는데 그곳에서 남편, 큰 아들, 둘째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큰 자부 오르바는 시부, 남편, 시동생을 잃었습니다. 작은 며느리 룻은 시부와 시아주버니와 남편을 잃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 성도 여러분, 나이 드신 분들이 만약 먼 나라에 살려고 갔는데 거기서 남편, 큰 아들, 작은 아들을 잃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젊은 여 성도 여러분, 내가 시집을 가서 시부, 남편, 시동생, 시아주버니가 죽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정말 룻기에 나오는 세 여인은 죽음을 공동으로 경험한 여자들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이 가정은 이민 가서 패가망신한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이민의 길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고향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흉년이 풍년으로 변하여 먹을 양식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시모 나오미는 두 자부를 데리고 이제는 역이민으로 고향 베들레헴을 향하여 떠나게 됩니다. 지난날에 흉년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이민을 왔지만 이제는 남자를 다 잃어버린 이 망한 가정에 자부들을 이끌고 기대가 없는, 소망이 없는 고향으로 역이민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역이민은 성공한 사람이 당당하게 돌아올 수 있지만 나오미는 그런 처지가 아닙니다. 6- 7절에 보면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 오려하여 있던 곳을 떠나 곧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두 자부는 돌아갈 권리가 없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 결혼을 한 여인은 남편이 죽으면 그 가문에 속합니다. 그 가문이 허락을 하지 않는 한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젊은 두 자부가 스스로 못가겠다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함께 따라 나서게 됩니다.

  그때 시모 나오미가 8-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희망 없는 늙은 어미를 따라오지 말고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선대하시기를 바란다고 돌아가라 권유를 했습니다. 그 때 두 자부는 10절에서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며 완강히 거부합니다. 시모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나오미는 늙었습니다. 나오미는 가족이 없습니다. 나오미는 재물이 없습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은 아무 소망이 없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그래도 젊은 두 며느리가 옆에 있다면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두 며느리의 효도를 받는다면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다 포기하고 젊은 과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합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이 며느리들을 향해서 11절 이하에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고 합니다. 12절에도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고 합니다. 나를 따라오지 말고 너희 고향집으로, 너희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 시모를 붙좇았더라”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가라고 강요를 하자 맏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붙좇다’는 말은 달라 붙다는 말입니다. 오르바는 친정으로 갔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이렇게 두 동서가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룻은 시모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여인의 갈림길은 단순한 이별이 아닙니다. 오르바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여인으로 그는 이방의 신에게로 모압의 신에게로 돌아가고, 룻은 나오미 집에 시집와서 그 처참한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가운데서도 룻은 그 고통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하나님을 만난 여인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똑같은 시부의 죽음, 똑같은 남편의 죽음, 똑같은 가족의 죽음을 겪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르바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룻은 하나님을 만난 여인입니다.

  자기 희생의 길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5절에 보면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아주 비장한 말씀입니다. “얘야 너의 동서도 돌아갔지 않느냐? 너도 네 동서처럼 돌아가라” 그때 룻은 16, 17절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룻의 결렬한 의지 앞에 나오미는 할 수 없이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줍니다. 고향에 돌아온 이 고부는 나오미가 룻을 종처럼 부리고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그 젊은 며느리 룻을 위해서 재가를 주선합니다. 결혼을 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주선합니다. 친족 가운데서 보아스 라는 남자를 만나 룻은 결혼을 합니다. 룻이 결혼을 하면 사실상 나오미와의 고부관계는 끝납니다. 이제 룻은 신분이 변했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이기 보다는 보아스의 아내로서 살아야 할 여자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룻은 옛 남편의 어머니인 나오미를 버리지 않습니다. 극진히 받들어 드립니다. 개가한 룻은 옛 시모인 나오미를 멀리 하지 않고 대접하고 있다는 여기에도 귀한 것을 보게 됩니다.

  룻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룻이 이 아이를 데리고 시모인 나오미에게 가서 양육을 하도록 맡깁니다. 룻기 4장 16-17절에 보면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당시 결혼관습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는 맏아들이 죽으면 그 밑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을 위하여 대를 잇는 아이를 낳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공적인 결혼관습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없으면 친족 가운데 제일 가까운 서열대로 순서를 좇아서 그 여인과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남편을 위해서 대를 이어주는 아이를 얻어 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있는 계대결혼이라는 관습입니다.

  계대결혼은 성경에도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인 유다의 큰 아들 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아들 오난을 보고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아이를 낳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오난은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아이를 낳아주는 일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이고 그 당시 관습이기 때문에 오난이 형수와 동침을 하였으나 형을 위하여 아이 낳기를 싫어함으로 땅에 설정하였습니다. 사정을 땅에 해 버림으로 아기를 낳지 못하게 했는데 이 일이 여호와께서 악하게 보시므로 오난이 죽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대결혼에 의해서 보아스가 룻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아스가 룻과 결혼할 때 보면 보아스 앞에 더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족되는 사람이 룻과 결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거부할 권한도 있습니다. 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대결혼은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상대방에 대한 양육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양육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낳은 아이는 자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죽은 남편의 대를 이어주는 아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권리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싫어합니다. 야곱의 둘째아들이 형수와 결혼하기를 싫어한 것도 그런 관점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보아스는 룻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상당히 부담스런 일입니다. 실패하고 돌아온 두 과부를 부양해야 합니다. 거기에 아이가 낳으면 키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자기 아이가 되지 않는 희생을 하면서도 룻을 맞이하는 보아스입니다. 대단히 의미 깊은 진리를 보아스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자기비움

  이 세 가지는 우리에게 큰 진리를 계시해 주는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한 것은 룻과 나오미가 갖고 있는 영적인 심성과 통하는 일입니다. 세 사람은 각각 다릅니다. 나오미와 룻은 너무 다릅니다. 국적이 다릅니다. 세대가 다릅니다. 그리고 돌아온 룻이 만난 보아스도 너무나 다른 사람입니다. 자기는 이방인이요 보아스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친족일 뿐 자기와 결혼을 할 관계가 하나 외에는 없습니다. 친족이라는 것 이유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 사람은 영적인 관점 안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자기 자신을 비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을 보고 돌아가라고 권유한 것은 “내가 비록 늙었지만, 내가 비록 이렇게 비참한 노인이지만 너의 장래를 볼 때는 네가 나를 따라 와서는 안 된다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룻이 나오미를 좇아온 것도 룻은 자기를 비웠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이 어머니와 함께 하기로 자신을 비웠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비웠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를 좇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렇게 재산상의 부담을 느끼면서도 룻을 맞이한 결정적인 요인은 룻이라는 이 여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시모를 극진히 받드는 거기에 감동을 하여 룻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지만 제 나름대로 이렇게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룻이 자기와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가까운 친족되는 사람이 왜 룻을 거부했을까? 물론 성경에는 물질적으로 부담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 짐을 지기 싫어서 거부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남자로서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남자의 심성이라는 것은 여자가 맘에 들면 돈은 다음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룻은 용모가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 효심은 지극하고 맘씨는 좋았는데 룻의 용모가 남자들이 결혼하기에 호감을 주는 용모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앞의 친척도 돈 많은 사람입니다. 특히 돈 많은 사람은 맘에 드는 여자는 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친족은 룻을 버렸습니다. 친족에게 버림받은 이 여인을 보아스는 받아들였습니다. 하나의 조건입니다. 시모를 공양하는 그 아름다운 덕을 보고 보아스는 룻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 사람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이 세 사람이 우리교회 교인으로 등록하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비운 사람들, 남을 배려하기 위해 자기를 비운 사람들, 주님을 위해 자기를 비운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장 6, 7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될 것으로 취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우리의 구속주로 오시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채우고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신 메시야라고 소개합니다. 자기를 비워 이 땅에 오신 주님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려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채워지지 않는 줄 압니다. 우리 주께서 자기를 비우고 이 땅에 온 우리를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 욕심과 나를 위하여 집착하는 것을 비우고 주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코미디언의 말처럼 졸업식장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딸이 대학원 졸업을 할 때 석사학위를 받는 자리이므로 축하하기 위해서 참석을 했습니다. 제법 명문대학이라고 이름난 학교의 졸업식이니까 기대를 하고 갔습니다. 가보니 대학졸업식장은 난장판이었습니다. 총장의 훈사, 이사장의 격려사, 동창회장의 격려사, 답사, 송사가 있습니다. 스피커에서는 끊임없이 졸업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니 마음이 허전하다’ ‘여러분들을 보내니 마음이 허전하다’ ‘후배들이여 안심하고 사회로 오라’고 동창회장은 큰소리를 칩니다. 그렇게 졸업식은 진행되는데도 식장의 모습은 난장판입니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뒤에 있는 사람들은 예식장 로비에서 떠드는 것과 똑같이 떠들고 ‘그래 총창이여 훈사를 해라, 우리는 뒤에서 논다’ ‘개야 짖어라, 기차는 간다’와 똑같습니다. 거기에 와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를 귀담아 듣는 표정이 아닙니다. 빨리 끝나라는 것입니다. 운동장에 나가 보면 졸업식장에 있어야 할 졸업생들이 가운을 입은 채로 운동장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 사진 찍고 꽃다발 받고 희희낙락하고 졸업식장 안에서 들리는 스피커 소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떠들어라 우리는 우리대로 논다’ 이것이 오늘날 대학교 졸업식장 풍경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식장에 가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밀가루 범벅이 일어납니다. 난장판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불현듯 몽둥이로 때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그 모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는 찬송, 기도, 설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까? ‘기도는 해라’ ‘설교는 해라’ ‘나는 나대로 산다’ 이런 모습은 아닙니까? 난장판 된 오늘 우리 졸업식장의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교회를 통해 예배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귀담아 듣는가? 내가 그 말씀에 따라 얼마나 내 자신을 비우고 살아가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비운 자리에 채워지는 축복

  수도꼭지에 녹물이 나오는 것은 수도꼭지의 잘못이 아닙니다. 수도관 속에 녹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녹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수도관의 녹을 제거하지 않고는 맑은 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외형이 아닙니다. 우리 중심을 주를 위해 비워야 합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이 채워져야 우리의 말과 행위와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낳은 오벳이란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오벳은 다윗왕의 할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다윗을 이 땅에 보내는 그 위대한 일을 하나님이 하실 때 자기를 비울 줄 알았던 이 세 사람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주를 위해 자기를 비우는 자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를 비우는 그 사람에게 복음의 능력이 역사할 줄 믿습니다.

  끝으로, 선교사 두 사람의 편지를 한 대목 일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한 분은 지금 파송되어 일하고 있는 H선교사의 글이고, 한 분은 9월에 파송할 평신도 J선교사의 글입니다. “이 곳 서민들의 삶에 비해 내가 얼마나 특혜와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제 나름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없는 것이 많다보니 주님께 더욱 매달리게 되고 오직 그 분만을 위하여 의지하며 살게 되지요, 제자의 삶은 무엇보다 절대적인 믿음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절감하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보람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목회란 곧 의미를 먹고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글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가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으면서도 욕심 부리고 불만 가지고 살았는데 선교지에 와 보니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서 한걸음도 앞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를 집착하고 남과 비교해서 점점 더 명예를 추구하게 되고 자리를 탐하게 되는 목사인 것을 선교지에 와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하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너무나 보람을 느끼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의미를 먹고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성공한 목사였는데 내 목사의 성공이, 내 목사의 모습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의미를 몰랐는데 선교지에서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월에 파송될 평신도 J선교사의 글입니다. “저는 그동안 근무했던 공직을 명예퇴직하고 검찰 이사관입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강의하여 오던 중 이번에 우즈베키스탄에 전문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공산당의 붕괴로 독립된 나라이기에 지금도 전화와 메일이 감시당하고 있고 목사의 신분으로는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어서 교수의 신분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목사, 교회, 예수, 기도라는 교회 용어는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저는 한국에서의 내 사회활동, 경제활동을 접고, 7월 하순 책과 이삿짐을 현지로 보낸 후 저도 곧 출발하여 언어 훈련을 하면서 9월부터 사역을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은 우리 사회에서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공직으로도 이제 명예롭게 퇴직을 하게 되고, 향학렬이 뛰어나서 법학박사와 경제학박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얻었던 모든 기득권을 선교를 위해서 바치기로 했습니다. 자기의 경제활동, 자기의 사회적인 기득권, 그는 선교를 위해서 바치기로 하고 이렇게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를 비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보면 애굽의 총리와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과 다니엘의 이야기가 아주 돋보입니다. 가장 성공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애굽의 총리 요셉과 바벨론의 총리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애굽에 팔려갈 때 내가 총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간 사람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갈 때 나는 바벨론의 총리가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이 분들은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곳에서 총리가 되기까지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비운 사람들입니다. 그 비운 자리에 하나님은 총리라는 성공으로 채워 주신 것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우리는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힘의 한계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면 할 수 있고 될 수 있습니다. 자기만 채우려는 사람 앞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비웠던 요셉을 하나님이 붙잡고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도무지 넘지 못할 장벽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비워 보십시오. 그 장벽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나를 비우면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나를 채우면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나오미와 룻, 보아스 이 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를 비운 사람들입니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역사했습니다. 위대한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들을 통하여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자기 비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워 이 땅에 오신 그 모습대로 우리 자신도 비워가면서 주를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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