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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본심.(민 3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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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병의 목사 (한양교회)

        어떤 목사님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 빈민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을 방문했답니다.
마침 사모님은 한국을 방문하시고 안  계셔서 그 넓은 동네에 흑인이 아닌 사람은 그 목사님과 선교사님뿐이었답니다. 이 선교사님은 밤낮없이 흑인들 틈에서 흑인과 더불어 사시는 것입니다. 사흘째 되는  주일인데 어디서인지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들었답니다.

예배당이 좁아서 앉을 자리가 없이 빼곡하게 들어섰는데 날도 더운데 살과 살이 완전 밀착되어 앉아있으니 그 더운 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답니다. 오후 예배찬양예배까지 마치고 사택으로 돌아오는데 다소 어지러움 증을 느꼈다고 합니다. 흑인들만이 나는 그 체취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까닭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선교사님에게 물었답니다. 흑인들의 체취로 어려움이 없었느냐고 말입니다.  선교사님은  처음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진리가 있습니다.

1.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전적수용(全的 受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한다면서도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은 제외한 나머지 부분만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이기심일 뿐 참된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전(全) 존재를 상대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이 애견을 안고 다니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개가 냄새가 많이 나는 것입니다만 그렇게 안고 얼굴에 비비고 심지어 입까지 맞춥니다. 개를 사랑하면 그 냄새까지 수용하는 것입니다. 흑인의 냄새가 아직도 어지러움을 느낀다면 흑인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반증이라는 것입니다.

2.  이 세상은 거부(拒否)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에서는 외국인을 혐오하면서 외국 이민자를 추방해야 한다는 정당이나 단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스페인에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서 분쟁과 전쟁 테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9.11테러 이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하여 보복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 테러 인종분규 등 세상은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어떻습니까? 지난 엊그제 25일은 한국전쟁 5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임을 자랑합니다. 모두가 한 핏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수용하지 못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아직도 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때 희생자 통계/ 남한 측 사상자는 230만 명, 북한 측 사상자는 292만 명입니다 남북한 합쳐 52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중공군이 사상자는 90만 명입니다. 유엔군 사상자는 15만 명 전체 한국전에서 죽거나 다친 자는 627만 명에 달합니다. 수용부족의 결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응력이 강한 나라는 중국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중국인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적응력이 강한 중국인이 뿌리를 내리기를 실패한 유일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한국입니다. 한때 소 공동 일대 명동입구와 인천에 자리 잡고 있던 화교사회는 한국정부의 차별정책과 한국인의 배타성을 견디지 못하여 제삼국으로 다 빠져나갔습니다. 우리민족은 타인을 수용하는데 인색한 민족입니다. 우리나라사람만이 다른 나라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국제결혼이라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사랑은 전적인 수용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다면 수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수용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수용할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 장애인도 수용해야 합니다. 특히 기 신자들은 새로 나온 가족이나 다른 교회 다니다 나온 새 가족을 잘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같은 것이 더 많습니다.  열개의 손가락, 하나의 머리. 입도 하나요 귀는 둘이요 눈이 둘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체취, 피부색 언어, 문화가 좀 다릅니다.  그 작은 차이로 수용하기 그렇게 인색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수용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을 수용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과 전혀 다른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 하나님은 영원하시나 우리는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나 우리는 얼마나 악취가 납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수용해 주셨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목격하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행 10:34-35)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기 “받으신다.”는 말은 ‘데코마이’ 즉 ‘온 지성을 다해 영접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기까지 하는데 하나님은 받을 수 없는 인간을 받아주셨습니다. 3. 이 하나님의 본심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애 3:22)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설령 더 근심스러울 만큼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본심을 읽어내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민33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경로입니다. (1절)
이 경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시무시한 바로에게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이끌어내셨습니까? 
애굽의 바로가 어떻게 그 많은 노예를 해방시켜 주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와 짐승의 처음난것들 다 치셨습니다. 그것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란 히브리어로 ‘페싸흐’ ‘뛰어 넘는다.’ 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 Passover'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역시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漢字로는 유월절(逾越節) 넘을 逾 , 넘을 越.  모두 심판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유월절을 시점으로 시작하여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여정은 최고 최선의 여정이 아닐까요?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숙곳이나. 에담이나, 믹돌이나 마라나 엘림이나 신 광야나 돕가, 마실 물이 없었던 르비딤.
그 어디든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최고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교육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훈련코스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니 그들은 대부분 원망을 하였고 시험하였고 그 입을 모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300만 이상 남녀노소가 그것도 애굽에서 소와 양 재물을 이끌고 갯벌이 아닌 마른땅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애들아, 나는 바다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란다.’ ‘애들아, 나는 하늘도 주관하는 하나님이란다.’ ‘애들아 나는 땅도 내 것이란다.’ 하늘을 섬기고 바다를 섬기고 땅도 섬기던 애굽에서 400년을 살아왔던 그들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야웨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는데 반석을 쳐서 물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고전10:1-4에서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맞아 생수를 펑펑 솟아냈던 반석이 곧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생수를 주시려는 것이란 말입니다. 인간을 위해 희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 하나님의 본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아셨다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습니까?

다음주일은 맥추절입니다. 그리고 교회 사랑서약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읽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홍해바다, 엘림, 마라, 르비딤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금년도 반을 지내왔습니다. 이 광야를 걸어갈 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인도하신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 인도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맥추절 교회 사랑을 고백하는 맥추절을 맞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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