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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 (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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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명 목사 (안산빛나교회)

마음은 하나의 그릇과 같습니다. 그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 마음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을 결정지어 버리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에 욕심을 품게 합니다. 죄 된 마음을 품게 합니다. 그래 세상을 살면서 욕심이 이끄는 데로 죄가 유린하는 데로 삶을 엮어 갑니다. 가질 만큼 가졌는데도 이룰 만큼 이루었는데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마음이 이끄는 데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품으라는 말은 신앙적 싸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신앙은 결코 저절로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교한 마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도록 구경만 하진 않습니다. 마음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래 잠언서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자키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가룟유다의 마음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 마음을 점령하여 예수 팔려는 생각을 넣어 버린 것입니다.

환경이라는 탈을 쓰고 감정이라는 탈을 쓰고 욕심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포기해 버린듯 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가슴이 식어 있다면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안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암탉이 어미닭이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는 의미입니다. 예전 봄볕이 잘 드는 시골마당에서 노란 병아리가 노닐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미닭이 날개를 펴 자신의 병아리를 품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것이 어미닭을 쪼아 죽여도 병아리를 지켜 줍니다. 이처럼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예수의 마음을 품고 지켜가라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지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흐려지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가야 합니다.

사단의 계략은 예수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것을 심어 줍니다. 미움, 시기, 질투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하나는 어미닭이 알을 품듯 입니다. 둥지 위에서 어미닭이 3주 동안 알을 품습니다.
그런데 어미닭이 둥지위에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유정 란에 골고루 체온을 전달하기 위해 가슴으로 알을 돌리곤 합니다. 이때 밑에 있는 알이 올라오고 이 과정 중에 상처나 털이 빠지기도 하고 병아리가 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하십니다. 예수님이 심어준 마음을  내안에 심겨진 마음을 다듬어 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용서라는 알을 품고 사랑이라는 알을 품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알을 품고 하나님의 소원을 가슴에 품고 이것이 부화되도록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사명도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심어준 마음을 품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품다 보면 떨이 빠지고 상처가 나고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의 마음을 품는 사람들은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은혜의 중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용서를 말하지만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요 용서가 인색하다보니 자신의 용서에도 자유를 얻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의 본질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회를 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기회를 주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한번 용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여 평생에 기뻐하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관계속에서 다름 사람의 실수에 메이기보다는 저 사람이 나에게 참으로 좋은 사람이 되도록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더 대단한 사람들이기보다는 많은 기회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실수보다 더 많은 기회가 대단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목사의 지난 15년은 정말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저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고 하나님도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성도를 기다려 주면 정말 귀한분임을 알게 됩니다. 부교역자들이 실수하여 넘어질 때도 기회를 많이 주어야 좋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총각 전도사님이 주일학교를 섬기는 중에 장년들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민을 하다 유명한 목사님 교회에 집회가 있어 가서 설교를 듣고 그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갔더니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는데 ‘성도님들 저는 지금까지 남의 여인의 품을 안아본 중에 잊지 못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품에 안겼을 때 제일 포근했습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성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타락했구나! 여길 때 즈음 다시 말하기를 ‘그 여인은 제 어머니였습니다.’ 하자 감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메모한 전도사는 아! 설교는 저렇게 하는구나 하며 교회에 와서 많은 준비를 하여 수요일이 되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지금까지 여인의 품에 안기면서 다른 남자의 여인의 품이 가장 포근했습니다. 하자 교회가 웅성웅성 거렸고 장로님들의 큰 기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 엉뚱한 반응이 일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원고의 내용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습하는 말이 ‘저는 그 여인이 누군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 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수없이 기회의 은혜를 부여 받았듯이 자식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듯이 사람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악한 마귀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은혜, 용서, 사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로마서8: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입니다. 자유입니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예수를 믿으면 자유와 해방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자유를 느끼지 못하도록 수없이 정죄합니다.

마귀는 정죄하는 시스템 속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이끌어 갑니다. 이 마귀에게 속은 사람들은 정죄하며 정죄 받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어려서부터 사람은 정죄를 받으며 성장합니다.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그리고 어른들로부터 정죄를 받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전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게 무엇이냐 라고 무어라 하지만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선생은 아이를 잘 못을 가지고 정죄하지만 부모는 아닙니다. 아이의 전체를 보기에 자식을 잘 아는 것입니다. 과거를 멀리하고 미래를 앞당겨서라도  아이의 가능성을 보고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성격 가지고 정죄합니다. 왜 그렇게 생겨 먹었느냐? 하며 정죄합니다. 아니 생긴 것이 내가 선택해서 생긴 겁니까? 그냥 나오다 보니 이렇게 생긴 것 아닙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작정 정죄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악한마귀가 정죄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은 삶의 전체를 보게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은 부분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반응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정죄하는 이유는 부분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한번 보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별 것 없어! 합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정죄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한 아이를 안고 지하철을 타고 갑니다.
아이가 놀고 난리가 났습니다. 소파를 신발신고 올라간다든지 뛰어다닙니다. 여자의 치마를 들추어버립니다. 더 심한 것은 이 아이의 아빠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냥 자는 것입니다.
어떤 아저씨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이! 아저씨 아이 좀 말려요 왜 그냥 둡니까? 하니까 일어난 아이의 아빠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이 아이의 엄마가 오랫동안 병석에 오래있음으로 제가 병치레를 하다가 정신없이 살다보니 아이를 교육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아이엄마 장례 치르고 오는 길입니다. 나는 지치고 그래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니 이때 사람들은 아이를 불쌍하게 보고 측은하게 생각해 놀고 있는 아이를 서로 안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을 쉽게 하지만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천박하게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대로 말하고 판단하고 정죄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노합니다. 주님은 다 알고 있는데 나는 부분만 보고 알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부분 만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안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마음 중에 또 하나는 비판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체로 옳아도 한 가지만 문제 있어도 비판합니다. 비판의식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은혜는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부분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면 반드시 비판합니다. 비판이 왜 나쁩니까? 비판은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50% 비판하면 50%만 못 배우는 것이고, 90%를 비판하면 90%를 못 배우는 것이고, 100% 비판하면 100%를 못 배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드리러 와서도 않아서 비판합니다.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비판하는 것도 대체로 자기들 부족은 생각 안하고 불평을 하고 비판을 합니다. 전체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배웁니다.
청년들이여! 비판할 때 배우라.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면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비판할 때 비판 않고 배우면 인심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좋아 합니다.
세상에서 중요 한 것은 바로 자기 성장과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 적인 것을 가지고 전체를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어 전체에 반응하면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사춘기인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성격이 비뚤어져 갔고 폭력을 쓰며 불량배가 되어 갔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아이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그랬습니다. 이야기를 하는데 선생님 이 아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니 퇴학을 시키든 전학을 보내야 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닙니다. 이 아이는 친구를 잘못 만나 이리 됐습니다. 제 아이라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천성은 너무나 착한 아이입니다. 부분적인 것만 보고 제 아일 이렇게 판단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의 말이 정답입니다. 선생님은 기껏해야 2-3년입니다. 그런데 이 2-3년을 가지고 그 아이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머니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분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식이기이전에 올 곧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부분만을 가지고 판단하니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니 지금의 행동을 이해하고 용서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과거부터 나쁜 아이라 해도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미래를 가불해서라도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주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간음한 여인,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 삭개오에게 하셨던 그 사랑의 모습은 바로 이들의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래를 보고 실수 많은 시몬베드로를 이해하고 품어 가신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오늘 만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한번 드리고 교회를 판단해 버립니다. 교회는 섬기면서 그리고 전체를 보고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수용해 나가야 합니다. 목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미의 마음을 가지고 목회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성도들을 대하지 않으면 그 목회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제게 있어 목사나 그리고 남편 그리고 이런것은 잘 못하는 것 같아도 아버지 노릇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참아주고 그리고 보아주고 필요한 것을 채워 줍니다. 성도를 보며 어버이의 마음, 어미의 마음을 갖고 보면 다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자식을 보면 큰놈이나 작은놈이나 다 불쌍합니다. 출세한 놈이나 못사는 놈이나 다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려면 모두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이나 지도자들도 모두가 부모의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전도한 사람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잘 되어도 형의 마음을 가지면 일은 잘되도 관계는 힘들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특별히 상처받은 분들이 많이 옵니다. 그래서 위로받고 정착을 합니다.
잠언서에 보더라도 소떼와 양떼에 마음을 두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정죄말고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기다려 주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어버이의 마음을 갖기를 부탁드립니다. 진정한 은혜는 부분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사는 방법이 다르고 사는 이유도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윗을 보신 하나님은 그는 내 마음에 합한자라 말씀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거니와 나는 중심을 보신다 하셨습니다.
다윗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있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나요?
열심히 일하여야 할 무엇인지 답하실 수 있나요?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내안에 심어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귀는 이것을 빼앗아 가려 합니다. 우리는 암탉이 병아리를 보호 하듯이 그리고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보호하고 지켜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소원이 꿈이 커져가야 합니다.
신앙은 싸움입니다. 전투입니다. 신앙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모두는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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