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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인하지 말라 (마 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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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殺人의 의미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1-26)


제6계명의 재해석(마음의 살인) 

  앞선 말씀에서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사례로써 제6계명과 제7계명을 연이어 언급하셨습니다.  제6계명과 제7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이 두 계명이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가장 많이 위반하는 계명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제6계명에 대한 해석과 적용입니다.  살인에 대한 율법들은 古來로 많이 있어왔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현대 법전에 이르기까지 살인에 대한 율법은 항상 핵심적인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1절)  "옛 사람에게 말한바“란 고전적인 법들을 말합니다.  살인하면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율법 해석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절)  세상 율법은 육체적 살인만 처벌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율법은 마음의 살인까지도 살인죄로 취급합니다.  즉, 세상 율법은 육체적 행동만을 적용대상으로 삼지만, 주님의 율법은 마음의 생각에까지 적용됩니다. 
  22절을 자세히 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  형제에게 말 한 마디 잘못한 것까지 다 살인죄로 취급됩니다.  살인의 첫단계는 분노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평소 가장 잘 나타내기 쉬운 감정이 바로 분노의 감정입니다.  분노란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타내는 감정입니다.  감정 표출 자체가 나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모든 원인을 타인에게로 돌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대개 이기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어요.  뭐든지 내가 안 되는 것은 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공부 못 하는 것도 남의 탓입니다.  선생님 잘못 가르친 때문이고, 부모가 제대로 도와주지 않은 때문이고, 환경이 나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난한 것도 남의 탓이요, 내가 출세 못하는 것,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 심지어는 잘못된 성격까지 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잖아요?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그건 너!”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요즘 불특정 다수를 향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하철에 불을 질러 많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남의 자동차를 다 망치로 두들겨 찌그려 놓습니다.  며칠 전 대법원에서 오랜만에 사형확정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목 졸라 죽인 20대 청년입니다.  그는 무려 7000 만원의 카드 빚을 지는 바람에 아버지가 연금보험을 해약해서 갚아줬습니다.  그런데도 여자 친구와 돈을 펑펑 써서 또 카드 빚을 졌습니다.  이번에는 부모가 갚아주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차례로 가족을 죽이려 했습니다.  잘못은 자기가 저지르고 가족에게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분노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행동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매사를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입니다. 
  살인의 두 번째 단계는 욕설입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  “라가”(rJakav)라는 말은 “뇌 속이 빈”, “텅 빈 머리”를 의미하는 뜻의 욕설입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골 빈 놈!”, 혹은 “바보, 멍텅구리”란 뜻입니다.  “미련한 놈”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mwrov"(모로스)이며, 주로 지식이 부족하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 한다면 “무식한 놈”, “모자라는 놈”, 정도의 아주 모욕적인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지식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분노가 외부로 노출될 때 첫 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욕설입니다.  우리가 보통 화 나면 자주 쓰는 말이 있지요?  “犬子”, 개의 자녀(?)입니다.  이 욕설 한 마디로 공회의 심판을 받고, 욕설 한 마디로 영원한 지옥에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왜 욕설 한 마디가 지옥에 떨어지는 살인죄가 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욕설이 최악의 인격 모독이요, 존재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욕설 한 마디를 인격 모독이요 존재 부정의 살인으로까지 간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려면 언어의 mechanism을 알아야 합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컴퓨터에 보면 세 종류의 중요한 장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입력 장치이고, 둘째는 연산 장치이고, 셋째는 출력 장치입니다.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할 때 주로 입력 장치나 출력 장치만 상대합니다.  키보드를 만지고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즉, 자료를 넣어 주고 결과를 뽑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실상 컴퓨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부의 process 즉, 연산과정입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출력 장치에서 나오는 결과에 불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연산 과정입니다.  만일 사람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면 그 마음에서 나쁜 생각의 연산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생각의 연산일까요?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생각, 상대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만일 마음에서 상대의 인격을 조금이라도 배려할 생각이 있었다면 절대로 상대를 모욕하는 말이 입 밖으로 방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욕설은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정도의 인격 모독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볼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욕설이 바로 “犬子”(개의 자녀)입니다.  상대가 조금만 맘에 들지 않으면 이 욕설을 사용합니다.  졸지에 상대를 완전히 개(犬)의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립니다.  개는 잡아먹어도 되는 정도의 가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00"라고 욕을 하는 것은 곧, 너는 복날 잡아먹는 보신탕용 개 정도의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인격 모독입니다.  신혼부부들 중에 말을 함부로 해서 훗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합니다. “당신은 돌대가리야!”, “당신은 골이 비었어!”, “당신이 인간이야?” 보통 남자들은 대개 게으릅니다.  발을 씻지 않고, 양말을 벗어서 아무데나 집어던지고, 휴지를 여기저기 던져 놓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당신이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약간 더러운 것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재까지 부인당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보통 여자들은 연애시절에 무엇이든지 깔끔한 신데렐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하고 보면 엄청 무능합니다.  음식을 제대로 못해서 자장면이나 시켜다 먹고, 방 정리를 잘 못해서 너저분하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식사를 거르기 일쑤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고 “당신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돌대가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안 정돈을 좀 못한 것 때문에 졸지에 머리통이 돌로 되어 있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살인은 인격을 무시하는 존재부정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인 것이나, 마음에서 상대를 무시한 것이나 똑같은 살인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함부로 말을 합니다.  말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 순간 내 뱉고 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말에서 상대의 인격 모독을 느낍니다.  말 한 마디에서 칼에 찔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아물면 그만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어린 자식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너는 가망이 없는 놈이야!”라는 부모의 말 한마디에 삶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너무 말의 폭력이 심각합니다.  인터넷을 보면 인격 모독의 욕설들이 난무합니다.  국회의원들은 삿대질을 하면서 반말질을 합니다.  조금만 수틀린 일이 생기면 연배를 따질 것도 없이 욕설부터 합니다.  돈이 없어서 살 맛 나지 않는 점도 있지만, 인격을 무시당하는 세상에서 정말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살맛이 나지 않는 것은 곧 살인 당했다는 뜻이겠지요?  언어적 살인이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칭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합니다.  禮節이 뭡니까?  제사 많이 지내고, 묘 자리 잘 쓰는 게 예절입니까?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게 예절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질서가 잘 잡힌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일본의 질서를 일본 사람들의 언어에서 찾고 싶습니다.  일본어에는 특별한 욕설이 없습니다.  그들은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을 최악의 매너로 생각합니다.  언어는 칼보다 무서운 도구입니다.  잘 사용해야 합니다.  열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언어적 살인자들입니다.  매일매일 무수히 많은 살인을 합니다.  오늘 이점을 확실하게 깨닫고 고치시기 바랍니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잠12:18)


제6계명의 목표는 형제 화목

  제6계명의 최종 목표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 화목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나는 남을 해롭게 한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남을 해치지 않은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살인한 적이 없는 것이 자랑입니까?  도적질 한 적이 없고, 사기 친 적이 없는 것이 자랑입니까?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해도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제6계명은 금지의 계명입니다.  금지의 계명은 최소한의 한계점을 명시하는 것뿐입니다.  최소한 살인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근본 취지는 살인하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상 무한대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제6계명의 최종 목적은 형제 사랑과 화목입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제6계명의 목표는 형제 사랑과 화목입니다.  주님은 제6계명을 그렇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3-24절)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가장 소중하고 우선적인 일입니다.  예배는 십계명 돌비의 첫 번째 판에 새겨진 법입니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예배를 중단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배를 중단시킬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와의 깨어진 화목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그냥 돌아가라!  예배를 중단하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관점에서 본다면 예배 중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배 중단을 명하셨습니다.  강조점은 예배 중단이 아니라, 형제와의 화목입니다.  가까운 형제와 원수가 된 후에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5)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사58:4)  혹간 내가 남에게 잘못한 일이 생각나지 않고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남이 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 알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의 잘못이 예배드리는 도중에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제물을 그냥 놔두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당장 돌아가세요.  그만큼 형제와의 화목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화목의 대상자는 형제들입니다.  형제(ajdelfov")란 말은 상당히 폭이 넓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한 부모에게서 난 혈육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형제란 일가친척의 總稱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스라엘 동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형제란 말은 같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형제란 말은 나와 접촉이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사람들,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나면 언제든지 달려가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적용할 첫 번째 대상은 가족입니다.  먼저 가족과 화목하십시오.  부부끼리 싸우지 말고 화목하세요.  예배 전에는 화해해야만 하니까, 만일 매주 주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 예배 이전에는 화해해야만 되겠지요?  수요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삼일 이내에 화해해야만 합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당일에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배를 자주 드리는 것이 좋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화해가 중요합니다.  부부싸움을 많이 한다고 다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제일 나쁜 형태의 부부싸움은 풀지 않고 지나가는 싸움입니다.  이런 식으로 싸우는 사람들은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고 쌓아갑니다.  그래서 도달하는 결과가 있지요?  70세가 넘어서 하는 황혼의 이혼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형제 사이, 자매 사이, 다 마찬가집니다.  가족은 첫 번째 화목의 대상자들임을 잊지 마세요. 
  오늘 말씀을 적용할 두 번째 대상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화목이 첫째입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예배의 공동체요, 교제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천국을 상상해 보세요.  천국에는 불신자가 없습니다.  성도들만 있습니다.  가난한 자도 없습니다.  병든 자도 없습니다.  전도 대상자도 없고, 구제 대상자도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가장 선한 사업이 뭐겠습니까?  첫째는 예배드리는 것이고, 둘째는 성도 사이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천사들과 성도들이 밤낮 하는 일이 뭡니까?  찬양과 경배, 그리고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지상의 교회는 이런 목적 외에 전도와 선한 사업의 목표가 추가되어 있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한 단체로 알고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교회가 선한 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제일의 목적은 아니며, 궁극적인 목적도 아닙니다.  자선사업 한다고 교인끼리 싸우는 교회가 있습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교회는 타인을 위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공동체의 화해부터 이루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가장 좋은 전통은 애찬의 풍속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식사를 함께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입니다.  “牧會는 먹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이든 교인이든 친교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화목을 회복하는 것은 예배를 중단할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세 번째 적용 대상은 가까운 친구나 이웃입니다.  친구, 직장 동료, 동창생, 이웃,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은 반드시 해소시켜야만 합니다.  제가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삶의 규칙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결코 누구와도 원한을 품고 살지는 말자!  누가 내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모욕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수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남에게 잘못한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적극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의 원칙을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 :17-18,21)


화해에 적극 나서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화해에 적극 나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인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화해는 최대한 빨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화해를 미루면 여러 가지 큰 손해가 발생합니다.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5-26절)  첫 번째 손실은 마음의 상처입니다.  큰 다툼이 있었다 해도 화해하고 나면 마음은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작은 다툼이라도 화해하지 않고 지나면 마음의 상처가 깊어집니다.  이혼하는 부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유가 뭔지 아세요?  이유도 없이 싫은 것, 그냥 싫은 것, 무조건 싫은 겁니다.  제일 해결하기 힘든 경우가 바로 그냥 싫고, 무조건 싫은 경우입니다.  그냥 싫다고 해서 원인이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뭔가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바로 사소한 감정의 상처가 누적되는 경우입니다.  화해를 미루면 상처가 깊어지고, 마음이 평안치 않습니다.  상처의 누적은 파멸을 부릅니다.  둘째 손실은 육체적인 손상입니다.  마음의 병은 육체의 질병이 됩니다.  소화불량, 위장병, 심장병, 고혈압, 스트레스, 신경통, 각종 암의 원인이 됩니다.  때로는 법의 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서 육체적 자유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손실은 재산상의 손실입니다.  대개의 민사 소송은 일방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쌍방 과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금전적 손해를 봅니다.  넷째 손실은 깨어진 인간관계입니다.  한번 깨어진 인간관계는 좀처럼 회복하기 힘듭니다.  부부가 됐든지, 형제가 됐든지, 친구나 이웃이 됐든지, 한 번 깨어지면 회복하기 힘든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특히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생겼다면 지체 말고 빨로 화해해야 합니다.  다섯째 손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일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면 예배가 은혜롭지 않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도 불통됩니다.  경건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화해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얼마나 빨리 화해해야 될까요?  성경은 그 표준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  어떤 다툼이라도 하루해가 지기 전에 화해해야 됩니다.  24시간이 화해에 주어진 표준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특별히 화해의 기회를 강조하십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함께 길에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 혹은 잠깐 같은 방향으로 동행하게 되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화해하기는 좀 어색한 경우입니다.  화해에는 상당한 격식이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든지, 차를 한 잔 나눈다든지, 특별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더라도 무조건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화해는 긴급한 사안이라는 뜻입니다.  화해는 격식이나 시간을 따질 만큼 한가로운 일이 아닙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최우선적으로 시도해야 될 일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함께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인생행로를 상징하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빨리 화해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우선 해결해 둬야만 하는 일이 바로 형제 갈등의 해소입니다. 

  둘째로, 화해에 관한 한 주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수동적이 되지 마세요.  상대가 먼저 화해를 청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먼저 화해를 요청해야 합니다.  상대가 잘못을 했다 하더라고 상대편의 사과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화해를 청하십시오.  다투고 난 후에 가장 미련한 처신은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여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다투고 나서 사과할 줄 모르는 여자예요.  나는 그런 여자와 같이 살지 않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밴댕이 같은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싸우고 나서 먼저 사과하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지혜로운 여자는 남자가 먼저 사과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남자는 여자가 먼저 사과하기를 기다리지 않아요.  저도 신혼 초에 부부싸움 하고 나서 밥 먹지 않고 버텨봤습니다.  그런데 이건 천하에 미련한 짓이예요.  얼마나 배가 고픕니까?  집에서 안 먹으면 나가서라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몰래 라면도 삶아 먹고, 자장면도 시켜 먹고...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그래서 저는 몇 차례 싸워 본 후에 싸움의 네 가지 법칙을 정했습니다.  싸움의 제1법칙, 싸워도 반드시 밥은 먹는다!  싸움의 제2법칙,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화해한다.  싸움의 제3법칙, 아무리 화가 나도 극단적인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싸움의 제4법칙, 내가 먼저 신체 접촉(skinship)을 시도한다!  한 번 해 보세요.  저는 지금도 제 머리가 상당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화해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제6계명은 육체의 계명이 아니라, 영적인 계명입니다.  육체적 살인만 살인이 아니라 마음의 살인도 살인입니다.  마음의 살인은 대개 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한 마디 말이 사람을 죽입니다.  형제를 향한 분노, 욕설 한 마디는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존재를 무시하는 칼날입니다.  육체적 살인보다 더 나쁜 살인입니다.  그러므로 분노의 살인자, 언행의 살인자가 되지 마세요. 
  제6계명의 의도는 형제 사랑과 화목입니다.  형제 화목은 예배를 중단할 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이 깨졌다면 반드시 복원해야 합니다. 
  제6계명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로, 신속한 화해입니다.  화해가 미루어질수록 손실이 커집니다.  영적 손실, 육체적 손실, 물질적 손실, 사회적 손실, 막대합니다.  그러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신속하게 화해를 시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화해의 주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이 먼저 화해를 청해오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무조건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내게 유익합니다.  오늘 제6계명에 대해서 적극적인 실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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