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란 무엇인가?(35)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것” (계 3:..

  • 잡초 잡초
  • 242
  • 0

첨부 1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오늘은 7월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 중등부 고등부 학생들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기 전에 중 고등부 학생들에게 한 말씀 드립니다. “인생은 편지”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인생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마음과 생각을 주고 받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입니다. 슬픔과 기쁨을 주고 받고 사랑과 고마움을 주고 받는 편지가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은 편지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편지들이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보낸 편지들입니다.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우리는 위로와 기쁨과 용기와 행복을 발견합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비 인격적인 정보만을 수집하면 비 인격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인간은 인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므로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편지를 많이 주고 받으면 인생이 풍부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나는 찬송가 속에 내가 받은 편지 여러 장을 가지고 다닙니다. 3년 이상 나와 편지를 주고 받다가 지금은 하늘 나라로 간 김연재양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도 가지고 다닙니다. 황선희 양의 편지도 성혜진의 편지도 이원주의 편지도 도문에 사는 어린이 안예화의 편지도 이중표 목사님의 편지도 가지고 다닙니다. 최근에 내가 주고 받은 편지 두 장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하나는 송명희 시인과 주고 받은 편지이고 또 하나는 중국 도문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아 학생인 렴춘희 양과 주고 받은 편지입니다.

  “목사님! 감사 드립니다. 생일도 좀 썰렁하게 보냈는데 뜻하지 않은 화분 선물을 목사님께서 보내 주셔서 위로와 사랑을 느낍니다. 7월 둘째 주일 날 비가 안 오면 강변 교회를 가려고 합니다. 세상이 참 고통 중에 있군요. 세상을 쫓지 않는 강변 교회이길 기도 드리며 목사님의 자상하신 사랑에 거듭 감사 드립니다. 목사님이 보내 주신 화분 선물 옆에서 카메라 폰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6월 25일 송명희 시인”

  “사랑하는 송명희 시인에게, 반갑습니다. 생일을 축하할 수 있게 되어서 참 좋습니다. 꽃과 함께 찍은 사진이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지난 주간 중국 연변지역을 방문하고 그곳에 사는 어려움에 처한 우리 조선족 동포들에게 조그만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돌아왔는데 너무너무 좋은 시간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결국 인생은 만남과 나눔인데 만날 사람 나눌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착함을 베푸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7월 둘째 주일 날 비가 안 오면 강변 교회에서 만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생일을 다시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2004년 6월 26일 김명혁 목사”

  “존경하는 목사님에게, 고마워요. 회답을 이렇게 빠르게 해줘서요. 그 편지를 못봤다구요? 너무 아쉬운데...... 미안해요. 그 편지를 다시 보내 못 드리게 됐어요. 난 보내 편지를 저장하지 않아요. 목사님 근데 하느님은 아마 내가 쓴 편지를 봤을꺼죠? ㅎㅎㅎ 난 지금, 아니 목사님을 만난 후부터 왜서인지 그냥 기분이 하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너무 행복해서 일까?  그리구 겁나는 거 없어요. 관심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깐! 그럼 늘 건강하세요. 그리구 내가 좋은 소식 보내기를 기다려 줄꺼죠?  7월 중순이면 통지서가 올 껍니다. 그럼 안녕히! 6월 29일  렴춘희로부터”

  “사랑하는 렴춘희 학생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잘 지내기를 바란다. 답장이 늦어졌다. 그런데 나는 어제도 오늘도 춘희가 6월 29일에 보낸 편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읽어주면서 춘희를 자랑했다. 어제는 강변교회 연합구역 모임에서, 오늘 아침에는 사랑의 쌀 운동을 하는 분들에게 춘희의 편지를 읽어주었다. 모두들 많은 감동을 받았다. 고난과 아픔과 슬픔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인격을 아름답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보석과 같이 빛나는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든다. 나는 춘희가 앞으로, 춘희가 말한 대로, “내”가 아닌 “너와 우리”를 위해서 사는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을 잘 안다. 내가 앞으로 춘희의 후원자가 될 것이다. Fighting! Cheer up! I love you! May God bless you! 2004년 7월 3일 아침 김명혁 목사”

  그러면 이제부터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동안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34번 설교를 했습니다. 작년 5월 25일부터 금년 4월 21일 까지 거의 1년 동안 “죄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지난 5월 한 달 동안은 외부 강사들이 와서 가정과 자녀들에 관한 설교를 했고, 지난 6월 한 달 동안은 ‘착함’이란 주제를 가지고 제가 4번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마지막 35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난 세 가지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이 세 가지 죄는 말세 교회와 말세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세 가지 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세 가지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기독교는 본래 뜨거움의 종교이고 열심의 종교입니다. 가슴에 감동과 감격을 지닌 종교란 말입니다. 사죄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가슴에 지닌 종교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가슴에 지닌 종교입니다.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종교입니다. 착한 일을 하므로 가슴에 행복을 누리는 감동의 종교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떼어주시는 떡을 받아 먹었을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눅24:32). 초대교회 성도들은 피차 뜨겁게 사랑했다고 했습니다(벧전1:22). 기독교는 지식의 종교도 아니고 의식의 종교도 아니고 단순한 윤리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감동과 감격을 가슴에 지닌 뜨거움의 종교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열심의 종교입니다(롬12:10,11).

  그런데 사람은 조석으로 변하는 믿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주님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성도들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식어지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가 식어지고 봉사가 식어지고 사랑이 식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례 권사님은 82세이지만 지금도 그 마음이 뜨겁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전화를 드렸는데 몸은 비록 쇠약해졌지만 주님과 교회를 향한 권사님의 마음은 뜨겁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지금 95세이지만 지금도 그 마음이 뜨겁습니다. 최근에도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터키 여행을 했는데 하루도 새벽기도를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김삼환 목사님이 전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주님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성도들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상실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미지근해지고 맙니다. 기도도 식어지고 봉사도 식어지고 사랑도 식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고 사데교회 성도들은 죽은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라도디게야교회 성도들은 가슴에 지녔던 뜨거움을 상실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고 슬픈 일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마음과 생각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될 때 그렇게 됩니다. 마음과 생각이 주님과 성도들로부터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될 때 그렇게 됩니다. 마음과 생각이 삐딱해질 때 그렇게 됩니다. 마음과 생각이 불순해져서 외도를 할 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분부했습니다. 돌이키라고 분부했습니다. 주님께로 돌이키고 성도들에게로 돌이키라고 분부했습니다. 다시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둘째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기독교는 세상의 부요함을 탐하거나 소유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세상의 부요함을 주겠다고 시험했으나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마귀는 가끔 성도들에게 다가와서 세상의 부요함을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화우스트에게 다가와서 속삭였고 교황 인노센트에게 다가와서 속삭였습니다. 13세기의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세상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교황이 자기 앞에 수북하게 쌓인 돈을 세고 있었습니다. 마침 유명한 신학자 아퀴나스가 들어왔습니다. 교황은 아퀴나스 박사에게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아퀴나스 박사님,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 교회는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퀴나스 박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황님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이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본래 가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팔 복을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는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고후8:9). 마게도냐에 있던 교회들은 극한 가난 중에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다고 사도 바울이 칭찬했습니다. 기독교는 물질적인 부요를 탐하거나 추구하거나 소유하려는 종교는 아닙니다. 물질적인 부요함 대신에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는 종교이고, 지상적인 부요함 보다는 하늘의 부요함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올라갔고 부자는 지옥에 내려갔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는 가난의 종교입니다. 세상적으로 가난할 때 천국의 부요함을 사모하게 되고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영적인 부요함을 사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과 궁핍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랜시스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평생 가난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들의 이름을 대빈이라고 지었습니다. 크게 가난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크게 가난할 때 크게 부요해지는 비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돈을 너무 좋아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돈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돈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대형 교회들이 대 기업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 기업화되고 너무 전문화되고 있습니다. 문어발식 확장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적인 부요함을 지니게 될 때 영적인 부요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하게 된 라오디게아교회는 “곤고해졌고 가련해졌고 가난해졌고 눈이 멀게 되었고 벌거벗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해질 때 영적으로 가난해지고 세상적으로 가난해질 때 영적으로 부요해집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해진 라오디게아 교회를 주님께서 책망했습니다. 책망하시며 징계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적으로 가련해지고 무감각해 진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망과 징계입니다. 책망과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성령의 불로 연단을 받으라는 분부입니다.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피로 씻음을 받으라는 분부입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눈을 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책망과 징계를 받으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회개하라.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셋째 문을 닫고 열지 아니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기독교는 열림의 종교입니다.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집을 열고 손을 여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이웃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종교입니다. 유교는 닫는 종교인데 비해 기독교는 여는 종교입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들었을 때 마음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집까지 열고 손까지 열었다고 했습니다. 루디아는 마음을 연 다음 사도 바울과 다른 사람들에게 집과 손을 열어 도움의 손길을 폈습니다.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4,15). 루디아는 또한 빌립보에 사는 형제들에게까지 집을 열었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행16:40). 루디아는 이미 자기 집을 열어 형제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요한 삼서에 나오는 가이오도 자기의 집을 열어 나그네와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대접했다고 했습니다. 부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자기의 집을 열어 형제들을 영접하고 대접했다고 했습니다. 

  연다는 것은 자기를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냄을 의미하고 다른 사람들과 교제함을 의미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눔을 의미합니다. 크레물린처럼 자기를 숨기고 위장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혼자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머니를 꼭 닫고 인색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마음을 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음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주님을 자기들의 마음 문밖으로 내어 좇았고 이웃을 자기들의 마음 문 밖으로 내어 좇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3:20). 

  마음 문을 열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가정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고 천국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음 문을 닫을 때 천국의 문이 닫히고 은혜의 문이 닫히고 축복의 문이 닫히고 구원의 문이 닫힙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습니다. 「빛을 남긴 믿음의 위인」이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설교는 흐르는 시냇물 같이 회중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회중들은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회중은 은혜의 도가니에 묻혀 교회당을 떠나지 않았다. 죄인 잡으러 왔던 순표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려 왔던 중이 개종하고, 신부가 은혜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 장로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다.”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1500여명의 성도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 민족의 운명이 바꾸어졌습니다. 말세 교회의 특징의 하나는 문을 닫는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지적했습니다. 문을 열라고 분부하십니다. 불신앙과 교만의 마음 문을 열라고 분부하십니다. 위선과 거짓의 마음 문을 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기적이고 인색한 마음 문을 열라고 분부하십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이웃에게 마음을 열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말세 교회의 세가지 죄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첫째 죄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죄입니다. 은혜를 새롭게 받아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죄는 세상의 부요함에 푹 빠진 죄입니다. 책망과 징계를 받아 회개하므로 영적인 부요함을 되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죄는 마음이 닫혀진 죄입니다. 닫힌 마음을 깨뜨려 활짝 열고 주님을 모시고 이웃을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거동락 하다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귀를 열고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