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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하고 충성된 종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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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교회)                                             

지난 1980년대 말에 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 당시 기도로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아 활동하시던 현신애 권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제 주변의 많은 분들로부터 그 분의 병고침의 은사와 활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이 분이 작고(作故)하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현 권사님이 나이도 많으시고 또 그 동안 많은 수고를 하셨기에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고들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돌아가신 지 며칠이 안 되어 다시 의식이 깨어나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병원의 의사도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였기에 이제 장례를 준비하려고 하던 차에 다시 깨어나시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깨어나신 다음에 이상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하늘길이라는 데를 밤낮없이 한참 가는데, 어떤 커다란 문이 나오는 게 아니겠어. 그런데 그 문 앞에 어떤 사람이 하얀 옷을 입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틀림없이 예수님 같았어. 그래서 '혹시 예수님 아니시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렇다'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어. 그래서 '예수님, 저 왔어요. 저 현신애야요.' 했더니 눈을 꿈쩍 꿈적 하시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시면서 '현신애? 잘 모르겠는데. 도통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이름이야.' 하시질 않겠어. 나는 처음에 예수님이 장난하시는 줄 알았어. 그래서 다시 물었지. '예수님, 저 현신애에요. 서울의 서대문 근처에서 제단을 쌓고 늘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병을 고쳐주던 현신애에요.' 했는데도 예수님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만 하시는 거야. 너무 기가 막혀 그만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예수님 말씀이 '내가 아는 사람 아니면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네' 하시는 거야. 정말 환장하겠더군. 그래서 할 수 없이 돌아가려고 하다가 문득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다른 사람이나 물어보고 가자는 생각이 나기에 다시 물었지. '예수님, 그러면 조용기 목사라고는 아세요?' 했더니 '조용기 목사? 모르겠는데. 전혀 모르겠는데' 하시는 거야. 그래서 이번에 '한경직 목사라고는 아세요?' 했더니, 예수님께서 눈을 지그시 감으시면서 '한경직 목사?' 하시면서 몇 번 이름을 되 내시다간 하시는 말씀이 '한경직 목사?  쪼금 알 것 같애.' 하시는 거야.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데. 그러다가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쫓겨나서 이렇게 온 거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현신애 권사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재물과 재산을 다 팔아 북한선교회에 다 기증하고,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또 이 이야기에 자극을 받은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 교회는 아파트를 지어 집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임대하는 일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벌써 1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이렇게 우리에게 어떤 자극을 자연스럽게 가져다줍니다. 그 이유는 죽음을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해의 마지막 시기를 맞이하면서 그리고 겨울이란 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 혹은 심판에 대한 의식은 우리의 살아있는 모습에 어떤 영향을 줍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내용이 달라지게 해 주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러한 심판을 염두에 두라는 전제를 미리 깔고 말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사실 그러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마지막을 의식하는 자세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상당히 많은 가르침을 이러한 마지막을 의식한 내용의 말씀과 가르침을 주시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는 이러한 마지막 때의 심판의 내용이 은연중 들어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심판의 현장과 그 내용이 공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판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가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두 가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착하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충성했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착하고 충성되다' 라는 표현을 잘 깨닫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해를 바로 갖게 해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심판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칭찬이었고, 또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이었다. 이런 점에서 착하다는 말은 악하다는 말이 서로 관련이 되고, 충성되다는 말은 게으르다는 말과 서로 관련이 된다고 보겠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내용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착하다는 표현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볼 수 있는 판단기준이고, 충성되다는 표현은 사람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판단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즉, 충성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 없이도 얼마든지 충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연관시키지 않고는 드러낼 수 없는 요소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충성심이나 열심은 "착한 것이냐?" 하는 것에 비추어 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착함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그 충성이나 열심은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수고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방향이 맞아야 그 수고가 바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놈이 도둑질에 충성한다고 하십시다. 충성하는 만큼 문제는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느냐 하는 선함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이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경제 성장을 하였습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경제 성장 과정을 지켜볼 때, 이러한 현실을 조금 느낄 수 있겠습니다. 1960년대에는 경제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있으면 된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공장도 짓고 하여 물건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다음에는 기술이 빈약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외국의 선진 기술을 수입하여 열심히 수고하여 경제의 발전을 꾀했습니다. 이것이 70년대 중반까지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윤리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의 부흥을 이루었던 사람들의 자세나 또 이렇게 무리하게 경제 성장을 하다보니 수많은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이 무시되고, 나아가서는 환경을 비롯한 많은 생태계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드는 경비는 이전의 차관이나 기술이 필요할 때 드는 경비 이상으로 든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부 고속도로를 처음 닦을 때, 1 Km에 1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돈은 상당히 싸게 먹힌 금액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 길의 보수공사로 드는 비용은 몇백 배가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한 뜻보다 인간의 "하면 된다"는 충성으로 몰아붙이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문제점이 자꾸 노출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이민자들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저 일만 열심히 하다보니 삶의 방향성이 상실되는 모순을 겪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으로 해야 할 일들은 해야 하지만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함에 우리의 삶의 방향을 둔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삶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 교육학과 시절 담당 교수였다가, 지금은 연세대학교 교육철학과 교수로 계시는 오인탁 교수님의 글에서 이 달란트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이분은 물론 교육학자의 입장에서 쓰셨지만, 상당히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비유에서 한, 두, 다섯 달란트는 비교개념이 아니라, 절대개념이다. 하나님이 인간 각자에게 주신 신체적, 감성적, 지적, 영적 은사, 소질, 능력과 태어나게 하신 혈통, 가문, 지역, 언어, 문화, 국가는 절대적이다. 여기엔 신(神)의 뜻이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이를 자의적으로 수용하여 상대적으로 보도록 훈련하였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가 받은 것을 상대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대적 시각에서 모든 비극이 싹튼다. 사실, 절대적 개념으로 엄격하게 보면 '열등감'이란 없다. 열등은 다만 감(感)으로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모든 것을 상대화하기 때문에 우열과 석차를 매긴다. 그리고 이러한 풍토에서 세계화 교육의 품목만 인정한다. 그리하여 지역화 교육의 품목들이 결여된, 같음의 지식, 정보, 기술을 가르치며, 같음의 규범과 척도로 평가하는 교육에서 학생은 종교적 인격으로가 아니라, 기능적 경제인으로 양성되어가고 선생은 교육자로서의 꿈을 접고 삯군으로 전락하게 된다.

달란트의 비유가 주는 의미는 너무나 명백하다. 너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이를 절대화하여 갈고 닦으라. 그리하여 너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최적적으로 실현하라. 그리하면 너도 최소한도 두 배 이상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너의 삶은 행복할 것이며, 사회에 이로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네가 거둔 것 위에 너에게 덤을 상으로 더 주실 것이다. 그러나 파묻고 도야(陶冶)하지 않으면, 주신 달란트까지 빼앗으실 것이다.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의 빼앗김이나 상실로 체험되는 이것이 죄요 타락이다.

한 달란트를 가진 자는 처음부터 빼앗기도록 운명지워지진 않았다. 그는 지역적 교육을 받지 않고 세계화 교육을 열심히 받은 결과 그렇게 된 것이다. 영혼의 눈뜸이 없는 교육,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교육이 없는 세계화의 지평에서 출발하고 시도되는 모든 교육은 필연적으로 기능과 도구로,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고 경영의 무대를 뛰어들기 때문에, 상대적이어서 땅에 파묻고 빼앗기고 상실하도록 되고만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행복한 개인이요 유용한 시민이 될 수 잇는 능력이나 복된 가정, 좋은 지역사회와 직장을 이룩하게 하는 공동체적 접착제와 힘은 모두 지역화 교육의 지평에서만 만들어지고 분출되는 것들이다. 지역화의 단단한 기초 위에서 시도되지 않는 세계화는 최종적으로는 한 달란트 가진 자만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시작되고 총체적으로 밀어 부치는 세계화의 정치판에서 정신을 차리고 지역화의 기초를 점검하고 교육을 전반적으로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로에 서 있다."
                                  "세계화와 교육" 교회와 신학 2001년 겨울호(장로회 신학대학교 간행)

달란트의 비유를 교육학의 한 철학적 관점으로 제시하는 말씀입니다만,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공감하는 내용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흔히 "뜬구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 뜬구름 잡는 식의 생활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만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오류인 동시에 폐단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가진 달란트란 바로 나 자신의 고유함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나 스스로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이에 따른 바른 행위로 많은 유익함을 남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심판 받는 재료는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나에게만 고유하게 맡긴 이 나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신 목적에 바로 적합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쓰인 "좋았다"란 말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영어로는 "Good"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빠지지도 말고, 다른 사람을 나와 비교하여 스스로 "우월감"에도 빠지지 않는 자세로 나 스스로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하나님을 의식하며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 스스로를 우리의 삶에서 검토해 볼 수 있는 이 계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마지막 때에 들을 수 있는 또 들어야 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평가를 이 겨울에도 들을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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