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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 (벧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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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대인들이 겪는 큰 곤란 중의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identity)을 묻는 질문에 해답을 못찾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질문은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골치아파합니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밀쳐 두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좋게 표현해서 현실에 충실하게이지, 그냥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입고 큰소리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할 때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확실하지 못하면, 불안과 혼돈의 그늘 아래 삽니다.

요새 light 형제들이 신앙훈련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 맨 첫 장에 보면, 무신론자 버트란트 럿셀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버트란트 럿셀 한 사람의 독단적 견해가 아닙니다. 사실은, 지나간 문화의 역사, 사상의 역사가 무신론적 기반 위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음을 다 보여 주고 다 증명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케 세라 세라’가 되든지 아니면 아니면 ‘찰리 브라운’이 되든지입니다.

‘케 세라 세라’는 스페인말로 직역하면 무엇이 되든지(What will be) 라는 뜻입니다. 1956년에 개봉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The man who knows too Much’라는 영화의 주제가로서 그 영화의 여주인공 도리스 데이(Doris Day)가 불러서 대히트를 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팝송입니다.

(☞ 이 노래 한번 들어볼까요? 노래 가사 show )

우리 나라 노래 중에 비슷한 노래는 ‘살다보면’(권진원) 뭐 어떻게 되겠지...

민중가요 중에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있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이런 노래, 혹은 쨍하고 해뜰날처럼, 막연한 낙관을 노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이 노래를 부른 도리스 데이는 1922년생으로서 고교 재학 중인 16세 때,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나이트클럽의 트럼본 주자와 첫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꿀맛같은 신혼 시절이 지나면서 다정다감하던 남편은 폭군으로 변하여 폭력을 휘두르기 예사였고 강제로 마약까지 먹였습니다. 결국 1년도 안돼 파경으로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닌 뛰어난 세속적 은사(미모, 가창력) 덕택에 그녀는 가수로, 영화배우로 유명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50년대, 60년대에는 미국에서는 이 사람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만큼, 화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얼마전 지난 6월 24일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주는 자유의 대통령 메달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 제정했다가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부활시킨,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입니다. 올해 13명에게 주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놀드 파머, 에스티 로더..., 길버트 크로스베너(지리학자), 아날 파츠(안과의사), 고든 비 힝클리(몰몬교 대관장) 와 함께..

글쎄, 천국에 가면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메달을 줄지

세상에서 주는 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하고 확실히 다릅니다.

예) 요새 일본에서 우리 나라 탤렌트 배용준씨가 많이 떴다고 하지요? 고이즈미 총리가 배용준을 닮고 싶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고 하지요?  고이즈미 총리도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고 그러지만, 참 속 보이지요?

( 더 이야기하면 삼천포로 완전히 빠지니까...)

이 노래는 굉장히 낙관적인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무엇이 되든지 어떻게 되겠지 괜히 지금 염려하지 말아라’ 고민해서 우울하게 살지 말고 기쁘게 살아라. 뭐 이런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유행한 이후, ‘케 세라 세라’라는 말은 50년대, 60년대 세대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적, 정체성 이렇게 딱딱하고 고민스런 주제로부터 도피하는 세대, 그냥 “지금 여기(Here & Now)'의 인생을 사는 인생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하면, 낙관이든 비관이든 도피적인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낙관의 도피를 하는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공허를 떨치지 못합니다. 비관적인 도피를 하는 사람은 ‘서른 즈음에’ 우울을 떨치지 못합니다.

낙관의 노래이든 비관의 노래이든 ‘케 세라 세라’ 막가는 인생, 막가는 세상이 된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쟈크 엘룰이라는 신학자는 이 막가는 세상의 모습을 서슴없이 ‘미친 세상’이라고 규정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친 세상을 치유하는 대안이 있다면 그것인 미친 사람이다’고 궤변적 선포를 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미친 세상이 아니라, 예수에 미친 사람, 새빨간 공산당이 아니라 새빨간 예수쟁이가 이 미친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구조대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예수에 미쳐 보십시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모습은 찰리 브라운형 인간입니다.

찰리 브라운은 2000년에 작고한 찰스 슐츠(Charles Schultz) 라는 만화 작가가 1959년부터 1999년까지 미국의 한 신문에 매일 기고한 ‘피넛츠(Peanuts)’라는 만화의 주인공입니다. 여러분도 한 두 번은 이마에 용수철 머리 하나 달고 나오는 찰리 브라운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 찰리 브라운 만화 보여주기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는 고금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분석하여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 이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이것저것 고민하거나 끝까지 파고드는 타입은 햄릿형입니다. 행동의 근저에 있는 것이 낙관주의이고 꿈이며 낭만이긴 하지만,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이리저리 따져보기보다는 일단 행동이 앞서는 타입은  돈키호테형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느 타입의 인간인 것같습니까? 우리 주위 사람들을 보아도 크게는 이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뉘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는 햄릿도 아니고 돈키호테도 아니고 햄키호테인데요?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찰리 브라운형 인간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햄릿형이나 돈키호테형으로 분류하기 애매모흐한 사람들, 찰리 브라운형의 인간이 정말로 많이 있습니다.

찰리 브라운의 특징은 우유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야구를 해도 럭비공을 차도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연을 날리면 항상 나무에 걸리고 돌멩이를 차면 개를 맞혀서 성난 개로부터 도망가야 하고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라든지 기지에 찬 대화를 제 때에 하지 못하고 꼭 지나간 다음에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마음속 깊이 좋아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확실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고 정말이지 우유부단(wishywashy)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물을 흑백으로 가를 줄 모릅니다.

찰리의 여자친구 루시는 이런 그에게 항상 화를 냅니다. 일출과 일몰 중 어느 쪽이 더 좋냐는 질문을 하면, 찰리 브라운은 그 어느 쪽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이에 낮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바로 그 낮과 같은 중간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찰리 브라운형의 인간을 이해하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페퍼민트 패티는 찰리 브라운을 좋아하는 여자아이입니다. 페퍼민트 페티는, 찰리 브라운이 헤어진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는 ‘빨간 머리 소녀’를 잊지 못하고 항상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페티 : “너는 도무지 과거 속에서만 살고 있어. 그게 걱정이야.”

찰리 : “어쩌면 난 미래 속에 살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 미래라고 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희망’ 이라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너무도 우유부단해서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패티 :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항상 과거 속에서 사는 게 싫어. 물론 미래 속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모두들 그러듯이 진실이라고 하는 건 그(과거와 미래의) 중간 어디 쯤에 있는 걸지도 몰라.”

찰리 : “진실이라고 하는 건 말이지, 나하고 똑같이 우유부단한 녀석일 거야!(The truth is just as wishywashy as I am!) ”

진실은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찰리 브라운형의 현대인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무신론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대표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찰리 브라운의 작가, 찰스 슐츠가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찰리 브라운 전집을 묶어서 내자고 출판사에서 여러번 제안을 했는데, 낼까 말까 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아내가 작년에 전집을 냈습니다.

우유부단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학창 시절에 시험보다가 답을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찍지요? 그런데 일찌감치부터 찍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참동안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가 끝나는 시간이 다 되면 찍습니다. 손톱 물어뜯고 머리를 쥐어짜고 한숨을 내쉬고 하다가 끝나는 시간이 다되면, ‘에라 모르겠다’ 마구 찍고 나옵니다.

가끔 용감하게 일찍 찍고 당당하게 답안지 제출하고 나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이 모른다고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정체성에 우유부단을 보이는 것은 인생의 해답을 모르기 때문에 보이는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은 우유부단하지 않고 분명한 삶을 삽니다.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했다가 1945년 4월에 총살로 죽은, 독일 고백교회 목사였던 디이트리히 본회퍼, 그는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사람을 죽이는 암살단에 가입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의 운전사가 미쳤다면, 우리는 그 운전사를 완력으로 밀쳐서라도 버스를 정지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삶에서뿐만이 아니라 죽음에서도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 직감적으로 생을 마감할 날임을 알았을 때, 그는 당당히 일어서서 감옥의 동지들에게 인사하였습니다. “동지들, 이제는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준 우정에 감사합니다. 새 날이 되면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를 하고 뚜벅뚜벅 걸어나갔습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특징을 세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구별성(extraordinariness), 은둔성(hiddenness)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료성(Distinctiveness), 태도와 행동이 분명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케 세라 세라 식으로나 우유부단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기에 막가파의 모습과 우물쭈물파의 모습을 떨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존재의 목적을 분명히 알기에 그 인생을 될대로 되라 식이나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정체성이 명확한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삶을 삽니다.

확실한 것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은 분명한 삶을 사는 자가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정체성의 상실은 교회 안에서도 적지 않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처럼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 사회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정체성의 상실이 쉽게 발생합니다.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않아도, 기독교 문화에 젖어서 얼마든지 자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고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로, 좋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로 자신의 신앙도, 인생도 좋은 것인양 착각하며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재의 벽 앞에서 드러납니다. 군중 속에 있을 때면 못느꼈던, 내 자신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이 혼자 있을 때면, 어둠 깔리듯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또다시 유행하는 다른 시도들을 찾습니다. 불안하니까...

왜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정체성의 실종 현상이 나타납니까? 교회 안에서도 이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잘 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신학자 안셀름의 이야기처럼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의 마음은, 생명인지라, 필연적으로 이해를 추구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이유와 소망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마음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기로 하였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것 외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정체성의 혼돈 가운데 찰리 브라운처럼 우유부단형 인간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예) 제 이야기 하나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작은 어머님이 두 분이 있습니다. 설재 어머님은 막내 작은 어머님이고 구의동에 사셔서 구의동 작은 어머님, 잠실로 이사가니까 잠실 작은 어머님 이렇게 부릅니다.

이분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이분의 은혜를 좀 입었습니다. 학기 중에는 기숙사에 있어도 방학 중에는 있을 곳이 없어서 이분 집에 머물곤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이분이 카톨릭 신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앙경력에 대하여 제가 한번 물어봤습니다. 결혼해서 전농동에서 사셨는데 처음에는 교회에 갔었습니다.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었는데, 이분 표현 그대로 하면, “헌금하라는 소리에 질려서 영 가고 싶지 않더라.. 그런데 성당에 갔더니 헌금하라는 소리 일체 안하고 그렇게 좋더라~”

이와 비슷한 경험의 분들이 많은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신앙과 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가 있을 때 하고...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어느 방학 때, 이 분이 저에게 책을 하나 주셨습니다. “덕재야 이 책 한번 읽어봐라 참 좋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책의 제목이 이러했습니다.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박도식 신부가 쓴 카톨릭 입문서입니다.

물론 당신은 저를 사랑하셔서 당신 소망대로 제가 카톨릭 신자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같습니다.

지금도 인사드리러 가면, 간혹 “니가 목사가 되지 않고 신부가 되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유혹(?)하십니다.

그 책의 제목처럼, 여러분은 무엇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까?

성경의 두 말씀을 찾아 읽고서 오늘 설교를 맺겠습니다.

<요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늘 이 말씀에서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되리라는 약속은 안믿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1절>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하였듯이,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그리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초자연적인 역사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한 이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이해를 추구하라, 네가 믿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라는 초청, 약속입니다.

심령이 자유를 경험하는 것은 진리를 깨우쳤을 때 누려집니다. 진리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네 자신을 알라”의 질문. 진리가 뭡니까?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이해를 깨우치고 그 말씀을 받고 따르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또 하나의 말씀은 <벧전3;15>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유와 소망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록 명확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동치 않고 세상이 주는 고난 가운데서도 당당히 승리하며 선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예수쟁이의 정체가 뭐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하나씩 하나씩 밝혀가는 시간을 올 여름의 설교시간에 갖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삶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이지만 인간으로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누리며 만끽하며 살고 싶은 소망 때문입니다. 세상을 승리하는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는 교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제들을 보고자 합니다. ☞ 자료 제시

이번 여름은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보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자아 발견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을 위하여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가치와 행복의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나는 정말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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