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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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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지 목사(목양교회)

2004년의 새로운 반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004년의 반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04년의 하반기, 주님이 지켜주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교회적으로, 눈을 들어 사방을 볼 때 무리가 모여오는 일이 이뤄지는 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재림에 대한 교훈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라는 말을 유난히 자주 쓰고 있습니다.
1절도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8절도 “사랑하는 자들아”라도 시작됩니다.
14절도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베드로후서의 끝인 17절도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성도들이 이 말을 중요하게 여기고 귀에 담고 이대로 살기 바라는 베드로 사도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13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2004년의 새로운 반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성경의 다른 곳들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 성시교독 순서에 이사야 65장의 말씀을 교독했는데 그 곳에도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65:17)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오늘은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인가?’ ‘이 말은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성도들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의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아까 교회 밖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고 했습니다.

항해가이며 탐험가인 콜럼부스(Columbus 1451~1506)는 새 대륙, 새 땅을 발견하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며 항해하여 마침내 1592년 10월 12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새 땅은 금이 많이 나는 곳, 동양을 의미했습니다.

청교도들도 새 땅,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유럽을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새 땅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대신 고생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같은 새 땅 아메리카 대륙이라도 그 의미는 아주 달랐습니다.

독립선언서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독립선언서 뒷부분에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신천지’라는 한자말을 풀면 그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독립선언서에서 이 말이 나오는 부분을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來)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역사에 투사하기 시(始)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내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동빙한설에 호흡을 폐칩한 것이 피일시의 세라 하면, 화풍난양에 기맥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의 세니, 천지의 복운에 제(際)하고 세계의 변조를 승(乘)한 오인은 아모 주저할 것 없으며 아모 기탄할 것 없도다.

여기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두 말할 것 없이 독립된 조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의의 시대, 인도적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 새로운 문명의 빛이 비치는 시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새 봄바람이 부는 시대였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가 독립된지도 반세기가 넘었는데 과연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졌는지, 도의의 시대가 되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새 성전이 작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경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곳인지를 간단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의가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13절을 다시 보세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바라는, 또 바라보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의가 있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영어 성경들 가운데 New International Version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줄여서 NIV 성경이라고 하는데 1973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성경인데 NIV 성경은 오늘 본문을 번역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아예 “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으로 13절을 보면

But in  keeping with his promis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home of righteousness

입니다.

의는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의라는 말은 믿음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은 이에 대해

  아브람이 이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의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믿음이 있는 곳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억지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또는 몰래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가치관, 사고방식, 삶의 형태가 온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의는 바르게 살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른 삶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거짓이 없고 사기나 횡령도 없습니다.
폭력도 없고 억울한 죽음도 없습니다. 부정식품 같은 곳도 없는 곳입니다.

아모스는 아모스서 5장 24절에서

  오직 공법을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은 정말 정의의 강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아야합니다.

조금 전에 이사야서 65장 17절의 말씀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사야서 66장 22절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서의 뒷부분은 귀환 시대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귀환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그와 같은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은 소망을 주는 말씀이었고 힘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은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혹한 박해에 시달리고 있는 당시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소망을 새롭게 해주고 믿음을 지키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재림의 소망은 심한 박해 가운데에서도 초대교회를 존속시키고 부흥시킨 가장 큰 비결이었습니다.

심인곤(沈仁坤)이라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십 여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를 지낸 분으로서 청교도 시인인 밀턴 강의로 유명한 분입니다.
저희 교회 원로목사님인 김찬국 목사님과 김동길 교수가 이 분에게서 배웠는데 이 분들은 가장 존경하는 은사로 심인곤 장로님을 꼽고 있습니다.
심인곤 장로님은 일제 시대에 평안북도 선천에 있는 신성학교의 교사를 했습니다.
일본 당국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나는 신앙인으로서 신사에 절할 수 없다.’라고 거부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파면이 되었는데 그 다음날부터 학교 앞에서 신기료 장수를 했습니다.
헌 신을 기워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신기료 장수라고 하지요.
학생들이 등교하고 또 하교를 할 때 그 분을 보고 ‘아, 저 분이 어제까지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해서 파면을 당하고 저 일을 하시는구나! 신앙양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배웠습니다.
심인곤 장로님은 교사로서 교단에 서 있을 때보다 신기료 장수로서 교문 앞에 앉아서 더 많은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정년퇴직을 하고 천안의 광덕이라는 곳에 은거해 계셨는데 김찬국 목사님과 김동길 교수님이 찾아가서 이 분이 가지고 있던 원고들을 가져다가 책을 한 권 냈습니다.
1981년 6월에 나왔는데 그 책의 제목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책에는 참 감동적인 글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감동을 받은 책,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 책꽂이 한 칸에 따로 모아 놓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은 거기에 꽂혀 있습니다.
「순복음」이라는 잡지에서 1981년 10월 호에 ‘이 가을에 권하고 싶은 책들’이라는 특집을 꾸몄는데 저는 그 때 이 책을 권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을 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는지 그 책 안에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여러 글을 모아놓았으면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글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하는 일이 많은데 이 책 안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글도 없습니다.
누가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는지, 심인곤 장로님 자신인지, 아니면 김찬국 목사님이나 김동길 교수님인지, 아니면 출판업자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심인곤 장로님 자신이 정한 것이라면 ‘나는 팔십 평생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서 살아왔습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일제 시대의 어려움도 이길 수 있었고 그 소망을 가지고 해방 후 공산정권의 가혹한 통치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6·25의 혼란과 그 뒤의 어지러운 사회 가운데에서도 신앙인으로서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도 그렇게 하십시오.’라는 뜻일 것입니다.

만일 다른 분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면 ‘이 원고들을 잘 읽어보니 이 분의 생각을 요약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지금 우리의 형편도 매우 어렵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렵습니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념적인 혼란입니다.
정말 어쩌다가 우리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이 사회주의를 포기했을 때 대단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에 모스크바 대학의 총장인가 부총장인가가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한 강연에서 대단히 침통한 어조로 조국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말하고 ‘누구든지 소련에 소망을 주는 사람이 소련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 말은 우리 나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어기시는 것, 보신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품고 살면서 이 소망을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이 말이 우리가 2004년도 하반기를 살아가는데 등대 역할을 하게 되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여름이 되어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여행은 준비를 잘 해야지 소득이 많은 법입니다.

한 여행 가이드가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여행 온 외국인들을 안내하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자기보다도 아는 것이 더 많더랍니다. 석굴암에 가면 ‘이 석굴암은 몇 년에 누가 만들었고 어떤 문제가 있어서 어떻게 수리를 했고…’ 줄줄 외우더랍니다. 놀라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하니까 ‘나는 일 년 전부터 이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일 년 동안 한국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하더랍니다. 

여행은 준비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즐거움을 그 때부터 미리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준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즐거움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의롭게 살기 위해, 그러니까 믿음으로 살기 위해, 바르게 살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작은 일에 이렇게 살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의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여러 한글 번역들 가운데 「현대인의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은 13절을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의만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정의만이 있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 맞는 사람으로서 의를 구하면서, 다시 말씀드려 의롭게 살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찬송가 265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7월은 청소년의 달인데 이 찬송은 영국의 니콜(Nichol) 목사님이 청소년들을 위해서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은 표현이 단순하고 젊은 기백이 넘치고 있습니다
니콜 목사님은 교회학교를 위한 찬송가를 많이 지은 분입니다.
원래는 젊은이들이 선교를 많이 하기를 바라면서 지은 찬송입니다.

여러분, 이 찬송가 가사 그대로  옳은 길, 의의 길을 따르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승리의 주님,  길과 진리요 참 생명이시며 화평 왕이시며 참 사랑이신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우리가 사는 이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됩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원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조금 전에 부른 찬송의 후렴에도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했지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의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품고 이 땅의 여러 문제들을 이기며, 오늘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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