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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마라라 칭하라 (룻 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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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서울영천교회)

  우리 정부가 출범하고 1년 반 동안 TV에서는 대통령을 위시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그 토론회 때 그렇게 자신 있게 주장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자주외교, 자주국방이었습니다. 참여정부의 외교중심이 자주외교, 자주국방입니다. 그런데 김선일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큰소리쳤던 수많은 토론회의 메아리들이 이렇게 결정적인 사건에서 맥을 못 추고 있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결정적일 때 무엇인가 실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제대로 일한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게 외교안보팀을 만들고, 토론을 하고, 큰소리를 치고, 공약을 했지만 우리는 김선일씨 사건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실력

  외교부는 세 가지 거짓말을 했다고 질타를 합니다. 첫째, 국민을 속였다. 둘째, 언론을 속였다. 셋째, 대통령까지 속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별일 없을 때는 다 큰소리치고 잘 할 것 같지만 결정적인 일에 부딪힐 때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결정적일 때의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결정적인 사명을 요구할 때 우리 믿음은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기도, 찬송을 잘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우리 믿음이 하나님의 생명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다 무너지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도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속입니다. 왜 외교부가 이렇게 거짓말을 합니까? 실력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부족하면 하나님을 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부실하면 교회를 속입니다. 목사를 속입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마음을 읽는 믿음의 눈이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회를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들려줍니다.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기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것을 일일이 다 열거를 하지 못하지만, 여러분이 목사의 마음을 읽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상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무리 알려 해도 모릅니다. 대통령을 속이면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안타까운 사건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각성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결정적일 때 제대로 하는 일이 있는가?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 모두가 아주 비참해집니다.

  마라의 귀향길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은 이민을 가서 실패자로 고향에 돌아옵니다. 이들은 이민 떠날 때는 돈 벌러 간 것이 아닙니다. 요즘 말로 하면 웰빙 이민입니다. 풍족하게 가지고 나갔습니다. 흉년이 들어 굶어죽은 이웃을 버려두고 그들은 풍족하게 가지고 모압 땅으로 웰빙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나 10년 만에 재산 잃고, 남편 잃고, 두 아들을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젊은 과부 며느리 하나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실패자의 길입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이가 나오미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반기는 말입니다. 나오미를 반겨주는 고향사람들의 환영의 인사를 듣고 나오미가 답하기를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칭하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이고, 마라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여, 나를 기쁨이라 부르지 말라. 나는 기쁨을 잃은 여인이다. 나를 마라라 부르라. 나는 고통의 여인이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슬픔의 여인이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 내가 징벌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을 직설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고통을 준 것처럼 보여 지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오미의 말에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했다는 직설적인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고,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 수 밖에 없다.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라를 내가 극복해야 된다는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시모에게 재산이 있습니까? 무슨 기대를 가지고 젊은 룻이 이국땅 시모의 친정으로 따라온다는 것입니까? 룻도 나오미를 따라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를 보고 세 번이나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며느리를 위해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룻이 따라온 것은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믿음입니다. 나오미도 지금 재산 잃고 다 잃었지만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나오미의 가슴속에는 여호와를 붙잡은 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룻은 마라의 여인으로 돌아왔지만 그 중심에는 그 마라를 붙잡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마라를 극복하는 여호와를 붙잡고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미국은 서부와 동부를 나뉘어져 있습니다. 서부는 대부분 사막지대입니다. 교민이 많이 사는 LA는 35.6㎜가 1년 강수량입니다. 제가 LA에 한 달 정도 머물러 본 경험이 있는데 LA에서 비가 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어렵고, 뉴스에 비 온다는 소식을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지난 번에 서울에 온 비가 96㎜입니다. 동부는 1년에 평균 1000㎜의 비가 옵니다. 그러나 서부는 거의 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1년에 1260㎜의 강수량입니다. 제가 동부에서는 10개월 살았는데 동부에는 가끔 단수조치가 일어납니다. 가뭄 때문에 물이 귀하다고 잔디밭에 물을 주지 말라는 뉴스가 나옵니다. 또 세차를 자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부에는 그런 조치가 없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서부에서는 물 걱정을 하지 않는 곳이 미국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후브 댐을 비롯해서 곳곳마다 서부 사막지역에는 훌륭한 댐이 건설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부는 비가 많이 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댐이 서부만큼 건설되어 있지 않습니다. 댐이 완벽하기 때문에 서부는 물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후브 댐은 기적을 이룬 댐입니다. 거대한 바다입니다. 캘리포니아 남부를 전부 커버하는 그런 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길이 그렇지 않습니까? 김선일씨도 1년 전에는 포부와 희망을 안고 이라크에 갔습니다. 그래도 외국관계 무역회사의 통역관으로 기대를 안고, 선교사의 비전을 안고 인천공항을 떠날 때 환송을 받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누가 실패하고 싶어 하며 누가 불행하고 싶어 합니까? 웃으며 떠났던 길이 슬픔의 눈물의 길이 되는 일이 우리 인생살이에 흔히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미국 서부의 가뭄을 이기는 댐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게도 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오미와 룻이 그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리사랑의 모범

  시모 나오미는 룻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라오는 이 젊은 며느리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했었는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이 보아스는 보통 남자가 아닙니다. 그 지방의 유력한 자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남자입니다. 부와 인품과 덕망을 갖춘 지역에서 유력한 사람입니다. 이 보아스가 룻을 맞이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룻은 가장 훌륭한 남자를 남편으로 얻었습니다. 그리고 부를 얻었습니다. 남편이 갖고 있는 그 부를 함께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습니다. 룻의 마라는 다 회복되었습니다. 잃어 버렸던 남편을 얻었습니다. 그 찌든 가난을 극복하고 부를 얻었습니다. 아들이 없다는 설움을 극복하고 이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내리사랑만 사랑이 아닙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내리사랑이라 합니다. 나오미가 룻을 사랑하는 것은 내리사랑입니다. 유력한 보아스가 불쌍한 룻을 사랑하는 것도 내리사랑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탐낼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늙은 시모를 모신 여자, 이방여자, 룻에게 책임을 져야 할 친족은 룻을 버렸습니다. 친족이 버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보아스에게는 대단한 희생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유력함을 가지고 룻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사랑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연령을 따지고, 지위를 따지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룻이 우리 앞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룻이 이렇게 부귀영광을 얻는 동안 나오미는 더 초라한 길로 갔습니다. 그래도 자기 옆에 있던 젊은 며느리 룻이 이삭을 주워 봉양을 하고 자기를 받들어 줄 때는 나오미가 그래도 괜찮았는데 룻마저 결혼하여 나오미 곁을 떠났습니다. 나오미는 늙었고 홀로 남았습니다. 여러분 늙고 홀로 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 인생의 길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공한 룻은 늙고 힘이 없는 나오미를 잊지 않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룻은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아들을 가지고 시모 나오미에게 가서 그 아들을 맡겼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세태에 젊은 자녀들이 아기를 키워 달라고 짐을 맡기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룻이 아들을 낳아서 시모에게 가져가서 양육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런 양육의 짐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당신의 대를 이을 아들입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의 아이입니다. 어머니의 대를 이을 선물입니다. 어머니 받으십시오.’ 자기가 독차지할 그 아들을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리사랑입니다.

  내리사랑은 은혜를 받은 자가 은혜를 받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룻은 지위가 어머니보다 높은 것이 아닙니다. 천지개벽이 되어도 며느리가 시모보다 자리가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은혜 받은 자가 은혜 받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내리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마라도 극복이 됩니다. 고통의 여인 나오미도 이제는 자기 아들의 대를 잇는 아이를 보고 즐거워하며 기뻐 뛰었습니다. 이 고통의 여인 나오미가 룻의 내리사랑을 통해서 성공한 며느리가 그 불쌍한 시모를 향하여 베푸는 그 사랑에 의해서 두 여인의 마라는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구원역사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의 특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산 채로 하늘나라 들림을 받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에녹을 너무 편애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에녹이 무엇을 했다고 편애합니까? 성경에 보니까 무드셀라를 낳음으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무드셀라를 낳았습니다. 무드셀라라는 아들의 이름을 분명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시적입니다. 뜻이 있는 것입니다. 무드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자녀를 믿음으로 잘 키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옮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을 남겼는데 옮기 우기 전에 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물놀이 하고 산놀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300년을 지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에녹은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는 감각을 가지게 됩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관찰해 보면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았고 무드셀라가 라멕을 낳았고 라멕이 노아를 낳았습니다. 여러분, 노아는 그 당대의 의인입니다. 홍수심판을 극복한 믿음의 사람이 노아입니다. 그런데 이 노아가 하루아침에 태어난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았고 이 무드셀라를 300년 동안 믿음으로 잘 키워서 그 아들을 통해 라멕을 낳고 라멕을 통해서 노아를 낳았습니다. 즉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 믿음이 노아에게까지 생명의 역사로 이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무드셀라는 오래 산 사람입니다. 손자를 낳았을 때 무드셀라는 아주 기운이 정정했습니다. 노아가 자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노아에게 자기 아버지 에녹으로부터 받은 믿음을 노아에게 그대로 전수해 주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노아가 할아버지 아래에 600년 동안 있었습니다. 노아 나이가 600세 될 때 무드셀라가 그 해 죽었는데 그 해에 홍수가 났습니다. 600년 동안 손자를 믿음으로 길러놓고 ‘이만하면 너도 홍수를 극복할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라는 그 시기에 무드셀라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여러분, 알고 보면 노아는 에녹의 믿음의 산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입니다. 에녹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노아라는 인재가 역사 속에 보내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베풀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받았기 때문에 베풀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의 사랑을 입은 자 같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의 사랑, 룻의 사랑, 보아스의 사랑은 전부 내리사랑입니다. 나오미는 시모로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며느리 룻은 자기가 성공한 자리에서 불쌍한 시모를 사랑했습니다. 유력한 보아스는 불쌍한 이방 여인 룻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전부 은혜 받은 자가 베푼 사랑이고 가진 자가 베푼 사랑입니다. 이 사랑 속에 생명의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룻이 낳은 그 아들이 오벳입니다. 오벳이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은 것입니다. 다윗은 하루아침에 태어난 인물이 아닙니다. 그 할머니 룻의 믿음이 다윗에게까지 전수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룻이라는 이 여인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을 베푸는 거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이라는 위대한 인재를 역사 속에 보내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받았기에 베풀어야

  여러분들은 사랑을 받으셨나요? 베푸십시오. 은혜를 받았으면 베풀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힘이 있습니까? 힘이 없는 자를 향하여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물질이 있습니까? 없는 자를 향하여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리사랑으로 베풀 줄 아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이 역사 속에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빗물이 이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강으로 가고 그대로 바다로 가지 않습니다. 어떤 빗물은 땅에 스며들고, 어떤 빗물은 나무의 뿌리에 수분이 되고, 골짜기를 흐르다가 빗물이 필요한 곳에 소모되고, 남는 것은 흐르다가 결국은 강으로 갑니다. 그것도 댐에 갇혀서 어떤 물은 수돗물이 되고, 어떤 물은 농사짓는 물이 되고, 어떤 물은 공업용수가 되고, 그래도 남는 것은 흘러서 바다로 갑니다. 이것이 물이 흐르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이것이 내가 독점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베풀고 베풀고 베풀어도 내게 아멘 하는 은혜는 그대로 남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내가 패가망신 하고, 내가 무너지고, 여러분이 물질을 베푼다고 여러분의 사업이 망하고, 집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베풀어서 망합니까? 망하지 않습니다. 베풀고 베풀어도 더 풍성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 가운데 일어납니다. 베풀고 베풀어도 스며들고 스며들어도 바다로 들어가는 물이 남듯이 우리가 받은 축복은 베풀고 베풀어도 내 생애에 누리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요즘 제가 바깥에 모임을 자주 가기 때문에 귀찮을 정도로 받는 인사가 있습니다. “예배당 짓는다고 수고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아마 우리 장로님들도 이런 소리를 많이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지어 본 목사님과 지어보지 않은 목사님의 인사가 다릅니다. 성전을 지어 본 목사님이 많은데 그 분들의 인사말은 주로 이렇습니다. “목사님, 참 수고하십니다.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다 공통적인 짐 아닙니까? 어려움 아닙니까?” “목사님 예배당도 40대에 지어야지 60이 다 되어서 뭐하려고 짓습니까? 그대로 살다가 은퇴하면 되는데...” 아주 실리적인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분은 “목사님, 제가 경험해보니 성전을 한번 지어보지 않고는 목회의 본질을 모르겠습디다. 목사님 그래도 행복합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염려마시고 목사님 용기 내십시오.” 요즘 그런 인사를 받습니다.

  여러분, 2004년도 우리는 마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성전기공할 때 얼마나 정신적으로 어려웠습니까? 경제적으로 무거운 마라를 지고 지금 2004년도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마라를 통과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마라는 주님이 올 때까지 우리 안에 머무는 마라가 아닙니다. 성전건축을 위해서는 모든 교회가 건너가는 마라입니다. 아주 큰일을 했던 목사님의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가 성전건축하고 있는 것은 사치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 계엄령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계엄령을 내려놓고 성전 건축한 교회가 많습니다. 그만큼 마라를 통과했던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만 지는 짐이 아닙니다. 이 마라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걸만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하면 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사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마라는 허락지 아니할 줄 믿습니다. 마라를 안고 베들레헴에 왔던 나오미와 룻이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고향 사람들이 보지 못한 숨어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내 고통을 거두어 주실 수 있는 여호와로 믿고 내리사랑을 베푼다면, 받은 은혜를 베풀 줄 안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4대를 통해 노아를 허락하고 다윗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오늘 성전건축의 마라의 짐은 무겁지만 우리 후대에게 베풀어 주실 우리 앞날에 허락하실 10년, 20년 후 우리의 후손에게 허락하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기대한다면 이것은 얼마든지 지고 갈 수 있는 행복한 사명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면 노아는 이 땅에 탄생하지 않습니다. 룻이 욕심을 부리고 시어머니를 구박하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베풀 줄 몰랐다면 다윗은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의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베푸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미래와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민족의 미래는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여호와를 경외하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라는 우리 인생에게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길입니다. 그러나 마라를 극복하는 길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숨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댐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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