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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육과 먼 시선 (창 1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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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서울영천교회)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설정하고 살아갑니다. 내일 혹은 언젠가 내가 할 일, 또 우리 자녀들의 공부에 관한 일정, 특히 결혼을 정하고 준비해가는 일정 등 기타 모든 면에 사람들은 미래를 설정하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미래가 자기의 욕망을 이루는 대체용어가 되면 안됩니다. 성도들이 가지는 미래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입니다.

  미래의 약속과 오늘의 응답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몇 년 후에 약속을 합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고 4백년 후에 될 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네 자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애굽에 가서 종살이 할 것이라는 것인데 4대 만에, 4백년 후에 너희들이 그 땅에서 나올 것이라는 이 언약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아주 먼 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13절에는 “4백년 만에” 16절에는 “4대 째” 이렇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4백년을 보는 시선, 그것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합니다.

  그런데 4백년이라는 이 시간은 그냥 4백년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4백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매일매일 네 생활이 4백년의 언약과 관계가 있도록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매일매일 너는 4백년을 잊어버리지 말고, 4백년의 언약과 함께 의미 있게 살아가라는 언약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면에서 매우 근시안적입니다. 눈앞만 봅니다.

  요즘 정신과 의사들이 말하는 현대인들에게 제일 많이 있는 질환증세는 자애증과 자학증이라고 합니다. 자애증, 즉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병이 되도록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게 합니다.  자애증에 걸린 사람이 성형수술을 많이 한답니다. 그냥 맨 정신으로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지나치게 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벌써 선을 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학증은 자기를 학대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자애증이나 자학증은 자기만 보는 것입니다. 자기만 집착하고 자기 눈앞만 보는 이런 것들은 위험한 일들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멀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집에 암탉이 한 마리 있었는데 이 암탉이 옆집에서 울고 나오는 것입니다. 달걀을 옆집에 낳은 것입니다. “우리 닭이 나은 거니까 이것은 우리 것이다” “그럴 수 있느냐 우리 집에도 암탉이 있는데 이게 우리 집 암탉이 낳은 것인 줄 누가 아느냐” 그래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애가 “우리 집 암탉이 옆집에서 울고 나온 것을 내가 봤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집에서 “애 말을 어떻게 믿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달걀 하나 때문에 대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달걀을 빼았겼습니다. 못 찾아 왔습니다. 그 달걀 하나 때문에 분통이 터져서 성을 못 삭여서 그만 옆집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마침 바람이 자기 집으로 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도 타 버렸습니다. 그 달걀 하나 때문에 집을 두 채를 날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 현실에 많이 일어나는 사태들을 풍자한 것입니다. 조금 앞을 보면 문제가 안 되는데 전혀 앞을 생각지 아니하고 거기에만 집착하다가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전거를 배울 때 앞바퀴를 보면 자꾸 넘어집니다. 앞바퀴가 안 보이도록 조금 앞을 보아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앞바퀴를 자꾸 보면 자꾸 넘어집니다. 조금 멀리 보고 타야 잘 됩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삶이 먼 시선과 연관을 가져야 됩니다. 멀리 보아야 언제나 정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보입니다. 소망은 가까이 있지 않습니다. 멀리 보는 자에게 소망이 붙잡힙니다. 또 용기를 얻습니다. 돌파하는 힘을 얻습니다. 자기 야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비전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보는 사람은 오늘의 작은 일부터 충성합니다. 진실합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정확한 구원역사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언약이 모세에게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음이 모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4대라는게 그것입니다. 이삭, 야곱, 요셉, 그 이후 세대가 모세인데 이 4백년이라는 것도 거의 맞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149세까지 살았습니다. 몇 년입니까? 아브라함 100세에 이 언약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그 해에 하나님께 이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4백년을 계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100세에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가 거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원래 연대를 계산할 때 영적인 계산은 수치를 그렇게 따지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 하면 아브라함 전 생애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몇 살까지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생애부터 야곱이 죽은 그 해까지만 계산을 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 육십세에 야곱을 낳았는데 야곱이 147세까지 살았습니다. 합하면 몇 년입니까? 왜 저가 이삭이 육십세에 야곱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하느냐면 육십이라는 시간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몇 살에 죽었느냐 이것은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죽은 그 안에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산 사람은 세 사람 중 야곱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147세에 죽었다 하는 것을 계산해야 됩니다. 그러면 307년이 나옵니다. 모세가 나서 애굽 바로왕 앞에 섰을 때 나이가 80세입니다. 그 어간을 계산하면 연대상으로 4백년이라는 계산이 맞습니다. 그리고 4대 째라는 개념도 맞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게 정확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자라서 결국은 애굽 사람을 죽임으로서 바로왕의 분노를 사게 되고 그 일로 인해서 왕궁을 떠나게 됩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가 좇겨난 것처럼 보입니다. 도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전혀 문제가 다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애굽에 있는 모든 보화보다 더 크게 여겼으니 이는 하늘의 상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믿음으로 모세가 장성했기 때문에 그는 애굽 왕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이 모세를 좇아낸 게 아니라 모세가 애굽의 부귀영광을 버린 것입니다. 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모세가 믿음으로 장성했기 때문에, 모세가 믿음으로 커 있었기 때문에 그는 철이 들어서 보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는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애굽의 부귀영광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부귀영광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좋아했다는 헬라말은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애굽을 버리고 그는 하나님의 길을 택했다는 말입니다. 그 믿음이 모세에게 있었는데 그 모세가 가졌던 믿음이 누구로부터 배운 믿음인가? 그의 생모 요게벳을 통해서 배운 믿음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증언을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1-32절에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이 제일 먼저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서 “바로왕에게 가라,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 네 백성에게로 가서 바로왕 앞에 서서 네 백성을 이끌고 나오라” 하는 명령을 주실 때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를 해야 되는데,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할 때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됩니까?” 그때 하나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렇게 소개하라 하시면서 이어서 또 소개를 합니다. 15절에 “나는 나를 너희에게 보낸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를 해야 됩니다. 이것이 영원한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표호다,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낼 표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를 네 백성에게 소개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라고 하셨는가? 그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그 언약이 4백년 후에 이루어질 언약인데 그 언약을 직접 수종들 사람이 모세입니다. 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소개를 하십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나는 살아 있다, 이삭은 죽었지만 나는 살아 있다. 야곱은 죽었지만 나는 살아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살아 있다, 이삭도 죽었지만 살아 있다, 내가 영원히 살아 있는 한 그들도 영원히 살아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 하늘나라에 먼저 가 계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분들은 죽은 게 아닙니다.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 가 있는 모든 성도는 살아 있습니다. 육신으로 죽었다는 말이지 영적으로 죽은 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산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죽었지만 살아 있고 이삭도 죽었지만 살아 있고 야곱도 죽었지만 살아 있습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그 하나님은 4백년 후의 역사를 함께 언약하시면서 아브라함을 보고 오늘도 네가 믿음으로 걸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안 보이는 먼 시선까지 보고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멀리 봐야 바로 본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가?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고 난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남겼습니까? 업적이 있습니까? 그 당시에 평가받을 만한 업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시적으로 무엇을 남긴 게 없습니다. 그는 가족까지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 죽어 버리면 끝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한 그 복음에 의해서 3백년 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사도를 핍박하던 그 로마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황제부터 세례를 받고 황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받아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었지만 그의 죽음이 3백년 후에 로마를 복음화 하는 일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교회사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런 먼 이야기까지를 해야 되느냐? 바로 그겁니다. ‘아휴 목사님, 한 10년 이야기만 합시다. 3백년, 4백년 이야기를 왜 합니까? 우리 교회의 10년, 20십년 이야기도 힘든데 무슨 3백년, 4백년 이야기를 지금 해야 됩니까?’ 제가 하나 반론을 제기합니다. 우리 앞서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 생각을 가졌더라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참수를 당한 그 바울의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오기까지 약 2천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2천년 후에 우리가 복음을 받고 믿을 것 까지 계획을 다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설계가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서 오늘 나의 신앙생활을 결정짓기 때문에 먼 미래를 반드시 보아야 됩니다. 그것을 확실히 보는 사람일수록 오늘이 더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 한 방울이 땅에 떨어지면 스며들어 버립니다. 물 한 방울이 시궁창에 떨어지면 그 시궁창의 더러운 물과 함께 동화되어 버립니다. 도저히 그 물 한 방울이 자기의 깨끗한 정체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그 물 한 방울이 시궁창에 떨어지면 도리가 없습니다.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믿음의 세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소금 한 덩어리를 말합니다. 온 세상이 전부 소금으로 뒤덮여 있는 그런 소금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온 세상의 빛이 다 밝혀져 있다는 게 아닙니다. 깜깜한 세상의 하나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자연이치는 물 한 방울이 시궁창에 떨어지면 더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은 그 물 한 방울이 더러운 시궁창 전체를 맑은 물로 변화시킨다는 원리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원리입니다. 이게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깨끗한 물 한 방울이 떨어져서 온 시궁창이 맑은 물로 변하는 원리입니다. 그 역할을 해야 되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기대하고 이 땅에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캄캄한 이 세상의 빛이다” “썩어가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함께 썩지 마라, 맛을 내라” “내 등불을 말 아래 두지 말고 등경 위에서 비추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아브라함이, 에녹이, 모세가, 룻이, 나오미가 사도 바울이 다 이 역사 속에 한 방울의 물의 역할로 그 시대를 변화시켰던 하나님의 창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역할은 믿는 자 모두에게 함께 요구하는 역할입니다.

  전도와 교육의 사명

  우리 교회는 제가 부임해서 그 이듬해인가 성전 옆의 집을 사기 위해서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성전건축이라는 이 헌금이 교회에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고 경상비에서 건축비로 1억씩, 많을 때는 1억5천만원을 돌려서 집을 한두 채 사고한 것이 오늘까지 정확하게 사택까지 하면 9채를 샀습니다. 이 9채를 사는데 세월이 13년이 걸렸고 예배당을 짓는데 기본적인 땅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잘한 일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또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런 목회방침이나 교회의 예산정책을 두고 그냥 아멘, 아멘하면서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제 마음에 항상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상비를 가지고 교육에 투자해야 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살림이 그렇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건축은 건축헌금을 가지고 해결하면 그 교회가 재정적으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축헌금만 가지고 모자라기 때문에 경상비에서 떼어 건축을 도와주려 하니까 본 살림도 우리가 지금 찌든 상태입니다. 건축비에 돌리는 그 돈은 사실 경상비에서 나왔다면 그것을 가지고 교회자체에다 투자해야 되는데 우리는 지금 형편이 안 되니까 경상비에서 한 푼이라도 건축비로 떼는 이것은 건축위원회에 우리의 건축을 위한 헌금이 지금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직한 것은 건축헌금으로 건축을 해결해야 우리 교회가 미래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새로 지어 입당을 해도 경상비를 가지고 과감하게 전도비를 쓰고 교육비에 써야 거기에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돈을 돌려 빚 갚는데만 쓰면 교회는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3백만원 벌어 2백만원 빚 갚고 1백만원 가지고 쓰는 집하고, 2백만원 벌어서 2백만원 쓰는 집하고 어느 집이 풍족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생각을 많이 정리해야 됩니다. 그동안은 땅 사고 집 사고 예배당을 위한 준비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해 왔지만 예배당 지어놓고 경상비가 자꾸 건축비로 나가면 뜻이 없습니다. 교회가 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먼 시선을 가져야 됩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이 정도라도 살게 되었고 고급인력이 상당히 배출된 것은 해방이후에 한국동란을 딛고, 그리고 가난했던 5, 60년대를 극복하고 그나마 경제개발을 우리 스타일대로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에 거기에 동반되는 놀라운 교육열이 오늘 한국을 이렇게 받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육이 없는 민족은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 과외비판도 많고 교육에 너무 열성을 부린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교육을 시켜냈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그나마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받은 민족은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인재가 생겨나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 어디에 던져나도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저력이 우리 한국의 교육열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교포들도 보면 1세대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자녀들을 잘 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잘못된 사람도 있지만 우리 부모님들의 그 교육열이 미국에 가서 자녀들만은 잘 키워야 되겠다는 그 일념만으로 희생한 결과 요즘 1.5세대들, 2세대들이 훌륭한 인재들이 되어서 역으로 대한민국에 와서 대한민국의 경재부흥에 지금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교육의 미래입니다.

  교회의 미래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먼 시선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 교회가 향후 10년 동안에 비전이 되어야 되고 거기서 기틀이 나아져서 우리 후손 만대에 이것이 잘 연결되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는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한국교회가 급격하게 몰락할 것이라는 이런 부정적인 진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진단이 일리가 없는 게 아닙니다.

  첫째는 유아, 유치부의 급격한 감소입니다. 유아, 유치부가 감소한다는 것은 향후 1세대 안에 청년부까지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상류가 막히면 시간이 흐르면 하류도 물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앞으로 한 세대 후에 교회교육의 위기가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교회의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감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와 곁들여집니다. 왜 교회가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감퇴하느냐 성과가 없기 때문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입니다. 성과가 없더라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 의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 안에 교육기관의 쇠퇴현상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 성전을 짓고 앞으로 투자를 안 하면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안 됩니다. 지금 일부 교회가 지탱을 해 나갑니다. 그런데 그 교회들은 한결같이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해주면 안 그래도 성과가 미미한데 투자가 없으면 모두가 관심을 잃어버립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손을 놓고 있는 교회도 많고 농어촌 교회는 벌써 손을 다 놓았습니다. 억 단위의 군소교회도 다 손을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쓸만한 학생들은 전부 대도시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교육 하나만 생각해도 상당히 먼 시선을 가져야 됩니다. 오늘만 보시면 안됩니다. 앞으로 한 세대의 교육문제라고 지금 진단을 합니다.

  맺는 말

  우리가 여름행사를 위해서 교육을 위해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교회의 힘이라는 것은 우리가 내는 연보의 한계 안에서 만의 힘입니다. 경상비 안에서 만의 힘입니다. 거기에 우리 개인의 힘도 보태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가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또 힘을 합해야 됩니다. 맡은 자들에게만 두고 볼 구경거리가 아니라 교사가 아니더라도, 내 부서가 아니더라도 우리 교회의 미래를 보는 먼 시선을 가지고 성도 여러분이 여름행사를 지켜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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