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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집의 위험을 막으라 (눅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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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철 목사 (왕십리교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누가복음 11:24-27)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는 미국 교회의 한 보고서 가운데 보면 “오늘날 교인들의 95%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교인들이며 그들의 영적인 상태인 교회생활의 모습은 일종의 'bench warmer'(의자를 따뜻하게 하는 정도의 사람)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의자를 따뜻하게 하고 사라지는 것 외에는 별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교인이 95%나 된다는 지적입니다. 단지 5%의 교인만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성향의 신앙생활이 만연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 23절에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하지 아니하고’,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이 되지 못함을 말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빈집’의 비유로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지 못한 믿음의 위험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서 돌아다니다 보니 고달파 자신이 나온 집으로 되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옛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집이 비어 있음으로 저보다 더욱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새번역) 고 하셨습니다.
비어있는 집은 위험한 집입니다. 바로 그곳은 아주 악한 일곱 귀신의 자리가 될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가 살면 더욱 심하게 나빠지는 것입니다. 일곱 귀신이 노략하고 농락하는 육신과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사는 비참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몸의 빈집의 위험을 막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빈집의 위험을 막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빈집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귀신은 말하기를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귀신은 내 집이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갔을지라도 그 집이 주인 없이 방치된다면 귀신은 또 다시 내 집이라고 주장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유합니다. 우리의 몸에 소유를 나타내는 문패를 반드시 붙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은 예수님의 소유임을 분명히 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육신과 마음과 영혼인 몸의 주인이심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육신과 마음과 영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욕망과 탐욕입니까? 아니면 물질과 명예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상이나 신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귀신은 아닙니까? 도덕적인 수양이나 마음을 비우는 자기극복의 훈련과 깨끗한 삶의 추구이전에, 나의 몸의 주인이 누구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귀신이 내게서 떠나갔을지라도 내가 누구의 소유임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에서 왕 노릇하시는 주인이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못할 때에 악령들은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내 집이라고 주장합니다. 소유가 분명하고 주인이 분명할 때에 귀신은 자기 집이라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으로 확신하고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귀신이 지배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야 할 우리들에게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고전 6:15)고 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 여인을 가리킬 때에 특이한 표현은 누가복음 8장 2절에서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했고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 어 주신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호칭이 따라다닌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그녀의 질병이 아주 심각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삶은 몸을 파는 여인이었기에 문란했고 부도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분열적이고 거칠었습니다. 귀신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앙적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타락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주인은 귀신이었습니다. 여인의 상태는 너무 심각하기에 사람들은 일곱 귀신 들린 마리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녀에게서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살아가는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이 살아졌습니다. 버림받은 여인의 인생이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구원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더러운 여인이 거룩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비난받는 삶에서 존경받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맞이하고 그 소식을 전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적대자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성취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우리의 몸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내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가는 분명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의 주인이라도 그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 문패를 달아놓을 뿐 아니라 문패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살고 계셔야 귀신이 틈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증거는 그리스도의 기쁨과 즐거움과 평강이고 찬송과 감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함께 사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라고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것은 말씀으로 우리의 속 사람을 채우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의 충만함은 물론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도록”(엡3:16)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충만한 성도가 되십시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마산에서 목회 할 때에 어느 집사님의 상점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놈은 값진 물건들을 모두 집어가고는 모든 물건들을 흩어 놓고는 그곳에 대변을 보아놓았습니다. 그 집은 분명히 집사님의 소유입니다. 주인이 있되 장사를 끝내고는 귀가하고 그곳 상점에서 살지 않으니 도둑이 들어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물건을 가져간 것입니다. 자기 집 화장실인 것처럼 상점 한가운데다 대변을 본 것입니다. 도둑이 든 곳에는 혼란과 지저분함이고, 두려움과 아픔이고, 증오와 절망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소유인 우리들의 몸에 주님이 살고 계셔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말씀이 집안에 가득 차야 합니다. 주님의 호흡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과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신 성령이 가득한 집이 되어야 귀신이 틈 볼 수 없고 감히 자기 집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에 문패만 달아놓고 주인이 살지 않는 빈집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집이 비어 있으면 옛 주인이 다시 찾아옵니다.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곱 귀신들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고통스럽고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귀신의 농락에 육신과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 망가지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고 계시는 증거를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태도로 빈집의 위험을 막아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고 와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으므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소제되어 있다는 것은 귀신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수리되어 있다는 원어 ‘케코스메메논(κεκοσμημένον)’은 장식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귀신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잘 꾸며져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자 ‘칼빈’은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었다는 것은 귀신을 받아드리기에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집이 비워 있는 이유는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방치해 두거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죄를 짖지 않는 방법은 죄를 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선을 행하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에서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집을 비어있는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4:25)“고 했습니다. 더러운 말과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더러운 말과 거짓말하지 않으려는 수동적 태도보다는 선한 말을 하고 참된 말을 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에서 더러운 말과 거짓 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고 했습니다. 도적일 하지 않도록 하지 않도록 하는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능동적으로 선한 일에 수고하도록 하는 데서 도적질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에 게으르면 빈집이 됩니다. 무관심과 무책임은 빈집으로 방치하게 합니다.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는 빈집을 빈집으로 있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열심은 빈집의 위험을 막는 것입니다.
안전운전교육을 시키는 어떤 신앙 인이 운전기사들에게 이렇게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운전할 때에 찬송을 부르면서 운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속100-110㎞을 달릴 때에는 ‘너 근심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432장)를 부르고, 시속 120-140㎞으로 달리 때는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364장)‘을 부르시고, 시속 140㎞ 이상으로 달릴 때는 ’주여 이제 옵니다,........나 이제 왔으니...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331장)를 부르십시오.

어느 장로님 가정은 부부싸움을 한 후에 찬송으로 부부싸움을 극복한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남편이 화가 나서 나가면 부인은 애절한 목소리로,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 와’(315장)를 부른답니다. 그러면 밖에 나가 화를 푼 남편이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440장)‘를 부르면서 문을 두드린 답니다. 그러면 부인은 ’어서돌아오오......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317장)를 부르면 다시 화목을 회복한답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의 말씀이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여행을 떠나면서 그의 세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았던 종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잘 활용하여 열 달란트 네 달란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았던 자는 그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주인은 돌아와서 배로 재산을 증식시킨 두 종에게는 기뻐하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고 잔치자리에 함께 참석하게 했지만, 한 달란트 그대로를 내놓은 종에게는 진노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면서 내어쫓았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두 종은 주인의 재산을 증식시켰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빈집을 빈집그대로 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주님 앞에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주님, 저는 도적질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인 일도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교회 출석도 했습니다. 나는 찬송 성경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절대로 주님을 반대하거나 선교사업을 비난한 일도 없습니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이 때에 주님은 이렇게 묻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도덕질 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을지라도 선한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가? 예배에 참여했을지라도 얼마나 예배 중에 주시는 은혜를 나누었는가? 성경책 찬송가 가지고 있을지라도 얼마나 말씀을 읽고 찬양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기도했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했는가? 주의 일에 반대하거나 선교를 반대하지 않았을지라도 얼마나 주의 일에 힘썼고 선교에 힘썼고 선한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
능동적이고 적극 적인 믿음의 삶과 열심은 빈집의 위험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빈집의 역사는 귀신의 역사에 농락 당할 위험에 있습니다. 주님은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빈집의 위험을 극복하는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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