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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생이 되려고 들지 말라 (약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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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그동안 일년 반 이상 우리의 관심에 따른 주제 설교를 해왔고 기대이상의 반응으로 격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금 성경의 본문을 따라가며 오늘 우리의 삶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풀어가는 것은 제게도 쉬운 일이 아닌 동시에 그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도 만만찮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경향이 큽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들으면 어렵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쉽게 느끼는 필요만 아니라 우리가 쉽게 느끼지 못하는 깊은 곳에 자리한 필요도 채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강해설교는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주제설교처럼 대지를 뚜렷이 1, 2, 3, 4 식으로 전개를 하지 않다가 보니 듣다가 다른 생각을 하면 따라잡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해가면서 제가 가능하면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표지판을 세워가면서 하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편에서도 귀를 기울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고 조금 더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이 요구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또 오늘 우리는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비록 제가 맥추감사절에 합당한 본문을 정하진 못했지만 오늘부터 한 동안 중단했던 강해설교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제 본문을 따라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권위가 부정되는 시대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교사의 권위가 어느 때 보다도 실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의 권위가 언제나 짓밟혀온 것은 아닙니다.

특히 신약시대 야고보 선생이 이 편지를 쓰던 때는 달랐습니다. 초대 신앙공동체에서 선생은 매우 존경받는 직책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랍비라고 불리는 선생은 어디서나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의식에 참석해도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사람이 다음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선생은 부모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보면 선생의 위치가 중요시되는 것을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직분 가운데 교사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서 선지자와 교사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세운 직분자를 언급하면서 사도와 선지자 다음에 교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도와 선지자 말고는 가장 존경받는 직책이 교사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사역의 형태가 교사와는 달랐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다니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반면에 교사들은 한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서 거기서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며 그를 잘 가르치는 일, 목양하는 일을 감당하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직책인 만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사는 당시 인기 직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부모들은 아들을 낳으면 ‘우리 아들도 랍비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큼 랍비라는 직책은 존경받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처럼 공채 시험이 있었다면 100:1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고보 선생은 왜 선생이 되려고들 하지 말라고 말했을까요?

1.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말로써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일차적으로 하신 말입니다. 교사의 직무는 주로 말로써 하는 직무입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들이 다 지혜롭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 다른 사람을 세우는 수도 있지만 어떤 이는 넘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되려고들 들지 말아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여름성경학교를 앞두고 시원치 않는 교사들은 그만 두라는 말로나 보조교사로 지원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야고보의 의도는 책임감을 인식하고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호소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주일학교 교사 못 하겠습니다’ ‘성경공부 인도자 노릇 못하겠습니다.’하는 구절로 오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은 전문적인 직책으로서 선생을 향해서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결코 교육의 전문가로서 선생님이 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적으로 임명된 직책의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교훈이 아닙니다. '나는 교사직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나는 이 말씀하고는 거리가 멀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매사에 가르치려 드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전문직으로서 교사뿐 아니라 매사에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 본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다른 이의 허물과 결점은 잘 들추어내고 자기 자신의 허물과 결점은 보지 못하는 우리 모두를 향하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인생의 악습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닌 듯이 내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의 약점을 잡아내는 데는 모두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선생 노릇들을 하지 말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많이 선생이 되려고 날 뛰지 마십시오. 알다시피 선생 된 우리는 더 많이 심판 받을 것입니다’ 남을 향해서 ‘틀렸다’, ‘맞다’, ‘잘못했다’, ‘잘했다’고 끊임없이 판단하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왜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까?

선생노릇 하려고 드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놓고서는 다음 순간에 그 안 되는 것을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죄인입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해 놓고는 자기는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국 자기가 말한 것에 따라서 판단해도 우리가 잘못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별도의 사람을 심판할 규정을 마련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수없이 판단했던 말씀에 따라서 여러분을 판단해도 여러분은 죄인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직책상 선생 노릇을 하는 자들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인식해야 하지만 습관적으로 남의 일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내뱉은 말로써 심판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들은 것을 못 지키는 사람보다도 가르치고 못 지키는 사람의 책임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다시피 선생 된 우리는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야고보 선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일마다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실천하지 못한 것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마는 저처럼 매주일 가르쳐 놓고도 행하지 못하면 그 심판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고의 목적은 두려워서 아예 입을 다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발언에 따른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주님은 다른 교훈에서도 입증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 비유를 할 때 주님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않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한 종은 적게 맞느니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심판은 누구나 받지만 어떤 심판을 받느냐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그 직무상 도덕적으로 어떤 일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늘 말을 해야 합니다. 혹은 지식적으로 맞고 틀린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도 교사의 직무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라는 그 일의 직무상 비판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선생이라면 그냥 늘 가르치려고만 든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뭐든지 가르치기 좋아하고 시키기 좋아한다고 비난받는 직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문인으로서 선생을 향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교육도 없이 선생노릇을 하려고 드는 모든 이를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 야고보 선생은 다른 이에게 ‘그래서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이래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모든 선생 노릇하는 자들을 향해서 경고합니다. 자기가 말해 놓고 그것을 행치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한 말로 인해서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할 때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한 정죄 일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너희 말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고 너희 말로 인하여 정죄함을 받으리라”

세상에 사는 어떤 사람이라도 잘못을 범합니다. 길을 걸어 본 사람치고 넘어진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죄인 된 증거로서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리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선언합니다. ‘ 독교 진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죄인이다.’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라고 고발합니다. 사람이 죄인인 것을 보려면 그 입을 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같은 진리를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은데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실수가 많은 자이지만 만일 말에 실수가  없다고 하면 온전한 자라고 그렇게 선언합니다. 그 말은 말로 범하는 죄보다 더 범하기 쉬운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혀를 잘 다스리는 사람 같으면 눈으로, 손으로, 몸으로, 다른 지체로 범하는 어떤 죄라도 능히 짓지 않고 통제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실수보다 말의 실수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같으면 다른 실수는 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그 입에서 하는 말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말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찬송하는 시간에, 기도하는 시간에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집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보면 여러분의 신앙 성숙도를 측정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도하는 것 들어보면 훌륭해요. 그러나 눈 떴을 때가 문제입니다. 공식으로 찬송 부를 때 보면 모두 다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열 받았을 때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비판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입니까?  여러분과 같이 대화를 하고 나면 힘이 빠졌던 사람이 새로운 힘을 얻습니까? 아니면 더 비참한 기분으로 전락하고 맙니까?


3.우리는 어떻게 우리 혀를 재갈 먹일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나는 말이 많아, 나는 너무 수다스러워, 입에 반창고라도 붙여야 되겠어’ 아마 한두 번쯤 고민을 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의 실수 때문에 고민 해 본적이 있다면 이런, 저런 처방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연스런 침묵으로 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말 안하고 좀 살아봐야지 결심을 하고 입을 다문지만 문제는 다물고 있다가도 안해야 되는 순간에 튀어 나온다는 겁니다. 격려해야 될 때는 입을 다물고 있고 입을 열어서 안 될 때는 입을 열게 되면 이건 대책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제부터는 이런 실수를 좀 줄여야지’ 그래 가지고 사람이 자기 혀를 통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해보신 분이라면 인정하실 것입니다. 시도 해 보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 다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완전을 향한 길은 부자연스런 침묵으로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 아래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 시키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주님의 뜻과 같이 되고 싶어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경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언제 이 말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고 이런 좋은 일들이 나타나는데 그 나타나는 일을 보고 비난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또 비난하느냐 하면 ‘저 사람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지금 저런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까 주님이 답하고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너희 마음에 가득한 것으로 말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말하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더러운 말이 튀어나오는 입이 문제가 아닙니다. 악한 말을 내뱉는 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결례를,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난했습니다. 주님은 뭐라고 제자들을 옹호했습니까? “손 씻지 않고 먹는 것 보다 더 나쁜것은, 손을 씻지 않고 먹어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은 정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 아니냐?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막7:21-22, 표준새번역)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고 하든지 아니면 열매도 나쁘고 나무도 나쁘다고 말해야 말이 맞습니다. 하는 일은 선하다고 인정하면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일을 한다는 것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가 좋으면 좋은 나무입니다. 악한 열매만 맺는다면 나쁜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베어버려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쁜 만, 비난하는 말, 욕하는 말이면 그 사람은 속에 더러운 것이 들어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감사하는 말, 칭찬하는 말, 격려하는 말이면 그 사람의 속에 그런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 바꾸어지지 않고는 나오는 말이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혀를 통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마음에 선한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흠모하고 앙망하십시오. 그 분의 덕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의 아름다움을 앙망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이 가득 우리 안에 자리하다 보면 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은혜로운 것이다 보면 입을 열면 은혜로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의 실수를 누구나 다하고, 어떤 죄보다 더 쉽게 짓는 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통제될 때에 우리는 온전한 사람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우리 마음이 충만해 질 때에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과 언어, 혀까지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통제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생명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사람들을 세워주고,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병든 자는 치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자를 빛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말에 실수가 없는 자입니다. ‘예’라고 할 때 ‘예’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아니’라고 할 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아무 일에나 나서기 잘하는 우리들에게 선생 노릇을 그만 하라고 경고합니다. 한날의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말에 실수가 없는 더 높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한 궁극적인 방안은 마음 밭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통제 아래서 마음에 선한 것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드리는 어떤 예물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은 입술의 열매임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경작한 밭의 소출을 감사함으로 드릴 때도 기뻐하시지만 우리의 마음 밭에서 나오는 입술의 열매는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 감사절에 기대하는 입술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감사와 찬송이 여러분의 입에서 끊어지지 말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손으로 드리는 절기 헌금보다도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감사의 절기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선행과 구제를 하나님은 언제나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맥추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선한 목적에 사용하는 새로운 전통이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리고개 그 어려운 시절을 우리가 지낸 것을 기억 하면서 아직도 그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신앙의 공동체가 돌아볼 수 있는 그 특별한 목적에 특별한 헌금을 드릴 수 있으면 우리교회는 한층 더 성숙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다 함께 기도로 주님의 식탁에 나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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