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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상하신 예수님 (요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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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한규목사

< 다른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

인생의 행복은 만남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좋은 만남은 삶을 좋게 만들고, 나쁜 만남도 잘 극복하면 인생의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들풀 하나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스며 있듯이 모든 만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때로 나와 스타일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 다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그 다른 점 때문에 더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 너무 안 맞습니다. 특히 자동차 같이 타고 갈 때는 거의 매일 싸웁니다. 성격 차이 때문입니다. 한번은 자동차에 기름이 4분의 1정도 남았습니다. 남편은 불안해 죽겠다고 기름을 넣으라고 성화입니다. 반대로 아내는 그 정도면 100킬로도 더 가는데 왜 그렇게 성화냐고 짜증을 냅니다. 매번 그런 식이니까 사는 것이 적과의 동침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부가 이웃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배우자를 믿어주는 법을 배웠고, 천국 소망을 가지면서 배우자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사랑, 교회 사랑을 통해 난생 처음으로 섬기는 삶의 행복을 맛보고, 남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능력도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그 부부는 서로의 성격이 다른 것 때문에 오히려 생각의 크기도 2배가 되고, 삶의 지경도 2배가 되고, 행복도 2배로 누리는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격 차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고 참아주기만 하면 성격 차이가 오히려 축복의 재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성격이 똑같으면 재미없습니다. 사람이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이 너무 당연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너무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서로 믿고 이해하고 인내하고 섬겨줌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 ‘나’를 감출 수 있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의 제자들도 많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은 후에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신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주시다!”라고 외치니까 베드로는 즉시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이 구절에서 상거는 ‘서로간의 거리’를 뜻하고, 오십 간은 약 90미터 거리를 말합니다. 즉 주님 계신 곳과 제자들이 탄 배 사이의 거리가 약 90미터 정도 되는데 그 거리를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얼마나 다릅니까? 베드로는 즉각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 헤엄쳐 왔지만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끌고 주님께 왔습니다. 이 장면에서 즉시 바다로 뛰어내린 베드로의 행동이 가장 주목을 끌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다 뛰어내리면 배와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하고, 배와 잡은 고기를 챙기고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비전을 세우고 힘차게 앞서 나가는 분도 필요하고, 반면에 뒤를 잘 챙기며 따라가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자연을 보면 각 사물마다 자기의 색깔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이듯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면 그 공동체는 더욱 복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자기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남도 그의 입장에서는 옳을 수 있습니다. 남을 나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남을 나처럼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남처럼 한번 되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을 뜯어 고치려고 하지 말고 나를 뜯어 고치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나를 감추어가고, 나를 고쳐가며, 다양성 중에 일치를 꿈꾸고 서로 감싸 안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공동체에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 숯불이라는 무대를 만드신 예수님 >

그렇게 제자들은 자기 성격대로 주님께 가까이 왔지만 역시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가장 먼저 주님께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주님께 “주님!” 하고 달려들지 않고 갑자기 주춤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나머지 제자들이 배를 타고 육지에 올라 똑같은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보았습니까?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들은 육지에 올라서서 주님을 보았지만 주님을 똑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고기 잡으러 나간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눈을 약간 내리깔고 있는데 그들 눈에 처음으로 보인 것은 바로 숯불이었습니다.

그 숯불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별다른 감정이 없었겠지만 베드로는 그 숯불을 보고 가슴이 덜컹 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숯불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기 때문입니다(요 18:18).

그때와 모든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던 때도 새벽 시간이었고, 본문의 장면이 펼쳐진 때도 비슷한 새벽 시간이었습니다. 그처럼 새벽 시간에 숯불을 보면서 베드로는 얼마 전의 수치스런 기억이 떠올랐고 귀에서는 마치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그 장면과 너무 흡사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베드로가 담대하고 적극적인 사람이지만 양심도 있고, 죄책감도 있는데 어떻게 반갑게 먼저 “주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말을 걸겠습니까? 그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속에 야단맞을 각오도 이미 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이렇게 책망하시는구나!”

가끔 사람들은 설교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저 말 나 들으라고 하는구나!” 물론 누구 들으라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죽이려고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장면 나 보라고 만드셨구나!” 물론 그런 의도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숯불이란 말은 헬라어로 ‘안드라키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 딱 두 번 나옵니다. 바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던 대제사장의 뜰이고(요 18:18), 오늘 본문 9절입니다. 또한 아침 식사 후에 주님은 숯불 앞에서 베드로가 3번 주님을 부인했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3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모든 상황이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비슷한 장면을 만드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영혼과 자존심을 죽이려고 그런 장면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베드로의 영혼과 자존심을 살리려고 그런 장면을 만드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과거의 실패의 현장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실패의 현장에 정직하게 설 때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 실패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

우리는 실패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를 인정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은혜의 길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통사고를 내서 감옥에 가 봤더니 잘못이 있어서 들어온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더럽게 재수가 없어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자기의 죄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천국에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 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고, 지옥은 “하나님! 저는 죄가 하나도 없어요!” 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 신앙도 없고, 진실도 없고, 감격도 없고, 마음의 천국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주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실패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이 없으면 치유도 없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와 실패에 대해 정직하고 “나는 예수님이 없으면 길이 없구나!”고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죄와 실패에 대해 정직하면 몸과 마음과 영혼에 급속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고 상처를 피하는 길도 없습니다. 반대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상처도 주님 안에서는 치유가 가능합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전제조건이 바로 실패 앞에서 정직한 것입니다.

옛날에 아버지가 바람피우는 것을 많이 본 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조금만 늦게 와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 상황에서 문제는 남편이 늦게 오는 것보다 자신의 상처가 진짜 문제입니다. 그 상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저에게 상처가 있습니다. 이 상처를 잘 극복하고 남편에 대한 믿음을 주세요!”라고 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정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실패의 현장을 외면하고 자신의 상처에 정직하지 못하면 애꿎은 남편만 이상한 사람으로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남편이 진짜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어머니로부터 너무 많이 잔소리를 듣고 자란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조금만 잔소리를 해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긴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때 문제는 아내의 잔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가 진짜 문제입니다. 그 상처를 인정하고 “하나님! 저에게 상처가 있습니다. 이 상처를 잘 극복하고 아내의 잔소리에 너무 민감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상처에 정직하지 못하고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어쩌다 저런 악처를 만났나?”고 하면 그 가정에는 사랑이 자리할 틈이 없게 됩니다.

문제를 극복하고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먼저 자신의 실패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실패의 현장에 솔직하게 서서 그 실패의 상처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덮어가는 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 사실을 아시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상처 치유의 무대를 만들어 그의 영혼을 치유하시고 건강한 마음으로 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면 크게 일할 수도 없고 건강도 훼손됩니다. 어떤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말기 암 환자들의 내과기록을 보면 상당히 많은 경우에 그 환자가 약 3년 전 쯤에 마음의 큰 충격을 받은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의 숯불 현장이 없었더라면 그는 폐인이 되었든지, 만성 위경련에 시달렸든지, 죄책감 때문에 소심하게 되어 떳떳하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숯불만 보면 깜짝 놀라고, 항상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하며 전혀 수제자 역할을 못했을 것입니다. 남들이 자신을 보고 “저분은 예수님의 수제자야!”라고 해도 베드로 자신은 “나 같은 사람은 무슨 수제자야!”라고 스스로 비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과거의 수치와 실패가 현재의 우리를 붙잡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돼지를 잔인하게 잡는 것을 보고 “인간이 너무 잔인하다. 동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먹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고기를 먹으려고 하면 처량한 돼지 얼굴이 생각나면서 구역질부터 났습니다.

나중에 신앙이 자라면서 노아의 홍수 이후로 “돼지는 사람의 식물이 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면서(창 9:3) 조금씩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홍수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채소만을 식물로 허락했던 명령(창 1:29)에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의 돼지 잡는 영상 때문입니다. 제가 ‘전방 선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후방 선교사’의 길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바로 먹는 문제였습니다.

1987년, 저는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유학을 가면서 “훌륭한 선교사가 되리라!”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구체적으로 선교학 공부를 하면서 선교사가 고기도 잘 먹어야 하고, 선교지의 토속 음식도 잘 먹어야 하고, 심지어는 어떤 선교사님은 조상들과 일체감을 가지게 하는 선교지의 의식에 동참하기 위해서 사람 고기도 한 점 먹어보았다는 얘기를 듣고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에 후방에서 선교사를 최선을 다해 돕는 것으로 진로를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과거에 내 마음을 흔들었던 기억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주님께서 숯불 앞에서 부인한 베드로에게 숯불 앞에서 새로운 사랑의 고백을 받으시려고 새벽에 숯불이라는 무대 장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자상하시고 따뜻하신 예수님입니까?

< 고기파티를 여시는 사랑의 주님 >

그리고 숯불 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생선과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상심하고 피곤한 제자들을 위해 미리 ‘고기 파티’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배반한 것도 제자들이고 주님을 실망시킨 것도 제자들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제자들이 주님을 위해 파티를 열어 주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님이 제자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듯 '고기 파티'를 열어주셨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이 자상하고 따뜻하게 느껴집니까? 그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 실패가 있어도 그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을 의지하고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얼마 전에 교회에 다니는 중 2 여학생이 아파트 15층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학원 수학 강사인 이 학생의 평소 성적은 전교 1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살 며칠 전에 수학을 88점 맞아서 전교 5등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성적이 떨어진 것도 상상할 수 없는데 아빠에게 야단맞을 생각을 하니까 그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불안에 떨다가 옥상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더 기막힌 사실은 그 학생의 아버지가 수학 88점을 맞은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이것은 우리 딸 성적표가 아니야. 뭐가 잘못된 거야!”하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자녀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고, 실패에 집착하면 더 큰 비극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에 넉넉해야 합니다. 나의 실패에도 넉넉하고, 사랑하는 자녀와 배우자의 실패에도 넉넉해야 합니다.

실패를 칭찬할 필요는 없지만 부모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부모는 아이의 성적이 떨어졌을 때, 울적해하는 아이를 데리고 피자집에 가서 ‘피자 파티’를 열어주면서 “이제 얼굴 피자! 앞으로 열심히 해봐!”하고 등을 두드려주는 부모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제자들이 실패의 기억을 딛고 일어서도록 “이제 다시 시작하자!”라는 의미로 고기 파티를 열어준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숯불에서의 상처’를 ‘숯불에서의 주님 사랑’으로 극복하고 그 다음부터는 숯불을 볼 때마다 배반의 상처보다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담대하게 수제자의 사명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

베드로뿐만 아니라 나머지 6명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디베랴 바닷가의 숯불 앞에서의 기억은 도마가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고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것 이상으로 그들의 일생에 강렬한 영상을 남기면서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평생 넉넉한 믿음으로 어떤 고난도 극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주님의 사랑이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끔 못난 모습을 보이지만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밀어주시며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믿고 과감히 믿음의 모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믿음의 모험을 할 때 가끔 두려운 마음도 들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짜 믿음의 대장부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수부대에서 처음 낙하할 때는 아무리 용감하고 배짱 있고 지상 훈련을 많이 한 청년들도 모두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뛰어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조교가 한 사람씩 확 밀어서 떨어뜨립니다. 그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낙하산을 펼 수 있고, 심지어는 잠깐 정신을 잃어도 고도측정계가 있어 일정 고도가 되면 저절로 낙하산이 펴집니다. 그렇게 몇 번 훈련을 받다 보면 낙하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뛰어내리면서 나는 맛을 만끽하고 세상도 구경하고 즐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도 처음에는 “주일을 지키다가 가게 망하면 어떻게 할까? 십일조를 드리면 어떻게 사나? 우리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선교사님까지 후원할 수 있나?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면 정말 응답 주실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면 주님이 우리의 낙하산이 되어 주시고, 나중에는 그것이 오히려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깨닫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감히 믿음의 모험을 해야 합니다. 때로 실패가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현장에서 성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처참한 실패에서도 사랑이 많으신 자상하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떤 실패의 현장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그 자상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항상 담대하게 사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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