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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는 자여 어찜이뇨? (욘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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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철 목사 (대구감리교회)

1984년도 올림픽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습니다. 아주 장대하고 재미있는 쇼를 만드는 전문가들이 LA, 헐리우드에 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역사상 가장 성대한 개막식을 만들자고 계획하는 중에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개막식 때, 미국 국가가 연주될 때 스타디움 서쪽에서 미국의 국조인 흰머리 독수리가 날아올라와 가지고 잔디에 있는 오륜기 모양으로 되어있는 횃대에 내려앉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흰머리 독수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생 조류 연구소를 통해서 흰머리 독수리 한 마리를 구하기는 구했는데 이 독수리는 22년 동안 거의 날아보지 못하고 보호 속에 자라나고 너무 먹어서 뚱뚱하게 살이 쪘습니다. 거의 뚱뚱한 칠면조 비슷한 독수리가 한 마리 주어졌습니다. 이름이 "번버"입니다. 조련사가 이 "번버"를 날도록 만들어야 할텐데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은 다이어트를 시키고 훈련을 시킵니다. 조금 잘하면 맛있는 먹이를 주고 그런 식으로 훈련시키는데 나름대로 번버도 열심히 날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날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날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날아오르다가 곤두박질쳐서 땅에 머리를 처박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받던 도중 이 "번버"가 죽고 말았습니다. 너무 과도한 스트레스로 독수리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문에는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번버에게 날기를 요구했으나 이 새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과잉보호와 비만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독수리에게 날아라하는 것이 과도한 요구입니까. 당연한 요구 아닙니까. 그런데 당연한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이 독수리답지 않은 독수리. 그것이 혹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날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요구에 날고 있습니까? 땅에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 전도의 삶, 사랑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라는 말만 나오면 겁을 먹습니다. '다른 건 다해도 전도만은 못해, 전도에 관한 설교는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런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전도를 요구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입니까?

기독교 사학자는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그러니까 주후 1300년경부터 1500년까지 약 200년에 해당되는 중세의 유럽 역사를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놀라우리만큼 평화로웠다, 교권은 다시 강화되었고 정치적인 격동기는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예배를 게을리하고 전도와 선교에 힘쓰지 않아도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위축되고 부흥이 일어나지 않아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정녕 평온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거짓된 평화였습니다 교회는 이 거짓된 평안 속에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을 때 제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거짓된 평화.' '거짓된 평안'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거짓된 평안 속에 잠들어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 요나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요나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라는 도시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앗시리아는 이방 땅입니다. 전쟁을 좋아하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국입니다. 전쟁 포로들을 아주 혹독하게 다스리기도 한 민족입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받지 못한, 죽어 마땅한 저주받은 백성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삶은 죄악이 가득 찬 악독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길 원합니다. 이 성은 아주 큰 성입니다.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12만여 명, 이 숫자는 고대의 도시로는 엄청나게 큰 도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영혼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귀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수가 자그마치 12만 여 명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12만 여 명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항상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만민을 구원하시려 하십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가장 큰 소망이요,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명령을 거역하고 도피를 꾀합니다. 그곳에 가면 모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 편으로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들이 회개하여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억압했던 이방인 성읍 니느웨를 용서해 주실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도무지 자신이 가야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역자였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배의 밑층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도 양심이 있으니까 처음에는 마음이 괴로워서 잠이 잘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점점 담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

이것을 이름하여 바로 '거짓된 평안'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평안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요나의 모습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실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 교회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석 놀이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석에 핀 같은 것을 붙이고 또 다른 핀을 갖다 대면 그 핀 끝에 다른 핀이 달랑달랑 붙어 가지고 대 여섯개가 죽 늘어집니다. 그런데 자석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 쇠붙이는 다른 쇠를 당기는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로 끌어당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요나는 양심이 마비되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땅한 자리가 아님에도 그는 아주 평안하게 잠을 잡니다.

사랑하는 대구교회 성도 여러분, 이것이 평안입니까? 이것은 평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 생명을 붙여 살 수 없는 인생은 평안하여도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거짓된 평안을 참 평안이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이 되어야 전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신앙생활 오래하신 분들 계신데 신앙생활 오래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과 신앙의 연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영국의 한 예언적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진리의 나팔을 불어 성도를 깨우는 일을 포기한 듯하다. 그 대신 자장가를 불러 성도를 재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2.  잠든 요나는 깨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욘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잠든 요나를 깨우는 사람이 요나의 동료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인 선장입니다. 매우 흥미롭지 않습니까? 신자가 불신자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가 신자를 깨우고 있는 역설적인 이 장면을 지켜 보십시오. 이 선장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불신자였습니다.

배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앞 구절인 5절을 보겠다.

욘 1: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강한 풍랑으로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자기 신들을 부르며 절박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신 앞에 호소하고 있을망정 그들은 그래도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잠들어 있습니다.

세상은 기도하고 있는데 성도는 잠들어 있습니다. 교회는 잠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요나를 흔들어 깨우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당신의 하나님께 구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라."

이와 동일한 소리가 우리의 귓전에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애절한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은 교회를 많이 비판했고 비웃었습니다.

"교회가 머 저래?"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러면 쓰나?"

이것은 그만큼 세상이 교회에 대한 기대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머 저래?"

이것은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구원의 소리를 외치는 것입니다. 세상은 썩을지라도, 세상 사람은 잘 못 살지라도 교회만큼은 살아 있어야 하노라고, 교회만큼은 부패하면 안되노라고, 교회는 안 다녀 봤어도, 교회가 어떠해야 함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를 부담스럽게만 듣지 말자구요. 그것은 세상이 아직도 교회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대할 가치가 없는 대상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비판을 받는다는 것은 아직도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어떤 기대를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교회가, 성도들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폭풍우의 원인은 이 세상의 죄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보고도 그것을 안타까워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세상의 폭풍우는 더 거세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의 불순종과 나태함 때문에 세상이 더욱 고통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세상이 애원하고 있는 소리를 들어 보세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깨어 일어나세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 이 역사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라 우리에게 선교해 주세요."

이 안타까운 애원 소리가 오늘 우리 귓전을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 깨어 일어나기 원하신다면, 세상이 우리에게 부르짖고 있는 이 애절한 소리를 듣는 귀가 당신에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깨어 일어나기 원하신다면 세상이 애원하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소리를 직접 들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욘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적으로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를 향해 말씀하시다. 공동체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고 말씀하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제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주께서 개인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삭개오야! 마리아야! 마르다야! 나사로야?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무덤을 향해서 다가오시면서 주님은 친구 나사로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 "나사로야!"

마찬가지로 주께서 "아무개야?" 하고 당신을 부르시면 당신은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요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하십니다.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죄악 때문에 이 성을 멸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성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바램이십니다. 세상 사람이 멸망받는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서 외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가서 증거하면 그들은 구원받습니다.

억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밖에 없었던 요나, 그가 가서 외칠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4.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욘 3:5~9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그들은 새 삶을 얻습니다. 새로운 자리로 인도함 받습니다.

요나의 기대와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하나님의 의도는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쓰임받은 모습이요, 그것이 요나의 복된 자리였던 것입니다.

매 주일마다 선포되어지는 설교마다 매력없는 설교가 몇 개 있답니다. 그 중의 첫 번째가 헌금하라는 설교요, 두 번째가 전도하라는 설교요, 세 번째가 기도하라는 설교요, 네 번째가 예배 빼먹지 말라는 설교랍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입니까? 다른 설교는 다 해도, 헌금하라는 말하지 마세요, 전도하라는 말하지 마세요, 기도 자꾸 강조하지 마세요, 예배 가끔씩 빼먹기도 하는 것인데, 왜 자꾸 스트레스 받게 하느냐는 것이에요.

오늘 제가 살고, 여러분이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것은,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영의 호흡인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해야 합니다. 헌금생활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것이요, 의도하시는 바입니다. 한 생명을 얻는 다는 것, 천하보다 귀한 그 생명을 다시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것, 하나님은 당신의 몸을 바로 그 한 생명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재산을 바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명을 깨닫고, 사랑을 들고, 그 영혼을 안타까이 여기며 주님 전으로 인도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의 생명이 귀해질 것이고, 그 영혼도 다시 사는 역사가 여러분의 결단과 헌신을 통하여 흘러 넘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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