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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찾으심 (눅 1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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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안창국 목사 (새비전교회)

오늘 본문은 열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한 여인이 열 개의 드라크마 중 한 개를 잃어버렸습니다. 온 집을 헤집어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잃어버렸던 드라크마 한 개를 찾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며 기쁨을 나누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드라크마는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서만 등장하는 화폐 단위입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화로서 한 드라크마는 로마 화폐로 한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즘 막노동을 한다고 하면 일당을 적게는 3만 원 정도에서 10만 원을 넘게 받는 사람도 있다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한 5만 원 정도로 계산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드라크마보다 열 드라크마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한 드라크마는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아주 많이 환산한다 해도 10만 원권 수표 한 장 정도입니다. 수표 10만 원이 물론 작은 돈은 아닙니다. 많다면 많은 돈이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 돈이지요. 더욱이 그 드라크마를 딱 한 개만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열 드라크마 중에 하나라는 것을 볼 때, 이 여인이 그 드라크마에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찾은 다음에 잔치까지 벌였는가를 볼 때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열 드라크마라는 것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 딸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는 의미에서 남편이 될 남자나 그 가정에서 신부의 집에 신부의 값을 지불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부를 사고판다는 의미와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그러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 될 사람은 신부될 사람에게 오늘날의 결혼반지와 같은 의미로 열 드라크마의 은전을 줄에 꿰어서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이 열 드라크마는 남편이 결혼할 때에 사랑의 증표로 주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부는 이렇게 받은 열 드라크마를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였습니다. 그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렸을 경우 심한 경우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다 하여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제기 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이 열 드라크마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고 그중의 한 드라크마 역시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라도 없으면 열 드라크마라고 하는 증표의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여인들은 이 열 드라크마를 머리에 쓰는 베일에 엮어서 걸고 다닐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과부가 되었을 경우 요긴하게 사용되기도 하였던 물건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남편과의 사랑이 중요하면 할수록 한 드라크마의 의미는 더욱 컸을 것입니다.

1. 한 드라크마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잃어버려져 있었습니다.

이 한 드라크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잃어져 버려진 존재입니다. 드라크마에 발이 달려서 잃어버려졌겠습니까? 아마 어떤 상황 속에서 열 드라크마가 엮어져 있는 줄에서 떨어져 나왔겠지요. 드라크마를 다시 정리하다가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갑자기 뚝하고 열 드라크마를 엮었던 줄이 끊어져서 그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으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교회에 안 나오고 싶어서 안나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짓고 싶어서 지은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에 대한 것을 못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이고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속성 때문에 원하지 않지만 죄를 지으며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첫 사람이었던 아담으로 인해 이미 죄인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죄가 지배하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잃어버려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려진 드라크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자신도 모른 채 잃어버려진 하나의 드라크마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에 휩쓸려가고 있는 거지요. 주인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지요. 그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잃어버려진 영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한 상태로 그저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는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지은 대가로 치를 형벌은 바로 사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인생의 그 끝을 모릅니다. 앞으로 펼쳐지는 미지의 세계를 기대와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왜 사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지구촌 각처에 이렇게 잃어버려진 영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에 대해 말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민족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직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민족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2. 그런 드라크마를 그 여인은 온 힘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8절을 한 번 볼까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이 여인은 등불을 켰습니다. 유대의 서민들이 살고 있는 가옥은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등불을 켜지 않으면 드라크마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등불을 켭니다. 오늘날 같으면 플래시(flash)나 랜턴(lantern)을 켰겠지요?
주님은 잃어버려진 영혼을 찾기 위해 이 어두운 세상 속에 불을 밝히십니다. 우리가 속한 세상은 어둡습니다. 잃어버려진 존재의 주변은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암울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인생의 의미가 찾아지기 어려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인생이 참으로 암담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인생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의미를 찾기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허무해지죠. 특별히 가을에는 그러한 감정을 느낄 때가 종종 있지요. 괜히 낙엽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리쉬며 “인생”을 생각해보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길게 노을 지는 가을 녘의 석양을 바라보며 그러한 예민한 감정을 가끔 느끼시지는 않는지요?

사실 이 세상은 암담합니다. 죄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어두움 속에 잃어버려진 상태로 놓여져 있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우리를 열심히, 부지런히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설교를 통해, 전도를 통해, 교회 다니는 이웃을 통해, 친구를 통해, 전도지를 통해 잃어버려진, 세상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오늘 주보의 3면에 보면 카자흐스탄에 가서 선교하고 계시는 김기태 선교사님의 선교편지가 실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카자흐스탄 선교를 위한 필요들이 기록되어 있더군요. 하나님은 그러한 사역들을 통해 카자흐스탄의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한 번 다시 보자구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집안이 어두우니까 이 여인은 등불을 켭니다. 그리고 빗자루로 일일이 조심스럽게 쓸면서 드라크마 하나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한 영혼을 찾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한 영혼에게 집중하시는 지 아십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구원 받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전도지 아시죠? 막 뿌려지는 전단지로 된 전도지 말입니다. 1,000장을 뿌려야 한 명이 돌아온답니다. 그 1,000장은 돌아온 그 한 영혼을 위해 소비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찾으십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찾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의 잃어버려진 영혼을 그렇게 찾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찾기를 원하시고 게십니다. 더 나아가 세계 지구촌 곳곳에 잇는 그 잃어버려진 영혼을 그렇게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잃어버려진 영혼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3. 찾으면 하나님께는 말할 수 없는 매우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 여인은 열심히, 부지런히 찾아 한 드라크마를 찾아내었습니다. 드라크마를 찾은 이 여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9절을 볼까요?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이 여인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요?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는데 잔치를 벌입니다. 한 개의 값어치가 고작 한 5만 원 정도밖에 안되는데 말이죠. 아마 잔치 비용은 50만 원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드라크마가 가지는 가치를 이미 말씀드렸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각자는 매우 귀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환영(Welcome)입니다. 두 손 들고 맞아들이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다른 비유들을 한 번 보세요(6, 7절, 20, 22, 23, 24절). 잃어버려진 한 마리의 양, 허랑방탕하여 가산을 탕진한 한 아들. 이들이 돌아오고 찾아졌을 때 어떻게 합니까? 잔치를 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 매우 귀중한 존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귀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값으로 치면 얼마짜리인 것 같습니까? 연봉 3,000만 원짜리, 4,000만 원짜리… 이렇게 계산하십니까?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값으로 죽게 하시고 구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짜리입니다. 그만큼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잃어버려진 영혼들도 그렇게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잃어버려진 한 드라크마를 찾는 이 여인의 심정 같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새비전가족들의 마음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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