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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과 성장 (벧후 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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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대광교회)

  ‘생명의 신비’ (Miracle of Love) 라는 비디오를 보셨습니까? 이 비디오는 미국을 포함한 10여 개국 공동으로 2조 4천억 원의 제작비와 7년 동안의 제작기간을 걸쳐 만든 것으로서 생명의 탄생과정을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생생한 실제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비디오의 흐름은 한마디로 생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도 물론 신비롭지만, 그 생명이 자라는 것은 더욱 신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생명의 가장 놀라운 신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을 ‘거듭남’에 비유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영적 생명체로 탄생한다는 뜻입니다. 영적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라남, 성장에 있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자라가듯이, 영적 생명체도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역동적인 생명의 움직임, 성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3장 18절에서 ‘자라 가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영적 생명체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났으면, 영적으로 자라 가는 것이 성경의 진리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영적 생명체가 자라가야 할까요? 본문은 바로 그 방법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체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또 바르고 온전하게 자라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선, 은혜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영적 생명체의 성장은 은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자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먹어야 합니다. 은혜를 마셔야 하고, 은혜의 호르몬과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없이 살수 없고, 결코 자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관련시킨 것은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의 신앙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혜 안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처음 그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만났을 때, 그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깊은 은혜를 체험하며 시작을 했습니다. 그 뒤 베드로의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매순간마다 은혜를 맛보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으며 성숙한 사람으로 놀랍게 변한 것입니다.

  그가 은혜를 체험하며 성장했다는 대표적인 증거는 주 앞에서 흘린 눈물과 통곡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많이 울며 산 사람입니다. 전해져 오는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을 삶을 간증하고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지금 성도들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도 눈물의 권면이 여기저기에 나오고, 그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에서도 그의 눈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그의 통곡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그때 절정에 달한 것을 봅니다. 조그만 소녀 앞에 자기도 모르게 나약한 자신을 알았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며 새벽닭이 울 때, 그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눈물이 은혜를 알게 했고, 깊은 은혜를 체험하며 견고한 사람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은혜는 한마디로 ‘감정의 터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건드려 깨닫게 하고, 뜨겁게 하고,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그 감정의 터치를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울고, 깨닫고, 많이 가슴을 치는 사람이 성장합니다. 이것이 신앙성장에 참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감정의 터치가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눈물이 있는 예배가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 성도의 신앙이 놀랍게 성장합니다. 서구의 교회가 점점 쇠퇴하는 이유가운데, 예배에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냉정하고, 건조합니다. 저는 외국인이 우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성장에 큰 걸림돌이 아닌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많이 듣던 말 중에 하나가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남자는 울어서는 안됩니까? 그런 문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나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은혜 받아도 감정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눈물은 약한 자의 모습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믿음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주 지독한 사람을 향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사람이 피도 눈물도 없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비극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이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울어야할 때, 울지 못합니다. 웃어야 할 때 웃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잃어버리고 가면을 쓰고 삽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치유와 은혜를 경험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상한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은 가장 강인한 사람입니다. 그는 남자로서 성공한 사람의 모델입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울었다고 고백합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눈물이 그를 더욱 견고한 사람,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에레미야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은혜 앞에 눈물을 흘려 본적이 있습니까?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친 적이 있습니까?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한 적이 있습니까? 울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많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사람이 되고, 그래야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은혜 안에서 성장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는 지식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베드로는 은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이나 눈물만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은혜와 함께 필요한 성장의 요소를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식’입니다. 지식이 무엇입니까? 배우는 것입니다. 머리에 저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성장은 은혜 즉, 감정의 터치만 있으면 안되고, 여기에 지식의 터득까지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성장입니다. 은혜와 지식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그냥 지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를 아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 성장을 위해 배우는 것 중에 주님을 배우고, 또 그 주님을 소개하는 성경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저를 ‘아는’ 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그냥 주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지식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을 가리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압니다. 이것은 지식적인 앎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한번도 만난 없고, 대화를 가진 적도 물론 없습니다. 나는 어느 그를 객관적으로 알아도, 그는 나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앎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지식은 배우면 끝나지만, 성경의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지는 바로 내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성경의 지식을 갖고 있습니까? 옛날에는 성경을 덮어놓고 믿자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혀 모르고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만 받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지구상에 많은 이단이 생겼습니다. 본문도 바로 그런 이단을 경계하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의 신비한 것만 강조하다보니, 우리 나라만큼 이단이 많은 나라가 없습니다. 한국은 교회도 많이 부흥했지만 이단도 많이 부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현혹되어 넘어가고 있습니다. 뿌리가 없고, 신앙이 흔들립니다.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의 흐름과 기본적인 교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름을 맞이하면서 어김없이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본격적으로 있게 됩니다. 이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처음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시작된 동기는 바로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고, 우리가 성경을 좀더 알고, 주님을 더 알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본래의 의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학생과 아이를 더 깊은 성경의 세계로 이끄는데 모두 집중해야 합니다. 그들의 평생 마음에 새겨지는 말씀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위해 교사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교사는 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과 과정을 거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 예수님을 삶에서 얼마나 체험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의지하고 살았더니 이렇게 좋더라, 힘들고 어려웠을 때 이렇게 하니 되더라, 주의 말씀이 정말 내 삶의 빛이요 등이더라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지식은 힘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내가 먼저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가 성장합니다. 인격적인 교제와 삶의 체험을 통해 성숙합니다. 주님을 아는 인격적인 지식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전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의지입니다. ‘거룩’에 대한 의지입니다. 본문 14절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 말은 구약 시대의 제사에서의 기원을 근거로 합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을 드림에 있어서 온전한 것만 드렸습니다. 가장 살찌고, 건강하고, 좋은 것만을 드렸습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제물을 드리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살기를 다짐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지금 베드로가 이 말을 성도의 삶에 적용하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씀가운데 ‘힘쓰라’는 말에 강조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거룩한 삶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은 지식의 습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의 표현에서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의지의 결단까지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인격의 변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요소입니다. 건강한 성장을 위해 의지가 발동해야 합니다.

  지식, 감정, 의지를 가리켜 인격의 3요소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의 바른 성장도 이 조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식의 습득, 감정의 표현, 의지의 결단, 이 세 가지를 통해 성숙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 세 가지는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삶, 아름다운 모습, 참된 인격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에 치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따지기를 좋아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아는 것입니다.

  신앙의 감정에만 치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뿌리가 약합니다. 감정에 자기 신앙을 의존하니까 기복이 심합니다. 감정은 어느 때는 높다가도, 어느 때는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가슴은 뜨거운데 머리는 텅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도 있고, 감정도 풍부합니다. 그러나 의지의 결단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감정의 터치도 잘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끝입니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합니다. 의지가 발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삶의 능력이 없고, 내가 믿는 기독교의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의지의 결단까지 가야 합니다. 지식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감정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달라짐은 의지에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겠다고 몸부림치면서 다짐해도 쉽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듣기만 하고, 깨닫기만 하고, 결심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의 지금 현 신앙의 수준은 무엇입니까? 나는 혹 치우쳐 있지 않습니까? 나의 신앙을 지식에 의존하고 있습니까? 나는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지식과 감정은 있는데 의지가 발동하지 않습니까? 이 세 가지의 유기적인 연합, 불가분의 관계를 통해 사람이 성장하고, 신앙도 자랍니다. 전인적인 성장이 가장 건강한 성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 안에 영적 생명체가 꿈틀거립니다. 이제 자라야 합니다. 은혜의 체험으로,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리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기를 힘쓰는 자기의지로 우리가 성장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깊은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다짐하면서 믿음 생활하는 여러분들의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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