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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 된 자화상을 소유하자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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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나와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나 사이에 많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 있는 나가 누구인지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수리와 닭 이야기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독수리와 닭’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이 근처 산에서 발견한 독수리 알을 암탉이 계란을 품을 때 살짝 집어넣었습니다. 드디어 병아리도 독수리도 알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독수리 새끼는 자기가 병아리라고 생각하며 병아리와 똑같이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독수리 하나가 닭장 상공을 날아 멋지게 맴돌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독수리 새끼가 자세히 보니 자신과 너무 닮았습니다. 그 독수리 새끼는 ‘야 나하고 닮았지 않느냐? 나는 지금까지 병아리하고 왜 안 닮았나 생각했는데 저 공중에 나는 저 어마어마한 새하고 나하고 닮았구나’라고 생각하며 비로소 자신의 참된 자화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닭장을 벗어나 푸른 창공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옛사람이 아닙니다. 옛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살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화상을 항상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자기의 변화된 자화상을 입술로 늘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자화상을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기억하고 우리는 늘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새로운 자화상에 반대되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환경은 단호히 대적하고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니라 정체가 확실한 사람이 되었다’라며 내 신분을 확실하게 붙잡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모습이나 현상이나 삶이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이대로는 안 되고 무엇인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여러분은 지금 현재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기대와 설레임으로 새로운 꿈과 기대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던가 아니면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설계를 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요? 아니면 더 이상 기대할 것 없이 이 모습 이대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은 아닌지요?

새 자동차를 사서 처음 타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 대신 차에 대해 아주 예민해져서 조금만 흠집이 생겨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몇 달만 지나면 중고차가 됩니다. 막 결혼을 한 신혼부부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결혼 생활이 시들해집니다. 직장에 막 들어온 사원을 신입 사원이라고 부르지만 몇 년 지나면 일에 베테랑이 되고 한 십 년만 시간이 흐르면 능글능글한 고참 사원이 됩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1월에는 새해가 실감이 납니다. 그러나 2월, 3월로 가면 지난해나 별 다를 것이 없어집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바로 이런 인간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이 말은 우리들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이긴 해도 우리가 이 말에 묶여 숙명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자동차를 새로 샀을 때는 기분이 새롭습니다. 이 차를 새것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하면 그런대로 새 기분을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신혼 시절의 사랑을 유지하려고 부부가 함께 노력하면 그런대로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처음 하면 기분이 새롭습니다. 그 후로 매일 신입 사원의 기분으로 일하면 직장 생활을 신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이 없는 사람도 새해 첫날, 첫 달에는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후로 계속해서 새로운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다면 일 년 열두 달이 새로울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평생을 이런 식으로 항상 새로운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새롭게 먹고 그대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비슷하게 잘하다가도 시간이 가면 타성이 생기고 게을러집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 가르쳐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아주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실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어떤 회사에 근무하던 20대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교양이 있고, 얌전하고 착했으며, 밉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별로 말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잘 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달 휴가를 내고 난 후 회사에 출근했는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외적인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런 성품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명랑하고 자신감이 가득하고 친구들이나 이웃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얼굴에 수심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가 변화가 왔는지 알고 싶어 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그의 존경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이유인즉 그녀는 오랫동안 자기 코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미운 자화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자기를 이상하게 본다고 생각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쌓여 생활했습니다. 자기는 코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감이 되고 애인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사람을 피하고 근심어린 얼굴로 지냈습니다.

결국 그녀는 돈을 모으고 휴가를 얻어 성형외과에 가서 코 수술을 받고 마음에 드는 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자화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예쁘고 사랑스런 자기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화상

아담의 타락 후 인간은 마귀와 죄의 종이 되고 그 때문에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자화상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악에 포로 된 자화상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한 모습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비뚤어진 자화상의 포로가 된 채 죄악과 마귀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나는 죄인이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화상을 갖고 있는 이상 결코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나쁜 습관에 묶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나는 속물이다. 나는 세상의 습관에 묶인 사람이다. 해방될 수 없다’라는 자화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속과 마귀의 유혹과 시련에 견디지 못합니다.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불행한 자화상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소외되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자화상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 청소년들을 보면 대부분 결손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떴다든지 이혼을 했다든지 해서 가정이 불행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은 비뚤어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미움과 분노의 포로가 되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약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병약한 자화상을 가지고 항상 병에 대한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자신은 허약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에 대한 정신적인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병이 오면 곧장 쓰러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늘 병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실패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배경도 없고 늘 가난하고 생활고에 허덕이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나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 하층인간, 쓰레기’라고 생각합니다. 비뚤어진 자화상은 삶에 절대적인 실패를 가져옵니다.

이스라엘의 12정탐꾼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40주야를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그 중 10사람은 얼마나 비뚤어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은 ‘성은 높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로 우리가 도저히 이기지 못한다. 우리들은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하다’며 메뚜기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세상에도 버림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된 자화상

심리적 훈련을 통해서 자화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게 되면 자화상의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을 지라도,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고 명예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면 무조건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서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면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의와 영광의 자화상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 영광을 얻은 모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님께서 의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가슴에 그린 자화상은 용서받고 의의 선물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당당한 모습입니다. 이 자화상은 십자가 밑에서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를 저주하고 자기를 저주하고 사람들을 향해서 이를 갈던 흉악범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모습이 완전히 변화된 천사와 같은 사람이 된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그 사람은 자화상이 변화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세속에서 해방되고 마귀와 근심에서 자유를 얻는 자화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과 마귀는 떠나가고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기의 모습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베드로는 못났다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통곡하고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후 성령 충만해지자 자화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힘 있고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고 하루에 3천명 이튿날에 5천 명씩 회개시키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바친 위대한 사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변화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옛사람이 아니요, 이젠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신분이 되었다’는 자화상을 얻게 되었을 때 그에게 큰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얻은 자기가 되었다는 자화상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안겨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자화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그리스도와 살게 될 때 기쁨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와 같은 자화상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자는 치료받고 건강한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지금 여러 가지 치료할 수 없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을 수도 있지만 병에 사로잡혀 나약하고 죽어가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면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병을 능히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는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서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치료받은 사람의 자화상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하고 축복받은 자화상을 갖고 저주에서 해방된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현재에는 가난하고 낭패를 당하고 실망했을 지라도 이것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이 아닙니다. 진실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육신의 장막을 덮어쓰고 지금 지상에서 살고 있지만 실상 우리의 속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으므로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면 손으로 짓지 않는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신분을 얻은 새로운 자기의 모습, 자화상을 마음속에 확실히 바라보고 그 자화상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자화상을 소유하라

우리들은 늘 변화된 자화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신을 사랑하라고 슐러 목사는 말했습니다. 이것이 새 자화상을 갖고 사는 삶이며 이렇게 해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름대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여러분 자신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인지 시키신 일이 있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요 특권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제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어리석은 것이고 논리를 초월합니다. 사랑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심지의 자기의 본질, 생명까지도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려고 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직 사랑이 아닙니다. 아직 그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우리는 비워지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던 것들은 점차 희미해집니다.

세상은 작아지며, 점점 그분의 영광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비워질수록 주님께 대해서 부요하게 될수록 사람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며 믿음인 것입니다.

변화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새것을 가지고도 새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 차를 몰다가 이전에 타던 헌 차가 생각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수동 기어 차를 운전하다가 자동 기어로 바꾸었는데 편하긴 한데 운전하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다시 수동 기어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결혼하고서도 옛 애인이 생각이 날 수 있으나 행동으로 옮겨서는 안 되고 자신이 결혼한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새해가 되었는데도 지난해의 것을 그래도 유지하기 쉽습니다. 일기를 쓰거나 기록을 할 때 날짜를 지난해 것으로 기록하는 경우를 경험하실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현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새로움이 계속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새 차가 한 번 사고를 내서 흠집이 생기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애지중지 아끼던 태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계속 아끼고 닦아주어야 할 텐데 이미 ‘버린 몸’이라는 생각에 아예 포기하게 됩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도 한두 번 실수하면 쉽게 포기합니다. 새해가 되었다고 결심을 했다가 잘 실천하지 못하면 ‘역시 나는 희망이 없다’라며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실수합니다. 목사도 얼마든지 실수합니다. 새 차도 고장 나듯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지만 실수합니다. 그럴 때 ‘나는 희망이 없어’ 하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 기도해서 잘못을 해결하면 다시 새롭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흠이 하나도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계속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종교적인 예식에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이 새롭게 된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때때로 나의 현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간구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마음 판에 자기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모습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만일 그 자화상이 부정적이고 열등하며 패배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대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화상이 소망차고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모습이면 또한 그렇게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닌 내면적인 자화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 지음 받은 피로 그린 자화상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 세상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다 버렸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 나와서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자화상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화상을 얻고 우리는 마음에 강하고 담대하여 소망차고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우리의 생활 속에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밝은 자화상을 가지라

밝은 자화상을 가지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부부 모두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밝은 자화상이 있어야 합니다. 자아가 어두운 사람은 모든 것을 어둡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자아가 밝아지면 다른 사람까지도 밝아집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누더기에 생베 조각을 기운 것이 아닙니다. 용광로에 들어가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창조된 것입니다. 질그릇이 깨어져 다시 빚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우리의 옛 자아를 못 박고 새 자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내가 보는 나도 아니고, 남이 보는 나도 아닌 주님이 보시는 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는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새 피조물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화상을 가장 감격스럽게 묘사한 성경말씀은 에베소서 1장 17- 1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 게 하시고 너의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말씀에서 우리의 자화상은 세 가지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사탄의 절망적인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망적인 자녀가 된 것입니다. 신분이 바뀌면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이 세상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위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셋째, 능력이 바뀌었습니다. 나 자신의 연약한 힘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크신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사는 위대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밝은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스스로 존중하고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즉 자긍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외모나 학벌이나 능력 혹은 집안환경 등의 개인적인 약점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약점조차도 주 안에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바울은 몸에 가시가 있었지만 오히려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공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고칠 수 없는 약점은 건드리지 말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처나 현재의 상황을 반복해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바꾸는 것이 현명합니다. 건강한 자화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성장합니다.

잃어버린 자화상의 회복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이 “나는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사람일거야”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을 기준으로, 나는 괜찮은 사람 또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분이라든지 사회적인 타이틀, 재물 등의 허울을 벗겨낸 후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자신의 직업이나 사회적인 타이틀을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답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주시고 “거기에 합당하게 살라”고 요구하셨지, “합당하게 살면 내 백성으로 불러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이라고 불러 주셨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에 따른 열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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