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람 (행 4:13-22)

  • 잡초 잡초
  • 215
  • 0

첨부 1


- 김성철 목사 (왕십리교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19-20)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 후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이하게 여기는 무리에게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전함으로 믿는 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들은 먼저 그들이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심문하는 그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주저함과 망설임 없이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천하 인간을 구원할 이름임을 기탄 없이 말했습니다.

심문하던 무리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자들임을 알고, 본래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그들의 말함이 범상치 않음으로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앉은뱅이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 산 증인으로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 할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내어보내기 하고 불러ꡒ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ꡓ고 위협하며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위협하는 무리들에게 그럴 수 없음을 담대하고 용기 있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본래 이들은 비겁하고 겁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뿐 아니라 저주하기까지 하고 배반하며 도망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분명하고 담대하며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이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성육화 된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에 대하여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ꡓ(3:16)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을 말하는데 이 믿음은 성육화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내 안에서 성육화 될 때에 그 믿음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분명한 믿음이 되고 앉은뱅이까지 일으키는 살아있고 능력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우리의 살이 되고 뼈가 되어 우리의 몸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육화된 믿음이라 함은 예수님이 내 안에서 함께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고 예수님의 지혜가 내 지혜가 되며 예수님의 성품이 내 성품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육화 되어지는 믿음이 될 때 우리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충만을 받았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화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성육화 되어질 때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성육화 될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육화의 신앙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리스도의 역사를 일으키는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에서ꡒ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ꡓ(요15:7)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성육화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육화 될 때 그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코는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면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부르며 프란시스코의 머리와 어깨에 앉았습니다. 성 프란시스코는 그의 모습에서 평화가 넘쳐남으로 미물인 새들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머리와 어깨에 앉았던 것입니다. 프란시스코의 위대성은 그 안에 평화의 예수님이 성육화 되어 주님의 평화로움을 나타내는 평화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프란시스코 안에서 사랑과 평화의 성육화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새들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고 우리는 그를 위대한 성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 사랑과 능력이 우리 안에서 성육화 되어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이 성육화 된 믿음은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제자들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어느 무엇도 말릴 수 없는 분명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가둔 무리들은 그들을 불러 엄히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질 때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신앙,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신앙,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실의 노예로 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 사상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좋은 음식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을 더 귀중히 여겼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왕권을 자랑하기 위해 큰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속에 던지겠다고 했지만 다니엘의 친구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왕 이외의 것을 경배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겠다고 했지만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씩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이라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앞에 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앞에 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셨고 굶주린 사자굴에서도 사자들의 입을 봉하셔서 그들을 구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앞에 두는 사람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들이고 축복의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재판을 받기 위해 브롬스로 향하면서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만약 보름스 법정의 지붕의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들끓고 있을지라도 나는 보름스로 가겠다ꡓ고 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모습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신앙입니다. 오늘 이 시대 속에 사단은 절망적인 말, 회의적인 말, 부정적인 말, 불신의 말을 잘 듣도록 인간을 조정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삶은 어두움과 비관과 절망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과 능력과 우리를 축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서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두고 언제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체험의 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는 무리들에게ꡒ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ꡓ고 했습니다. 이것은 체험 속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태어나서 사십여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아왔던 병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용기는 세 가지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로 무지할 때 나오는 용기가 있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이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는 용기가 아닌 만용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본성적으로 나오는 용기입니다. 이것은 성격에서 나오는 용기를 말합니다. 셋째는 참된 지식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이런 모든 용기는 일시적이거나 곧 식어버리는 용기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체험을 통한 확신에서 나오는 용기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순교자들의 신앙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체험의 확신에서 나오는 용기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신앙의 체험은 무엇이고 그 체험을 통한 확신은 무엇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이름의 생명과 능력의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십여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이 체험의 확신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 때에 그들의 심령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건인 성령의 강림과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체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ꡒ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ꡓ(요일1:1)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ꡐ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ꡑ으로 소개하며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체험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식과 이론으로 아는 예수는 남에게 전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체험으로 만난 예수님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믿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한다(요일1:2)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 변화와 확신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체험을 가진 확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럼으로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용기 있는 변화와 축복의 삶을 창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