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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홀로서기와 더불어의 삶 (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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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이용호 목사 (서울영천교회)

설교내용

  홀로서기, single로 바로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 공생도 아주 중요합니다. 본문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홀로의 삶,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공생의 삶, 이런 원리가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 이하에서 11절을 보면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서로의 짐을 지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현대사회의 화두는 공생

  오늘 우리 사회의 시급한 화두는 공생입니다. 함께 사는 것,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선거가 있은 후 여야 모두 한 입으로 계속 말했던 화두가 상생의 정치, 서로 사는 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세 가지 세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땀 흘린 세대, 그리고 오늘을 책임지고 있는 세대, 또 미래를 책임질 자라는 세대입니다. 과거에 땀 흘린 세대들은 무능이 아니고 공경과 섬김의 대상입니다. 오늘날 수고하는 세대들은 격려와 협조의 대상입니다. 미래에 수고할 세대들은 투자하고 양육할 세대들입니다. 이 세대가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오늘의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층별로, 학력별로, 연령별로, 이념별로, 지역별로 사분오열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시사평론가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자화상은 갈갈이 찢겨져 있다.” 사회통합을 책임져야 할 정치지도자들도 사분오열이 되어 있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심지어 그것을 즐기며 살아왔던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인들은 어떤 공생의 삶을 살아왔느냐? 얼마나 혼자서 바로 서 있으며, 얼마나 함께 공생하는 신앙생활을 해왔느냐? 이것을 한번 물어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나도 잘 되고 너도 잘 되기를 바랍니다. 모두 일 잘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왜 잘 안 되느냐? 여기에 저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공생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함께 잘해 보자고는 하면서도 함께 잘 한다는 그 의미를 모릅니다. 내용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함께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될 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상생하자, 공생하자, 함께 잘 하자고 합니다. 또 하나는 홀로 서기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 서기를 못하고 있으면서도 잘 하자고 합니다. 지금 자기도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잘 하자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잘 하자고 나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가지 문제를 풀어봅시다. 공생을 하려면 공생의 그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있는 대로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본다” 즉 공생한다, 함께 잘 한다는 이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생하려면, 하나님 앞에 성공하고 승리하려면 가장 일반적인 것부터 해야 됩니다.

  법을 지키자

  첫째는 법을 지켜야 됩니다. 나 혼자 살면 법이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려면 법을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지켜야 될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켜야 될 법이 있습니다. 혼자 무인도에서 신앙생활 할 때는 교회법도 필요 없고 교회헌법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살려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법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법 중에 구원의 법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어겼다고 해서 스티커나 과태료가 날라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오늘 우리에게 엄격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살면 우리 주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 계산해놓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님 계명을 무시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법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믿고 살면서 하나님의 법을 안 지키면 하나님과 더불어 공생이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내가 함께 해야 되는데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서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인간사회를 통합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 장치가 무시되는 수가 많습니다. 왜 우리는 교통법규를 지켜야 됩니까? 왜 빨간 불일 때는 서야 됩니까? 왜 파란 불일 때는 가야 됩니까? 왜 그렇습니까? 더불어 살기 때문입니다.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에 교통법규를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미국이민을 와 가지고 적응이 잘 안 되었을 때입니다. 주택가 제한속도가 시속 30마일인데 과속을 한 것입니다. 45마일로 감시 카메라에 찍혔습니다. 그런데 벌금이 500불, 우리나라 돈으로 60만원이 나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세상에 무슨 벌금이 이렇게 많이 나오느냐? 해서 시 교통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시 교통위원회에서 그 문제 때문에 회의를 했는데 그 죄명이 아주 무시무시합니다. ‘당신이 범한 과속은 살인속도다’라는 것입니다. 남을 죽이는 살인속도이기 때문에 벌금이 중하다는 것입니다.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죽이는 속도기 때문에 당신의 속도위반은 평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교통위원회의 회의경비 50불까지 얹혀서 550불을 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불법영업이 너무 많습니다. 법이 아닌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위법한 공생의 질서가 우리 사회에 너무 많습니다. 무자격자들이 판을 치고, 자격 있는 사람들은 자격증을 불법으로 대여해 주면서 무자격자들의 영업을 도와주는 그런 행태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게 잘 안되느냐? 기본법을 잘 안 지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야 됩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지키면서 함께 일해야 공생이 됩니다.

  자발적 섬김

  두 번째는 도덕성이 살아 있어야 됩니다. 법만 가지고 함께 안 됩니다. 그 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게 도덕성입니다. 도덕성을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 섬김을 말합니다. 신앙세계는 법을 가지고 안 됩니다. 당회가 기준에 미달하는 교인들을 기준을 정해놓고 이만큼 안 하면 치리한다, 법을 가지고 그렇게 신앙지도를 한다고 됩니까? 그와 같은 폭력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자발적 섬김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섬김을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섬김이 바로 도덕성입니다.

  2002년 6월에 월드컵의 열기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태리와 우리나라가 경기를 하던 날, 전국이 굉장했습니다. 응원의 절정이 이태리전인데 그때 우리 응원문화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시청 앞 광화문의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다 치우고 거리가 깨끗해졌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후문을 들으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TV카메라는 거리를 청소하는 청년들만 비추었습니다. 서울시 용역청소차가 밤새도록 쓰레기를 치웠다는 것입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운동장에 경기가 끝나고 나면 밤새도록 청소업체 직원들이 청소를 해야 됩니다. 한강둔치나 경치 좋은 유원지에 가보십시오. 해변이고 어디고 예외가 없습니다. 자발적인 그런 섬김과 봉사가 없습니다.

  열차를 타보면 아주 곤혹스럽습니다. 한번은 예약을 안 하고 표를 끊었는데 직원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은 선생님이 원하는 좌석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디든 좌석이 있는데로 끊으십시오. 아이들이 타는 열차가 있는데 거기도 괜찮습니까?”라고 합니다. KTX에서 그런 좌석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약을 하지 않아 할 수 없이 타게 되었는데 정말 난장판이었습니다. 하나, 둘도 아니니까 말릴 수도 없는데 아이들은 그렇게 떠들어도 어른들은 태연합니다. 제가 그 미국에 가서 열차나 비행기를 자주 타보았는데 한 번도 그런 예가 없습니다. 앞에 앉은 사람부터 내리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차가 멈추기 전에 벌써 일어나는 사람이 나옵니다. 비행기가 바로 서는 그 시간에 맞추어서 뒷좌석에서 튀어나오는 사람이 몇 사람씩 있습니다. 급한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남을 섬긴다는 자발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억압당한 민족의 습성이 있어서 그런지 억압 속에서는 잘 합니다. 몽둥이 앞에서는 겁 안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발성이 있는 봉사를 하는데는 기초가 너무나 안 되어 있습니다. 이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이렇게 오래 믿었다면 자발적인 섬김이 거기에 정비례해야 됩니다. 오래 믿을수록 더 인색하고 더 마음이 닫히고 더 폐쇄적인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공생의 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공생의 원리는 자발적인 섬김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섬겨야

  세 번째,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을 해야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강도만난 자에게 가서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서 치료해 주고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이 사람에게 치료비가 더 들면 이걸로 하라고 그 사람의 여비까지 주고 갔습니다. 그게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 물질을 나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보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바로 네 이웃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레위인이냐? 제사장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렇다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답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는가?”라고 물었던 그 율법사에게 주님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생이라는 것은 내 것을 주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나누어야 공생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포도주, 자기 기름, 자기 여비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도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강도만난 자를 위해서 자기 것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공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공생의 능력과 영향력이 일어나지 않는가? 제사장처럼 보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처럼 보고 지나가는 거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자기 포도주를 붓고, 자기 기름을 붓고, 자기 주머니를 털어 여비를 주는 거기에 이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이런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마음으로 사람을 품으라

  네 번째, 사람을 마음으로 품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마음으로부터 선을 그어놓고 거부하는 이런 인간관계가 아주 많습니다. 말은 서로 하고 만나기도 하고 음료수도 같이 마시고 하는데도 마음에는 그 사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공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교단의 몇 가지 일을 보고 있으면서 특별히 특별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전권위원회 같은 이런 회의는 아주 어려운 회의입니다. 회의 때마다 서로 회원들끼리 의견이 부딪힙니다. 굉장히 까다롭고 예민한 회의입니다. 또 회의가 몇 시간씩 갑니다. 그런데 회의를 한번 하고 나면 무엇이 남느냐 하면 회의할 때 서로 부딪힌 사람끼리의 감정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의는 한번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난 번 회의 때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안고 다음 회의를 하면 회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행동이나 말은 어떻게 하든 그 사람도 그 멤버도 하나님이 세운 멤버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교단을 섬기라고 세운 멤버로 상대방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회의를 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받아주고 일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사람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홀로서기의 길

  신명기 23장 24,25절에 보면 “네 이웃에 포도원에 들어갈 때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울 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그 손으로 이삭을 따고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수혜자의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규칙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포도를 따먹더라도 그릇에 담지는 말아라, 네가 이삭을 잘라서 비벼먹는 것은 되지만 낫을 가져가서 베어서 가지고 오지는 말아라,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율법을 보면 왜 하나님이 이런 법을 주시는가? 아주 묘합니다. 여호수아 5장 10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달 40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날의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고 합니다. 이 세 구절을 잘 보면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40년 동안 만나를 내려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이제 여리고 성을 파고 길갈에 진을 쳐 거기서 유월절을 지켰는데 그 유월절에 곡식을 먹었는데 그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농사를 지어서 자립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하늘에서 계속 만나를 내려주는 시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너희들이 농사해서 먹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밭에 가서 따 먹는 것은 가하지만 그릇에 담아오는 것은 하지 말라, 하나님이 왜 이런 것은 금했는가? 하나님께서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얻어먹게는 하는데 계속 공짜로 얻어먹는 거지 근성은 하나님이 용납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공짜로 주셨는데 이것은 광야에서 한 때 주시는 것이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까지 주시지 않습니다. 이 언약의 땅에서는 독립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립이라고 할 때 가장 입체적으로 자립을 보아야 되는데 그 중에 실제적인 자립이 경제적 자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경제적 자립을 먼저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만나가 없다, 너희들이 농사해서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자립은 내가 돈을 벌어서 내 욕심을 이루는 욕구충족의 측면에서 자립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자립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경제적 자립

  빌립보서 4장 12절에 보면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합니다. 여기 주님이 말씀하는 것은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족하며 감사하면서 사는 게 성경이 말하는 경제적 자립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풍부하다고 감사신앙이 정비례하고 궁핍하다고 감사신앙이 정비례로 삭감이 됩니까? 우리는 풍부에도 적응하고 궁핍에도 적응하며 사는 그걸 가리켜서 경제적 자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개념입니다. 영적으로 자립성을 가져야 됩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는 이런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아직도 경제적 자립성을 못 깨우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만족이고 자족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자족감이 있는 사람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더라도 거지근성을 키워주면 안됩니다. 요즘 마마보이들, 티쳐보이들 같은 혼자 독립 못하는 신세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혼자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해자가 되더라도 그 시해는 우리가 한번 도와주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립성을 길러주는데 도움이 되는 타이밍을 맞추어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수혜자는 한번 받고 일어나야지, 평생 받는 자의 입장에서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인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독립 못하는, 자립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을 오랫동안 관계를 합니다. 제가 졸업을 그 학교에서 했고 24년 동안 그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제 돈을 가지고 학생들을 도와준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에 심부름을 꽤 많이 했습니다. 한 5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일에 24년 동안에 제가 수고를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떤 분이 부모장래를 치르고 나서 제게 그 부의금의 십일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써 달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교 강의하러 가니까 어느 학생 하나가 얼굴이 창백하였습니다. ‘저 학생이 누군가?’ 내 반에 들어오는 학생은 아니고 해서 학생처에 가서 물어보니까 그 학생이 3학년으로 마지막 학기를 등록하고 졸업을 해야 되는데 지금 등록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 하나님께서 이 돈을 저 학생에게 주게 하시는가 보다’ 하고 학생처 직원과 은밀히 약속을 했습니다. 이 돈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니까 전하는 내 이름도 밝히지 말고 이 돈이 누구 돈인지도 알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네게 준 돈이니까 그렇게 알고 받으라 전달하라고 제가 그 돈을 주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이 학생은 얼굴색이 확 피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름도 압니다. 그 이후 졸업을 해서 지금 강도사로서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도와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도움 받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잘 되고 잘못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그러나 도움 받는 사람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을 받아서 거지근성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자립하는 길로 살아가게 되는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행위의 자립

  두 번째, 행위의 자립입니다. 내가 할 일을 내가 할 줄 아는, 내 행동에 내가 책임지는 자립입니다. 이것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할 일을 자기가 안 해올 때 남이 힘듭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깨달음으로 가고 깨달아서 믿게 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듣는데서 부터 행하는데 까지 묶어져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어야 됩니다. 깨닫기 바랍니다.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하기 바랍니다. 행함의 자립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청소년 15%가 소변을 서서 누질 못한다고 합니다. 좌변기에 앉아서라야 소변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게 왜 그런가? 그 철부지 사내 애들이 소변기에 눌 때 한 방울도 안 새게 바로 누는 애가 어디 있습니까? 변기가 더러워지고 하니까 엄마들이 아예 어릴 때부터 좌변기에 앉혀서 오줌을 누도록 습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성장해 가지고도 아이들 15%가 서서는 오줌 누는 게 정상적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좌변기에 앉아야 심리적으로도 오줌이 안정되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행위의 자립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기 되면 가끔 이런 뉴스가 나옵니다. 아마 해마다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주 마음이 아픕니다. 그 어려운 과외공부해서, 치열한 입시전쟁해서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신입생 수련회에 가서 선배들이 사발에다가 술을 담아가지고는 신고식을 한다고 먹인 것입니다. 그것을 안 받아 먹으면 완전히 왕따가 되겠고, 또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남자답지 못하다고 밀어붙이니까 술도 못 먹는 애가 억지로 먹고는 그 부작용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건입니다. 술을 안 받아먹는다고 왕따시키는 그 애도 희망이 없고, 이거 안 받아먹으면 왕따 당하니까 죽는 줄도 모르고 받아먹는 그 애도 아주 한심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그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힘드는 고비고비 넘겨서 부모의 기대를 가지고 대학입학을 했는데 못 먹는 술을 받아먹고 죽는 그런 죽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지고 보면 자기행동에 대한 독립성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 행동에 대한 독립성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 40만명이 신용불량자라고 합니다. 신용불량자라고 다 매도하면 안됩니다. 억울하게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도 많이 있고 또 부득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40%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입도 없는데 뒷감당도 못하면서 무작정 긁어댔다는 것입니다. 이건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우리들의 미숙함 때문에 나타나는 사회의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가짜 명품의 천국이 대한민국입니다. 정당한 행위가 없습니다. 자립성이 없습니다.

  영적인 자립

  세 번째, 영적인 자립입니다. 이 영적인 자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관찰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주5일제 때문에 우리가 지금 큰 도전 앞에 있는데 중요한 것은 영적인 자립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영적인 자립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요즘 한국의 목사님 수가 3년 전에 6만명이 돌파를 했고 지금은 그 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목회자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영적으로 자립성이 없는 부실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상황목회다, 무슨 치유목회다, sall 목회다, 멘토링 목회다 하는 온갖 목회세미나가 있는데 교회는 없으면서, 목회도 안 되면서 그런데만 몰려다니는 부류들이 더러 많습니다. 불건전한 기도원이 너무 많습니다. 정체불명의 신학교가 너무 많습니다. 여기 저기 가정교회들이 지금 자꾸 생겨납니다.

  유사기독교상담소에서 한 때 기도원을 점검해 본 적이 있습니다. 불건전한 기도원과 건전한 기도원을 점검했는데 지금도 목사수도 많아가고 기도원도 많아가고 신학교도 생겨나고 이제는 굵직굴직 하게는 무허가 신학교가 잘 안됩니다. 이제는 숨어서 합니다. 그리고 그런데서 건전한 신학교육이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만들어 내느냐? 은사꾼을 만들어내고 기도꾼을 만들어냅니다. ‘꾼’들을 만들어 냅니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이단이라고 규정했던 그 사람들끼리 뭉쳐서 ‘우리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지금 떠들고 나옵니다. 영적으로 자립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어디에 가서 안수 받아야 되고 예언 받아야 됩니까? 아직도 그렇습니까? 아직도 유치원 아이처럼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와야 됩니까? 꾼들을 조심하세요. 기도해주러 다니는 꾼들을 조심하세요. 예언해주러 다니는 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중대한 도전입니다. 꾼들을 만들어내는 신학교가 자꾸 생겨나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목회자 키워서 교회개척을 못하니까 결국 꾼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영적으로 자립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근사하게 믿는 것 같은데 옆에 가서 보면 하나님이 내게 무얼 요구하시는지 그걸 모르고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엉뚱한 것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제발 하나님 말씀 바로 듣고 영적으로 자립하라는 말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왜 못 깨닫고, 왜 못 믿고, 왜 못 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행함에 까지 못 가면 귀가 있어도 못 들은 것과 같습니다. 행함이 없는 자를 향해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귀로 들었느냐 깨닫고 믿으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가 홀로서기를 해야 되는데 경제적으로 얹혀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의 자립성을 가지자, 즉 내 행동에 내가 책임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자립하자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확고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홀로서기를 할 줄 알아야, 그런 사람끼리 모여야 함께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는 사람끼리 모이면 무책임합니다. 그게 안 되는 사람끼리 일어나면 법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섬김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홀로서는 것과 공생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둘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여기에서 나도 살고, 내가 홀로 서 있는 바로 여기에서 함께 일하는 것도 바로 되는 것입니다. 한 쪽이 바로 될 때 둘 다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서기와 더불어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결국은 구절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신약서신, 모세오경도 그렇습니다. 모세오경에 왜 하나님이 그렇게 법을 많이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로 세울 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율법이 있었고 그런 엄격한 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홀로서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데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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