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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선택을 분명히 하라! (왕상 18: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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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오주철 (영신교회)

어떤 여자가 자기에게 청혼한 남자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당신이 옛날 저의 애인처럼 백 날 밤을 찾아와 주신다면 당신 뜻대로 결혼하겠어요." 그 날 밤부터 남자는 비가 오가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 여자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집 앞의 큰 나무 밑에 밤마다 금을 그어 놓았습니다. 아흔 아홉째 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습니다. 여자는 비바람 속에서 금을 긋고 있는 남자에게 뛰어가서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어요. 백 번째 밤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우리 결혼해요!"
그러자, 그 남자는 사색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르바이트생인데요."

우리들 가운데도 어쩌면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정체성, 자존감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내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좀 실수를 했습니다. 내가 좀 연약합니다. 결단력이 부족합니다. 뭔가 내 뜻대로 안됩니다. 뭔가 기도가 내 시간에 맞추어서 응답이 안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정한 때는 나의 때와는 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과 같이 하나님이 예비한 것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더 크고 더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절대적인 의지와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따라 가십시오.

가만히 보면, 일은 자신이 저질러놓고 그 결과를 하나님 더러 책임을 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감정을 가지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데리고 놀려고 하는 그런 믿음을 버리십시오. 이제 우리의 신앙도 보다 성숙한 신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성숙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숙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꼬여갑니까? 무엇이 잘 안됩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장래에 대한 것이 불확실합니까? 뭔가 아무리 봐도 내 생각대로 잘 안되고 있습니까?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꾀를 쓸까요? 속여 볼까요? 컨닝을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합력해서 풀리는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얽혔습니까? 묶였습니까? 자유가 다 떠났습니까? 불확실합니까? 두렵습니까? 도저히 내 힘으로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살아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점점 더 묶입니까? 일을 이루시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 일을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제가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가짜 믿음들은 어려울 때 떠나갑니다. 정말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을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은 교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증인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믿었더니 고비 고비마다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싫든 좋든 많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선택에도 반드시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선택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선택을 한번 잘못하고 나면 끝없는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어떤 불행한 체험이나 상황이 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으로만 살아갑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대로 산다고 했을 때에 지금 당장에는 되지 않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기분대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혈기를 따라서 살지도 마십시오. 모든 선택된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이 강요하는 것을 할 수도 있고, 이길 수 있는 선택의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해도 내 힘만으로는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피곤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절망하는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순간 순간마다 내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권능이 나로 하여금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피곤하고 힘이 들 때마다 주의 성령께서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성령의 샘 솟듯하는 기쁨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이 땅에는 상황에 굴복하는 사람과 상황을 극복하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교양도 갖춥니다. 돈도 벌고 매일 열심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밀 듯 밀려오는 험난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내 속에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나를 이기게 하고,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의 꿈을 꾸십시오.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힘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다시 시작하십시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저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 속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하십시다. 우리도 다시 뜨겁게 믿음 생활을 해 보십시다. 다시 한 번 바로 믿고 바로 살아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 한 사람이 되어 보십시다. 정말로 바로 믿어서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약속의 사람이 되어 보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돼지우리와 같은 죄악된 그곳으로부터 떠나십시오. 그리고 죄악된 그 행동으로부터 단절하십시오. 일어나서 바른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행동이 없는 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아내도 속일 수 있고, 남편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변화된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드리십시오. 구체적인 결단의 모습을 보여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그 모습과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맏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 자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안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확실히 들어오십시오. 교회 사역의 중심에 들어오십시오. 여러분이 기왕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하셨다면 확실히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자기의 존재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맏아들이 집 밖에 있었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 자녀됨의 존재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등장하는 엘리야는 주전 7세기경 아합왕이 통치하던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아합왕이 통치하던 그 시대에는 비교적 국방력을 어느 시대보다 튼튼하게 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돈 왕의 딸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여 정략 결혼을 하게 되고, 이세벨은 이스라엘 전역에 온통 바알 신전과 제단을 세우게 합니다. 심지어는 궁전과 수풀 동산에까지 신당이 세워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활동하던 그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왕후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멸하고, 백성들에게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아합왕을 꾸짖고 이 땅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전 국토는 가뭄으로 타 들어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임한 이스라엘 땅에는 그렇게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하십니다. 양측의 대결은 엘리야가 제의한 대로 갈멜산 정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아합 왕은 물론이거니와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왕의 비호를 받으면서 나와 있습니다. 왕이 나온 자리이니 그를 따르는 무리 또한 얼마나 많았겠으며, 이 역사적인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앞에 선 엘리야는 오직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지금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이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 말씀 앞에서 여러분에게 세 번째 시간으로 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확실히 선택하셨습니까? 아직도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방황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방황하는 중요한 이유는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옛말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야고보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그는 이중 인격자이며 언제나 자기가 하는 일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바른 신앙생활을 못합니까? 왜 자꾸만 넘어지고 방황합니까?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음의 생활을 한다지만 여전히 세상 향락에 묻혀 있습니다. 그가 교회에 나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단언하거니와 이런 사람은 결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결국에는 스스로 넘어지고 시험에 듭니다.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헤매일 때에도 하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분명한 신앙적 결단을 내리십시오. 저는 오늘 우리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겸하여 섬겼습니다. 엘리야는 이들의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기에서 "머뭇머뭇 하느냐?"의 원어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은 한번은 하나님 편에, 한번은 세상 편에 섰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또 한번은 바알을 자기 신으로 불렀습니다. 요동하는 갈대처럼, 출렁이는 파도처럼 갈팡질팡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적인 신앙을 질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아합과 이세벨이 너무 무섭게 핍박을 하니까 바알신을 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아, 용기를 내라. 핍박과 환란이 있더라도 믿음을 버리지 말고 굳게 서라"고 격려하고 위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중적인 신앙에서 분명한 선택을 촉구하는 긴박한 메시지입니다. 당시 바알은 생산을 주관하는 신이요, 그 땅에 풍년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신은 여신입니다. 사람들은 이들 두 신이 질투하고 싸우면 인간 사회는 고통을 당하고 흉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면 인간 사회도 평안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이들 두 신이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남녀가 그들의 성전에서 성 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 산당과 아세라 산당에는 언제나 창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유익 때문에 기회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바알을 섬기는 것이 훨씬 더 재미가 있고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들이 거룩하게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정욕을 따라 불나방처럼 방황하는 저들이 바른 믿음의 길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바알을 선택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결단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동일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과 세상 양쪽에 다리를 걸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분명한 믿음을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겨워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 이중적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내 신앙을 분명히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존재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뜨겁든지 차든지 말입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세상에 뒤섞어 살아가는 혼합주의를 거부하십시오.

오늘 성경에 보면,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아서 모두가 기갈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산으로 부릅니다. 도대체 어느 신이 참 신인지 대결을 벌여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엘리야 앞에 섰습니다. 지금 갈멜산 꼭대기에서는 850 대 1이라는 이상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이 모습을 보려고 이스라엘 각지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듭니다. 이 어리석은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결단을 촉구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이중적이고 분명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엘리야의 뜨거운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전히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의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이해합니다. 바른 믿음을 선택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교우들을 보면 제 가슴이 미어 터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는 분을 보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습니다. 제대로 믿어보지 않으면서 신앙의 자리를 흔드는 교우들을 보면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저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엘리야처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요, 내 인생의 목자라고 믿는다면 그분을 전적으로 믿으십시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중적인 행동은 이제는 제발 그만 하십시오." 결단하십시오. 엉거주춤하지 말고, 하나님과 바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솔직히 이 가뭄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이 시련과 고통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아합의 말처럼 엘리야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때문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지금 저들이 당하는 고통과 시련은 자신들의 분명하지 못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엘리야는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신앙의 선택을 분명히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결단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군가를 분명히 알고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결단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과거에 세상 풍속을 쫓던 생활이 이제는 변하여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단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분명한 신앙적 삶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럴까요? 솔직히 오늘도 예수를 믿고 말씀을 들음에도 여전히 결단을 미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을 했다면, 주일성수에 목숨을 거십시오. 주일 하루쯤은 휴대폰도 완전히 꺼두십시오. 우리는 내 모든 시간의 최우선권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모습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얼마든지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면, 하면 됩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됩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요?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왠 갈등이 그리도 많습니까? 그것은 결단 없이 예수를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대로 세상 줄을 끌고 들어옵니다. 그들은 어쩌면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세상의 어떤 취미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갖는 여가 활동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시간이 남으면 예배를 드리고, 시간이 없으면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입니까?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는 여가 활동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나의 구주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정말로 한 번 잘 믿어서 하늘의 복을 누려보자는 데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예수를 잘 믿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영원한 하늘의 백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자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는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세상을 선택하면 세상과 신앙에 둘 다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선택하면 신앙과 세상에서 다 성공합니다.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성공자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과감한 결단력입니다. 비록 잘못된 결단일지라도 빨리 결단하는 것이 머뭇거리며 결단을 미루는 것보다 낫습니다. 기왕에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철저하게 주일성수하기로 결단하십시다. 기왕에 헌금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된 헌금 생활을 하기로 결단하십시다. 기왕에 기도하는 것이라면 좀더 뜨겁게 기도하십시다. 그래야 뭐가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돈이라는 바알, 명예라는 바알, 권력이라는 바알, 욕심이라는 바알, 정욕이라는 바알. 이러니 어떻게 하나님이 도우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은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결단하지 못하고 있다면, 결국에는 심판의 자리에 설 때까지 결단하지 못하다가 지옥으로 끌려갈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믿음의 용사 100명만 주소서, 그리하면 제가 세상을 변화시키겠나이다." 저는 이 시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바른 믿음의 길을 분명하게 선택하는 성도들을 이 영신재단에 보내어 주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이 언양 땅을 변화시키고, 이 나라와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좀더 가까이 나아가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주님을 멀리 따르던 베드로는 결국 어린 계집종 앞에서 온갖 치사한 방법을 통해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나님을 멀찍이 따르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멀찍이 두고 따르면서 어떻게 그 분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주님을 가까이 따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분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멀찍이 따르니까 자꾸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타협이 아닙니다. 신앙은 분명한 결단입니다.

신앙생활을 좀 오래 한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합니다. "교회 중심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 실망하고 시험 들어" 과연 그럴까요? 그런 말을 한 사람이야 말로 사실은 교회 중심에 전적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 외곽만 서성거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더 실망하고, 더 시험 들고, 더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내 쪽에서 열심을 내려고 하지 않는데, 갑자기 열심이 생기도록 강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 큰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은 예가 없습니다.

시카고에서 '오늘의 기적'이라는 글을 쓴 에반스 크로리 여사는 그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을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낳은 3남매가 다 방탕자였습니다. 28세가 된 첫딸은 18세 때에 가출해서 뉴욕에서 창기가 되었고, 25세가 된 둘째 딸은 16세 때 학교에서 체조를 하다가 오른쪽 발에 부상을 입은 것이 마비증세가 되어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세 된 아들은 남달리 공부를 잘하는 천재적이었으나, 무신론적이고 과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어머니가 믿는 예수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알콜중독자가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크로리 여사는 가족 중 홀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인내와 사랑으로 가족들을 감싸 나가며, 기도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197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던 중에 그 날만은 온 가족이 모일 듯한 예감을 느끼고, 열심히 성탄 트리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은 1977년 12월 25일 그 가정에 시련이 끝나고, 행복을 가져오는 복된 성탄절이 되게 했습니다. 창기였던 큰딸이 그 길을 청산하고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도 대학 기숙사에서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알콜중독자인 남편 에반스도 술을 끊고 아내와 같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또 무엇보다도 다리 마비증세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둘째 딸에게 성탄절 온 가족들이 모인 곳에서 그 어머니가 눈물의 기도를 드렸는데, 그 시간에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CBS방송에서 '오늘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 방송에서 크로리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큰 기적은 온 식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정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이편저편 문제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두고 "세상이냐? 교회냐? 오늘 이것이 두 사이에서 갈라지기 때문에 가정이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알의 발걸음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결단의 시간이 왔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둘 사이에서 머뭇대고 있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바알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것인지. 이제는 신앙적 결단 분명히 내리십시오. 캄캄한 지옥의 바알 길을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빛난 천국을 향한 하나님의 길을 걸어갈 것인지 이제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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