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싸워 이기라 : 버가모교회 (계 2:12-17)

  • 잡초 잡초
  • 179
  • 0

첨부 1


- 설교자 :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영적전쟁

어느 날 마귀들의 대장인 사탄의 주재 하에 모든 마귀들이 모여 비상회의를 했습니다. 비상회의의 주제는 “오늘 이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의 편에 선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데 어떻게 하면 이 그리스도인들의 힘을 무력화하고 그들을 무너뜨려 마귀 사탄이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한 젊은 마귀가 이런 아이디어를 냅니다. “박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억누르고 감옥에 보내고 죽입시다. 그러면 겁이 나서 배교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의견은 곧 부결되고 맙니다. 이유는 옛날에 다 해봤는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하면 할수록, 죽이면 죽일수록 더 힘이 나서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 마귀가 의견을 냅니다. “돈이나 재물이나 명예로 그리스도인들을 매수합시다.” 하지만 이 의견도 부결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하고 찬송을 부르는데 이것은 돈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그 어떤 것도 예수와 바꿀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노련한 늙은 마귀가 의견을 냈는데 이 의견은 곧바로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그날 이후로 마귀들이 주로 쓰는 전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의견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내일 하자’는 마음을 심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어라, 누가 뭐라냐? 하지만 내일부터 다녀라.” “교회 다녀라, 아무도 안 말린다. 하지만 내일부터 다녀라.” “헌금해라, 봉사도 해라, 뭐든지 다 해라. 하지만 내일부터 해라.” 하는 마음을 심어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심어주면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이 풀어지고 점점 나태해져서 그만 다 시험에 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할 때 결코 편안하게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결코 긴장감과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긴장감이 풀어지고 느슨해지면 그것은 곧 패배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귀 사탄은 방금 말씀드린 이야기처럼 아주 고단수의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 그 고단수 전략이란 바로 화해전략입니다. 사탄은 박해보다 화해 제스처를 통해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 안일한 자세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평화롭고 편안한 나머지 긴장감이 풀어지고 경계심이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긴장감이 풀어지고 경계심이 사라지면 게을러집니다. 그래서 타락하고 시험에 들고 결국 마귀 사탄의 의도대로 영적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 사탄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12절과 16절에 나온 말씀처럼 우리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즉 손에 칼을 쥐고 전쟁터에서 싸우는 용사로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물론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적어도 이 마귀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만은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하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주님을 따라 이 치열한 영적전투에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전쟁의 원리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늘도 그저 편안하게 나태하게 신앙생활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태하고 게으른 패잔병들을 우리 주님은 강력하게 책망하십니다.




버가모와 버가모교회

오늘 본문에 보면 버가모교회가 등장합니다. 버가모라는 도시는 서머나 북쪽 100km 지점에 위치한 무시아주의 수도였고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권력과 정치의 도시로서 황제예배의 본거지였습니다. 황제숭배 외에도 우상숭배가 성행하여 제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우스 신을 섬기며 이들의 신전이 온 도시에 즐비했습니다. 이 가운데 버가모 도시의 대표적인 신은 아스클레피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의학의 신이었습니다. 이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우스는 뱀 모양을 하고 있었고 오늘날도 의사를 표현하는 문장(로고)을 자세히 보면 뱀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 도시의 높은 언덕 위에 아테네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 정면에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곳엔 아스클레피우스의 신전이 있어 뱀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이 신전에 참배하면 병이 낫는 기적이 있다고 하여 각처에서 순례자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뱀이 사단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볼 때 본문 13절에 나오는 ‘사단의 위(보좌)’란 아마도 이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우상의 도시 버가모에 어떻게 버가모교회가 세워졌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버가모교회가 당시 2중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어려움은 바로 교회 외부로부터의 공격으로 이 도시에 만연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였습니다. 특별히 버가모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이에 따르지 않는 버가모교회 성도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또 한 가지의 어려움은 바로 교회 내부로부터의 위협으로 본문에 발람의 교훈 혹은 니골라당의 교훈이라고 표현된 이단사상의 침투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외부적 공격인 우상숭배는 잘 이겨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반대로 내부적 위협인 이단사상은 이겨내지 못해 책망을 받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칭찬

먼저 버가모교회가 주님께 어떤 칭찬을 받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칭찬의 내용은 본문 1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버가모교회는 외부적 공격인 박해는 잘 이겨냈습니다. 13절 첫머리에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버가모라는 도시가 사단의 위(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의 본거지요 이것을 따르지 않는 성도들을 가차 없이 박해하고 죽이는 도시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이 황제숭배우상숭배의 본거지인 버가모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사는 곳’ 할 때 ‘산다’는 말은 헬라어로 잠시 머문다는 뜻이 아닌 영구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아무리 핍박과 고난이 닥쳐와도 이 버가모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박해가 무서워 피해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호랑이굴 안에 살면서 박해를 견뎌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고 칭찬을 받습니다. 이 말은 로마황제 숭배를 강요받아도 결코 로마 황제가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순교를 당할지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안디바입니다. 안디바라는 이름은 ‘모두를 대적하는 자’라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로마황제숭배에 대항해 순교한 버가모 성도였습니다. 안디바는 전설에 의하면 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놋으로 만든 철판 위에서 산채로 구워져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버가모교회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순교까지 당한 교회로 정말 주님께 칭찬 받아 마땅한 교회였습니다.




책망

하지만 주님은 이 칭찬에 이어 14절에서 버가모교회에 ‘두어 가지’ 책망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버가모교회가 책망 받을만한 두어 가지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외부적인 위협인 박해는 이겨냈지만 교회 내부적 위협은 이겨내지 못한 일입니다. 버가모교회 안에 발람의 교훈 혹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가 있었고 교회가 그들을 잘라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14절에 나오는 발람의 교훈이란 민수기 22~25장, 31장에 나오는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선지자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했으나 하나님이 막으셔서 결국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축복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중에 결국 돈에 팔려 모압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게 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입니다.

또한 15절에 나오는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방금 말씀드린 발람의 교훈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니골라당이란 당시 무율법주의를 표방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들로 음행과 우상의 제물 먹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는 문제는 당시 이방사회 속에 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문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8~10장에 보면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는데 당시의 고대 도시에서는 종교제사에 사용된 음식들을 사제들이 먹었지만 미처 다 먹지 못하고 남은 제물들은 시장에서 판매하였습니다. 사실 제사에 사용되지 아니한 고기도 있었지만 두 가지를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산 고기를 그리스도인들이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 고린도교회의 큰 문제 거리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오염된 음식을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또 한편에서는 니골라당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우상제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버가모교회에서는 바로 이러한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큰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내부에 침투하여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미혹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버가모교회를 향해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시는데(16절) 여기서 회개란 바로 니골라당 이단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하게 몰아내는 일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실천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진정 회개한다면 그 죄악을 분명히 끊고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말로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회개는 거짓입니다. 주님도 진정 회개한다면 버가모교회 안에서 이 이단들을 단호히 몰아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버가모교회 안에는 순교를 이겨낸 성도들과 니골라당 우상숭배자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12절과 16절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이들을 분명히 나누고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싸워 이기라

오늘 우리는 이 버가모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버가모교회를 향해 주신 칭찬과 책망을 보며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버거모교회가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2중의 공격을 받으며 고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들도 또 교회도 외부적 내부적 공격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이 공격을 잘 이겨내고 극복하면 승리하는 교회가 됩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온 국민이 열광하며 사기가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마찬가지로 승리하는 교회와 성도들도 힘을 얻고 사기가 높아지며 주님께 칭찬을 받아 큰 상급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영적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성도들은 패잔병이 되어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어떤 의욕도 다 잃게 됩니다. 교회 안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싸움과 다툼과 비방이 만연하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분란을 겪고 쪼개지고 수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입어 신앙을 잃게 됩니다. 마귀 사탄이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결과가 오게 되는 것이지요.

이 공격은 교회 외부에서 박해와 순교의 형태로 오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 내부에서 분열과 다툼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외부적 공격과 내부적 공격 중 어떤 것이 더 무서울까요? 외부적 공격보다 내부적 위협이 더 무섭습니다. 로마가 외부적으로 이민족의 공격을 받아 망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내부적으로 썩어서 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 성도들이 시험에 드는 것은 외부적인 핍박과 고난보다 내부적인 갈등이 더 큰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하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어디 외부적으로 공격 받고 박해 받아서 어려워지던가요? 오히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교회와 성도들은 똘똘 뭉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잘 아는 마귀 사탄은 이제는 눈에 보이는 박해와 고난으로 공격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게 교회 내부로부터 갈등과 문제를 일으켜 우리가 내부로부터 서서히 무너지게 만듭니다. 교인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목회자와 성도 간에 불신을 심어주고, 교회 안에서 온갖 구설수와 비난을 일으켜서 우리가 내부로부터 힘을 잃고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고단수의 전략을 쓴다는 것입니다. 성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어렵게 만듭니다.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친구들, 심지어 같은 교회 성도들끼리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는 정말 힘들어집니다. 또 내 자신의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게 만들고 긴장감이 풀어져 점점 나태하게 만들어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 더 무서운 전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버가모교회에 요구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강력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버가모교회가 발람과 나골라당의 교훈을 단호하게 끊지 못해 책망 받았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과 잘못을 분명하게 끊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남의 잘못과 부족함을 먼저 보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죄악과 부족함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먼저 보지 말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달아’(눅 6:41) 그것을 먼저 단호하게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외부적인 박해에는 순교까지 하면서 이겨냈지만 오히려 교회 내부의 이단적인 무리를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어주자고 했을까요? 관용을 베풀자고 했을까요? 다 아는 사인데, 같은 교인들끼리 어떻게 그렇게 무정하게 대할 수 있을까 했을까요? 바로 이런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련과 느슨한 자세 때문에 죄악을 끊지 못하는 태도는 바로 마귀 사탄이 원하는 바요 패배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기는가?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영적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방법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싸움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버가모교인들이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의 본거지요 사단의 위가 있는 버가모에서 피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 것처럼 오늘 우리는 싸움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호랑이굴에 들어가 싸워야 합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귀찮아하지도 말고 싸움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싸워 이길 수 있는지 그 무기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무기한 바로 주님이 가지고 계신 좌우에 날 선 검입니다. 이 좌우에 날선 검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우리가 마귀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마귀는 강합니다. 사탄은 무척이나 영리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싸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 영적전쟁에서 싸워 이긴 자에게 주실 상급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상급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감추어진 만나요 또 하나는 우리의 이름이 써있는 흰 돌입니다. 감추어진 만나란 무엇일까요? 버가모교회는 먹는 문제, 즉 우상의 제물 문제로 고민한 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린 만나로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과 더불어 언약궤 속에 둔 것(히 9:4)이 전설에 의하면 바벨론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망할 때 어딘가에 감추어졌는데, 장차 메시야 왕국이 임하면 예레미야에 의해 공개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전설에 의지하여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자에게는 메시야 왕국의 깨끗한 만나를 먹게 하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썩을 수밖에 없는 우상의 제물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생명의 만나, 생명의 양식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흰 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흰 돌을 초대장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즉 초대교회 당시 연회(파티) 초대권으로 ‘테세라’라고 불리는 흰 돌을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흰 돌에는 초대 받는 사람의 이름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이 쓰인 흰 돌을 주겠다는 것은 박해와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에게 나중에 주님 나라 천국 잔치에 참석할 초대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천국행 티켓을 주겠다는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오늘도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갑니다. 전쟁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편 아니면 적군만 존재합니다.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주님 편에 설지 마귀 사탄의 편에 설지 분명히 결정을 해야 합니다. 또한 전쟁에서 무승부란 없습니다. 싸워 이기지 못하면 오직 패배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마귀 사탄과 싸워 이기지 않으면 패배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넘어뜨리고 패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의 외부와 내부에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고단수의 전략으로 공격해오는 마귀 사탄의 존재를 깨닫고, ‘우는 사자같이’ 입을 크게 벌리고 오늘도 삼킬 자를 찾고 있는 대적 마귀(벧전 5:8)를 직시하여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검으로 싸워 이김으로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