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의 본보기 (창 28:10-22)

  • 잡초 잡초
  • 219
  • 0

첨부 1


- 설교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본보기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본을 받을 만한, 또는 본으로 보여 줄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귀감 또는 샘플과 같은 말입니다. 어느 상점에 많은 물건을 일일이 보지 않아도 진열대에 진열된 본보기 하나만 보면 전체를 알 수 있습니다.

모양은 어떻고, 색은 어떻고, 가격은 얼마이고, 품질이 어떤가를 샘플 하나만으로 평가합니다. 성도의 본보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야곱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본보기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조심조심 말씀에 의하여 본을 보여야 합니다. 나 하나가 바로 믿는 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I. 꿈을 가진 성도(10-12절)

1. 곤고한 때에 가지는 꿈(10-11절)

야곱이 자기 집을 떠나서 외삼촌 집으로 가는 도중에 벧엘에 이르러서는 밤중에 잠을 자는 중에 꿈을 꾸었습니다. 야곱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 쌍둥이 중에 형이 에서인데, 에서는 털이 많고 털은 우리처럼 까만게 아니고 불그죽죽해 붉다는 뜻으로 별명을 에돔이라 지었습니다. 그 후손이 에돔 족속이 되고 나중에 신약 마가복음 3장에 이두매라고 하는 말로 나옵니다. 그 이두매 자손에게서 바로 헤롯왕이 납니다.

그리고 야곱은 나중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그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예수님이 납니다. 그런데 이 쌍둥이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싸우는지 그 형이 칼을 갈아 가지고 꼭 나 죽기 전에 동생부터 먼저 죽여놓고 죽는다고 벼릅니다. 그 이유는 장자의 축복을 동생한테 빼앗겼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동생에게 축복을 하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쌍태를 배었을 때 너무너무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네 태 중에서 두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 장자의 축복은 보통 아들이 태어난 차례를 따라 받는 것이나, 우리는 작은 아들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겠구나'하고 응답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 이삭이야 그것을 압니까? 맏아들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그랬지만 그게 안 됐습니다. 눈이 어두워 가지고,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였으나 그것은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비록 몰라 속아서 장자의 축복을 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속일 수 있습니까? 사람은 속을지라도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작은 아들 야곱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형은 그저 뺏긴 것만 생각하고 칼을 갈아 죽이려고 하고, 야곱은 그 집안에 붙어 있을 수가 없으니까 어머니가 너무 급해서 그만 작은 아들을 빼내어 자기 친정으로 보냅니다. 천리가 넘고 이천 리가 가까운 거리인데, 야곱은 아직도 자기 집을 한 번도 떠나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집을 한 번도 떠나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집 떠나서는 밤에 잡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집 떠나서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러지 않습니까? 야곱이 가다가 벧엘 벌판에서 돌베개 하고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쉽게 읽습니다. 상상을 해보면 야곱이 얼마나 울며 울며 벧엘 들판까지 갔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울다가 잤겠나. 그 밤에 여고나에 들어갈 돈 한푼도 없고 저녁 먹을 양식도 없이 쓰러져, 얼마나 지쳤으며 얼마나 울다가 잠들었겠나 쉽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음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네가 가는 길에 먹을 양식과 의복을 주사"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 먼 길에 갈아입을 의복도 없고, 먹을 양식도 못 가져 왔다는 그 뜻 아닙니까? 그런 어려운 상황, 그런 곤고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꿈, 말을 바꾸면 높은 이상과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곤고한 때 그런 꿈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에, 그런 이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곤고함을 이겨내고 야곱이 야곱 되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도 곤고한 때 꼭 높은 이상을 가져야 됩니다. 꿈을 가져야 합니다.

칠흑같이 어둡고 캄캄한 밤 중 험한 풍랑이 와서 뱃전을 삼킬 듯이 둘러치는데 젊은이 하나가 키를 잡고 벌벌 떱니다. 큰 파도만 바로 보고 무척 당황해 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뒤에 와서 한 손을 어깨에 얹으시고 한 손으로는 앞을 가리킵니다. 컴컴한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좍 비쳐 오는 저 앞을 바라보라는 것이지요.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 풍랑, 내가 헤치기 어려운 풍랑이 올 때 눈을 들어 풍랑 뒤에 있는 저 소망의 세계를, 광명을 바라보십시오. 곤고한 때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2. 사닥다리의 꿈(12상반절)

야곱의 사닥다리는 땅에서부터 하늘가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성도의 삶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사닥다리는, 땅에 서 있으나 짧아서 하늘에 닿지 않습니다. 소망 없이 세상 삶에만 신경 쓰는 현실주의자들이지요. 반대로 하늘에는 닿았으나 땅에 서 있지 않은 사닥다리. 이 세상 삶이야 어찌되든 하늘의 것만 추구하는 자들의 것이지요.

천국은 이 세상과는 관계없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 꿈을 가져야 합니다.


3. 하늘에 속한 꿈(12하반절-13상반절)

사다리가 있는데 사다리에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서 찬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심부름하는 그런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이것은 땅에 속한 꿈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꿈입니다. 우리는 뭐라고 해도 하늘에 속한 꿈을 가지는 성도라야 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끌려갑니다. 거기에 누가 인솔하는가 하면 백부장이 인솔하고 바울은 결박당한채 끌려갑니다. 미항으로 가서 배를 타려고 하는데 선주와 선장도 있습니다. 배의 주인과 선장은 배를 언제 띄울 것인가의 문제로 심각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겨울철의 지중해는 바람과 풍랑이 심각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가다가 풍랑 만나 배가 파손되고 다 죽습니다. 인솔 책임을 맡은 백부장이 선주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선주는 가야 된다고 답합니다.

선주란 시간을 가지고 계산을 하며 돈에 울고 웃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장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내 기술이라면 얼마든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 믿음의 사람, 바울에게 물어보니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백부장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가다가 풍랑에 배가 부서지고 겨우 사람만 살아납니다. 그 배가 깨지기 전 풍랑 속에서 14일 동안을 굶고 이리저리 헤맬 때, 정말 절망 중에 모두 사경을 헤메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바울아, 걱정하지 마라 너는 앞으로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되고,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생명 하나라도 잃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캄캄한 밤 중 풍랑 속에서 바울은 환상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바다가 이렇게 흉흉하고 배가 깨져나가도 안 죽는다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 바울은 그런 곤고 중에서도 하나님이 보여 주신 하늘의 환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거기서 그는 확신을 얻어 남에게 평안함을 주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평안함을 주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괴로운 중에서도 마음 속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늘의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꿈을 가진 사람은 곤고와 환란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도의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하늘의 꿈을 가졌습니다.


II. 약속 받은 성도(13-15절)

1. 축복의 약속(13하반절-14절)

야곱은 지금 맨손으로 지팡이 하나만 들었습니다. 먹을 양식도 갈아입을 옷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지쳐 쓰러져 겨우 잠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네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분명히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약속만 받아 내면 됩니다. 쉽게 예를 들면 대통령한테 약속만 하나 받아내 보십시오. 무엇인가 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한테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 때 야곱이 땅 한 평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 약속 그대로 지금 그 자손들이 나라를 세우고 얼마나 잘 삽니까? 그리고 너와 네 자손이 퍼지고 퍼져서 네 자손으로 인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것은 메시야가 오시고 메시야 때문에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근본입니다. 그 다음 실제적으로는 그 자손들이 잘 되어 천하의 일꾼, 역사적인 일꾼, 세계적인 일꾼이 나와 세계에 많은 공헌을 하겠다는 뜻도 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정치가 과학자 또 기업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 조상 야곱이 그런 약속을 받았으나 누리는 건 그 후손입니다. 야곱이 받은 이런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약속해 주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권고의 약속(15상반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누구를 충고한다는 뜻의 권고가 아니라 돌아볼 '권(眷)', 돌아볼 '고(顧)' 즉 잘 돌보아 준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널 지켜서 돌보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의 보호와 동행은 가장 필요하고 값진 약속입니다.

늘 함께 계셔서 밤낮으로 어디 가든지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약속입니까? 야곱은 자기 집을 하루도 떠나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야곱의 아버지, 어머니는 저 어린 것 떠나 보내면 어떻게 살지? 어디 가나 제 밥도 못 찾아 먹고 죽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야곱이었습니다. 부모의 손길이 닿았습니까? 안 닿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가는 곳마다 지켜 주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장가 제일 잘 들었습니다. 맨 손 쥐고 장가 제일 잘들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아들 딸들 보았습니까? 그리고 이십년 만에 고향 땅에 돌아올 때는 복을 받고 이십 년만에 금의환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돌보아 주시면 다 죽을것 같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돌보고 지킨 것보다 하나님께 복보고 지킴 받은 야곱이 더 잘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아들 딸들이 내 손길이 닿는 곳에서 돌보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돌보아 주시면 야곱처럼 우리 아들 딸들도 더 잘 될 줄로 믿고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약속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소원 성취의 약속(15하반절)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민족 대이동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리운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 자매 만나 볼 수 있는 정든 곳이기에 갖은 고생하면서도 가려하는 곳입니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뛰어 놀던 고향, 날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넉넉하고 푸근한 고향, 야곱이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금 고향 떠나서 외삼촌 집으로 천 리 이천 리 길을 가는데 이제는 형님 살아 있는 동안에는, 더더욱 부모님 살아 계신 동안에는 고향에 돌아올 기약도 없습니다. 형님이 세상을 떠났다 하면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다 돌아가신 후일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떠난 날부터 돌아오고 싶어하는 것이 고향입니다. 소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아! 내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하십니다. 평생에 그렇게 원하는 소원을 이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십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소원도 이루워 준다고 하는, 야곱의 약속을 통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는, 약속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축복을 약속했고, 권고를 약속했고, 소원 성취를 약속했는데 이 것이 다 이십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III. 서원하는 성도(16-22절)

1. 깨달은 후에 서원(16-19절)

토요일 오후에, 입원한 한 성도가 당회장의 심방을 원한다고 해서 급히 병원에 갔습니다. 자녀들이 아직 어리고 나이도 이제 사십 초반인데 몹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이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기도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이왕 죽을 바에, 못 고치는 병일 바에 하나님! 나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이 몸이 열 두 조각이 나도 주님께 충성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를 안 지 얼마 안되어 학습도 못 받았는데 내가 예수 믿고 세례 받고 하나님 기뻐하는 일 좀 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소원입니다 라고 서원을 좀 해 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서원한 것 거의 다 이루어졌습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부름 받았습니다.

공산당 치하에서도 꼭 목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6.25사변 때 다른 사람들은 1.4후퇴 때 다 피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난 그 때 피난을 못 왔습니다. 공산당들이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중공군도 들어와서 젊은 사람들을 끌어가고 반동 분자라고 때려 죽였지요. 그럴 때 7개월을 숨어 있다가 국군 아저씨의 안내를 받아 섬으로 들어왔습니다. 옷을 입고 쌀을 지고 들어오다가 바닷가에서 인민군 만나지 않았습니까? 총을 쏘면서 따라오는데 정신 없이 벗어버리고 지녔던 것을 다 버리고 뛰다가 보니 정신이 들어 그때 하나님께 내가 서원했습니다.

'하나님! 여기서 날 살려주면 꼬옥 목사가 되어서 내 생명 다할 때까지 충성하겠습니다.' 그때 40명이 오다가 총에 맞아 다 죽고 7명만 남았습니다. 별별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내가 하나님일 한다고 약속했으니 꼭 지켜주실 것과 살려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저는 그런 확신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오늘날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한 것도, 목사 일을 하게 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심을 전 압니다. 야곱도 바로 그 때 서원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받아 놓고는 약속을 이루어 주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서원한 것입니다. 그 서원한 내용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이 경건하게 예배드리던 제단에서뿐만 아니라 피곤과 고독과 두려움 속에 잠들었던 장소에서도 나타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고자 돌로 기둥을 세워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이란 듯의 벧엘이란 새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지어 제단으로 삼아 제사를 드리겠다는 서원을 드린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2. 약속을 믿고 서원(20-21절)

야곱의 서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답 즉 깊은 믿음과 확신에 근거한 감사의 서원이었습니다.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급히 도망 나오느라 갈아입을 옷 한번 못 챙기고 먹을 양식 못 가지고 나옵니다. 가는 길에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언젠가 나를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즉 나를 이끌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을 죽을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자자손손 영원히 모시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해 주시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일을 나에게 이루어 주시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 믿고 충성하겠습니다 라는 서원입니다.

여러분, 자꾸 달라고만 하지 마시고 주신 다음에 무엇하겠습니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 부도났는데 이 부도 막아 주십시오. 자꾸 부도 막고 출세하고 성공하게만 해 달라고 그렇게만 기도했는데 그때 하나님의 음성 들어 보십시오. 너 부도 막아 주면 무얼 하겠느냐? 너 출세해서 한 자리 올라가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질문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그때 응답을 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게 서원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지말고, 주시면 또 받았으면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우리의 자세가 귀한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하는 서원입니다.


3. 온갖 충성을 서원(22절)

야곱은 훗날 이 서원을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나타나시고, 항상 함께 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인 하나님의 전을 세웁니다. 야곱 자신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믿게 하고 충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신앙, 먹을 것 입을 옷 한 벌 없던 나에게 많은 것 베풀어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니 감사함으로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제단 쌓아 하나님 경배하고 십일조 드려 감사하며 충성하겠다는 서원입니다. 즉 온갖 충성을 다 서원했습니다. 야곱이 우리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 주었듯이 꿈을 가진 성도, 약속 받은 성도, 서원하는 성도 되어 본보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