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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성곽 되시는 하나님 (슥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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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초기 한국교회사에 보면
1904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사경회,
그리고 평양 장대헌교회에서 길선주(吉善宙) 목사가 시작한 새벽기도회, 1907년 평양에서 열린 W.N.블레어 목사의 부흥회 등으로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1940년대 일제 말기에는 부흥운동이 잠시 소진하다가
6.25전쟁을 기해 남한 교회에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부흥회를 통해 전국 교회가 급성장을 하게 되고
여의도 광장에 엑스플로74, 80년 민족복음화대성회을 절정으로
한국교회성장을 세계 교회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적어도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교회는
부흥회를 통하여 많은 수적 질적 성장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와서는 교회들마다 부흥회를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부흥회 해도 교인들이 잘 안 모인다는 겁니다.
왜 교인들이 잘 안 모입니까? 부흥회의 맛을 모르니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부흥회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는 귀한 교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스가랴서는 학개서와 말라기서와 더불어 포로 후 소선지서라고 부릅니다.
본서의 저자인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이지만
학개 선지자는
학1:1절에 다리오 왕 2년 6월 초 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학개에게 임했고
스가랴 선지자는
슥1:1절에 다리오 왕 2년 8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다고 합니다.
시작은 학개 선지자가 2달 빠르지만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 보다 더 오래 남아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학개서나 스가랴서의 공통점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예루살렘의 유다 백성들이 성전재건이라는
중대한 일을 놓고 낙심 중에 있던 때
저들로 성전건축 하는 일에 격려하며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두 선지자를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메시지의 목적은 같지마는 메시지의 성격은 정 반대입니다<2>
학개 선지자의 메시지는
너희 소위를 한 번 살펴봐라,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고 잘되는 것 봤느냐?
너희가 뚫어진 전대를 차고 있구나? 라고 하면서
먼저 유다 백성들의 신앙의 무관심을 깨우쳐 주면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온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학2:19절에 성전건축에 다시 힘을 쏟는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 건축하는데 말로만 할 수 없잖아요.
성전 건축하려고 하니
1) 경제적 문제가 따릅니다.
2) 주변 이방 국가들의 노골적 방해 공작이 있습니다.
3) 내부적으로도 하나가 안됩니다.
그런데도 성전을 건축하라고 합니다.
그럼 뭐 가지고 합니까? 바로 환상입니다.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당신의 백성들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환상을 보여 줍니다.

스가랴서는 1-6장까지 8개의 환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 1:7절부터 화석류 나무 숲 사이에 홍마를 탄 사자를 보여 줍니다. 이것은 비록 화석류 나무와 같이
아무 쓸모짝 없는 유다 백성들이지만 그 가운데 홍마를 탄 사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1:18절 부터는 네 공장의 환상이 나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어디로 갑니까? 물으니
유다의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는 네 뿔을 제거하러 간다고 합니다.
이 환상은 내가 주의 일 하면
주님이 내일 해 주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말씀 3번째 환상으로서
한 사람이 측량줄을 잡고 서 있기로
[ 어디로 갑니까? ] 하고 물으니
[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 고 합니다.
오늘 이 환상과 말씀 속에서
오늘밤부터 열리는 부흥회의 진정한 의미와 맛을 볼 수 있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측량줄 잡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3>
측량줄 잡은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보라 한 사람을 !
그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목해야할 측량줄 잡은 사람은
1:8절에 나오는 홍마를 탄 사람으로서, 인간의 모양을 한 여호와의 사자로서
사9:6절에 그 이름을 기묘자라고 했던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십니다.

왜 한 사람을 주목하라고 합니까?
당시 유다 백성들의 형편은
성전 기초만 쌓아놓고 너무 너무 힘들어
하나님 잠깐만 계세요, 힘좀 얻어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잠깐만 했던 것이 15년이나 시간이 흘러가버렸습니다.
그 15년이 지난 지금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더 삶이 어려워졌습니다.
정말 아무 쓸모짝 없는 화석류 나무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라 ! 한 사람을, 손에 측량줄 잡은 이 한 사람을 보라고 합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손에 들려 있는 측량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꼭 성전건축만 힘든 것이 아니라
세상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 백성이 제대로 신앙생활 하기가 참 힘들지요
때로는 낙심되고 좌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시42편을 보면
2-3절에 [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
다윗은 지금 말로 하면 교회도 못나올 형편이 되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보니
눈물만 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윗은 용기를 냅니다. 눈을 들어봅니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라리로다 ]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
하나님 바라보아야 희망이 있고
하나님 만나야 살길이 열려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 교회생활 힘이 듭니까? 세상살이 너무 너무 힘이 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손에 든 측량줄 즉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손에 측량줄을 잡고 유다 백성들이 거하는 예루살렘에 찾아오신 주님, 지쳐있는 유다 백성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 한 유태인이 물었습니다.
[ 살렘 마을까지는 여기서 얼마나 될까요? ]
[ 예, 반시간쯤 가면 됩니다. ]
[ 미안하지만, 좀 함께 타고 가면 안될까요? ] [ 예, 타십시오. ]
그리고 반시간이 지났는데도 살렘 마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살렘 마을은 아직 멀었습니까? ] [ 예, 여기서는 한 시간쯤 걸립니다. ]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반시간 거리를 반시간 동안 왔는데
어떻게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단 말이오. ]
[ 예,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

나는 지금 나의 인생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인생 방향을 잘 잡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일에 무관심하고
내 방식대로 신앙생활 하다가 실패했지만
손에 측량줄을 잡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측량줄 잡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측량줄 잡은 하나님의 사자를 교회에 보내십니다.
금번 부흥회 강사 오정호 목사님
우리에게는 측량줄 잡은 하나님의 사자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한 사람이 측량줄을 잡고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어떨 적에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지만
하나님 말씀을 다림줄이라고 합니다.
암7:7절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하는 말이
[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 [ 다림줄이니이다 ]
[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
이 대 다림줄은 심판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측량줄은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과 회복의 말씀임을 의미합니다.

이번에 측량줄에 소망을 거시기 바랍니다.
이번 부흥회 강사 목사님을 통한 말씀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성도의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 경고하고 책망하더라도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측량줄 잡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자 합니까?

2절 [ 네가 어디로 가느냐? ] 물은즉
[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재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삶에 캐논입니다. 바로 잣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호4:6절 말씀처럼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 라고 합니다.
이 지식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암9:11절에
[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선지자들은 곳곳에서 말씀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망했다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말씀이 없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말 말씀이 없었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말씀은 풍성했는데 말씀다운 말씀이 없었다는 말일까요?
말씀은 풍성했지만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산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오늘날도 말씀은 풍성합니다.
TV에서나 라디오에서도 언제나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또 시중에는 설교 테잎이나 심지어 비디오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설교집과 성경공부
그리고 신앙생활에 관한 책들이 책방을 덮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는 말씀이 없는 시대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왜? 신앙고전 <경건한 삶을 위하여> 의 저자 <윌리엄 로우>의 말처럼
말씀대로 살려고 마음먹는 경건한 사람들이 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성경 덮고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어떤 집사님 가정을 심방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목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세 살 난 어린 딸에게
"애, 가서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줄래?" 하고 말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딸아이가 성경책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쪼르르 달려나간 아이가 잠시 후 돌아왔는데
그 애의 두 팔에는 홈쇼핑 상품 목록이 들려 있었습니다.
날마다 홈쇼핑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동네 집사님은 그런 사람 없는 것 같애요???

하나님 백성은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은혜 받아야 삽니다.
덮어두는 말씀이 아니라 펼치는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듣고 흘러버리는 말씀이 아니라 듣고 새기는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의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주 의미있는 예화 한토막 소개합니다.
어느 목사가 어느 날 공중 곡예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한 번도 그네에서 떨어진 일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는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아하고 멋있게 떨어지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떨어질 때는 몸을 뒤로 솟구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행동도 서커스 공연의 한 부분인 줄로 생각하게 되죠."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줄에서 떨어져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떨어지더라도 멋지게 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떨어지면
하나님은 실수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도 멋지지만,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도 참으로 멋집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손에 들려진 측량줄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한 번
재어볼 수 있는 귀한 부흥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측량줄 잡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새 예루살렘 만들려고 입니다.
우상 숭배와 형식적 예배로 얼룩진 예루살렘
결국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훼파된 예루살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 예루살렘 만들기 위해
지금 측량줄을 잡고 예루살렘의 장광을 재러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슥3:8절에 나오는 예표의 사람
즉 축복의 모델을 만드려고 가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성회가 나를 위한 성회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다시 측량 받아서
하늘의 축복이 넘치는 교회와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4절을 직역하면
환상을 해설해 주는 천사가 스가랴에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번영하여 많은 사람과 가축이 살게 됨으로
예루살렘은 마치 성곽 없는 탁트인 넓은 평원이 되리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도성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축복받을 그릇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금번 부흥회를 통해 우리 내일교회가
하나님 말씀으로 다시 한번 빗어질 수 있는
새 예루살렘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축복의 그릇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복을 누리며 지키는 것 더 중요합니다.
사면에 적들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이 성곽없는 촌락이 되면
혹 외부의 침략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그 어떤 성벽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 성곽이 되며...]라고 합니다.
여기에 '불성곽'이란
불의 보호나 파수를 뜻함인데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역사를 뜻합니다.
예컨대 출애굽하여 가나안 행군을 계속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왕 바로가 변심하여 추격하여 온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기둥이 나타나고 불기둥이 나타나서
저들의 행진을 인도하여 추격하던 애굽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갈라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라놓았습니다.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왕하6장에 엘리사가 거하던 도단성을 아람의 군대가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 말과 불병거로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보호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선민을 위기에서 구원하고 보호해 주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만세반석이십니다.
하나님 만이 만세반석이 되십니다.

대하26장에 나오는 유다의 웃시야 왕은 선한 왕으로
16살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유대나라를 통치하였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다윗 같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려고 노력한 왕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모든 일을 형통케 해주셨습니다.
정말 그의 정권과 나라는 만세반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선한 왕이 노년에 이르러서
갑자기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나병이 확인된 즉시 궁중에서 쫓겨나
완전히 소외된 별궁에서 홀로 외롭게 지나다가 죽었습니다.
문둥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는 왕의 묘실에도 묻히지 못한 비극적이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강력한 대군을 거느리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웃시야 왕이 왜 문둥병이 걸렸을까? 그리고 그의 최후가 왜 그처럼 비참하게 되었을까요?
역대하26:16절에 그가 문둥병이 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저가 강성하여 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러 하다가 ]
문둥병이 걸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특징이 뭡니까?
신앙생활 하기는 합니다. 이런 사람 더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제사장 아샤라가 왕의 잘못된 행동을 극구 말려도
웃시야 왕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문둥병이 발한 것입니다.
문둥병이 난 왕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소외된 방에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되어서 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았던 왕이 <9>
악한 왕으로 갑자기 변질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째서 그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던 왕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게 되었을까?
그가 교만하게 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역대하 26장 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웃시야 왕에게는 스가랴라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또 말씀에 밝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스가랴는 웃시야 옆에 있으면서 늘 성경을 가르쳐 주었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웃시야도 어려울 때면 스가랴 선지자를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스가랴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는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때 모든 일이 형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가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5절에 "스가랴가 있는 동안에"란 말이 나오는 데,
이 말속에는 스가랴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들려오지 않자,
왕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스가랴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웃시야 왕은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 후부터 웃시야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줄 사람이 사라지고, 그가 말씀을 배우지 않게 되자
웃시야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고, 형통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자, 그의 영혼은 무디어져 갔습니다.
악한 마음이 그 마음을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법도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대로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웃시야의 일생은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동안 ] 과
[ 말씀을 배우지 않는 동안 ] 이 확연하게 갈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과 배우지 않는 것의 차이는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큰 차이로 갈라지고 맙니다.
이와같이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불성곽이 되고 만세반석이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외면한다는 것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금번 부흥회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다시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불성곽이 되신다 함은
외부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영광'이 되신다 함은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약적 의미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성육신 하시므로
생명의 불성곽이 되시고, 세상에 빛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 결론 >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회복케 하고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위하여 측량줄 잡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나의 신앙생활을 장광을 잘 한번 재어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예루살렘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곽이 없는 촌락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 주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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