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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밥상 (눅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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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황금성 목사 (멋진교회)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밥 먹는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우선 자리를 예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장차림을 해야 합니다. 음식을 주문하는 절차도 까다롭습니다. 또 식탁 에티켓도 지켜야 합니다. 여러 가지의 종류의 포크를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또 포크를 식탁에 놓는 방법도 따로 있습니다. 풀코스로 식사를 하면 몇 시간이나 걸립니다. 이런 식사는 서양의 귀족들이 하는 식사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이런 식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저 끼니를 때우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제주도에는 두 종류의 식사 풍습이 있습니다. 보통 가정에서는 육지와 다름없이 상을 차립니다. 그런데 장례 때는 옛 식사 풍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조객들이 조문을 하고 나면 상을 차려 대접하게 됩니다.

첫째는 양반 스타일입니다. 이 때 내놓는 상은 정성이 가득합니다.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합니다. 특이한 것은 손님 수대로 각각 반찬 그릇을 내놓습니다. 밥과 국은 물론이고, 반찬 종류마다 작은 그릇에 각각 담아서 내놓습니다. 손님이 두 명이고 반찬 종류가 다섯 가지이면 반찬 그릇이 열 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에 그릇이 가득합니다.

제주도의 남쪽 지방에 가면 아직도 이 풍습을 지키는 곳이 많습니다. 이 풍습은 제주도로 귀양살이 온 양반들이 남겨놓은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천민 스타일입니다. 큰 양푼에 밥을 담아서 가운데 놓으면 둘러앉아서 퍼먹게 합니다. 목사님이 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서로 경쟁하면서 퍼먹게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먹었는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이런 상에서 장로님과 마주앉아 숟가락 싸움을 여러 번 했습니다.

이렇게 양반과 천민의 밥상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식사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주로 식사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품위에 맞게 매번 격조 있는 식사를 하셨을까요?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입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모으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또 여러 번 식사할 겨를도 없이 사역하셔야만 했습니다. 몰려드는 병자를 물리치지 못하고 일일이 고쳐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식사 초대를 받기도 하셨지만, 대부분의 식사는 끼니를 때우는 정도였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적이 있습니다. 무리가 배불리 먹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보리떡과 물고기를 드셨을 것입니다. 보리떡이 맛이 있는 것입니까? 쨈이라도 발라서 먹으면 모를까 그냥 먹기에는 뻑뻑합니다. 배고프니까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밥상은 그렇게 빈들에서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난을 듣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흉을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결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밥을 같이 먹으려면 서로 호감을 주는 상대라야 합니다. 껄끄러운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밥맛도 떨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안 하고 있는 것을 예수님이 하시니까 시비를 걸었습니다. 누가복음 7:34 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렇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을 트집 잡았습니다. 뭘 먹으면 먹기를 탐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연안에 있습니다. 지중해 연안은 뜨거운 태양 때문에 포도 농사가 잘됩니다.

모세가 12 명의 가나안 정탐꾼을 뽑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이 포도송이 하나 달린 가지를 막대기에 꿰어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 그만큼 포도 농사가 잘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포도원, 포도즙 짜는 틀, 포도원 망대 같은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식사 때 와인을 곁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밥상에는 와인과 올리브기름이 항상 있습니다. 성경에는 올리브나무를 감람나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즘 와인과 올리브유가 건강식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술을 즐기신 분이 아닙니다. 와인은 밥상에 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트집을 잡으려니까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9 장에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시고는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신이 나서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죄인의 친구 되신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먹을 뿐 아니라 아예 죄인의 집에 유하기 위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는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밥상 앞에는 종종 파격적인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밥상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밥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나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가는 나라가 아니라, 임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드릴 때 ‘나라가 임하옵시며’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곳에 오는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7 장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예수님은 여러 번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사람들에게 천국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거의 이렇게 그립니다. 큰 나무 그늘 아래 밥상이 차려져 있고, 주변에 천사들이 수종을 들고 있습니다. 밥상에는 각종 산해진미가 그득합니다. 옆에서는 풍악이 울리고 거기 내가 맛있게 닭다리를 뜯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런 천국은 착각입니다. 천국은 좋은 곳이지만 그렇게 먹고 마시며 노는 곳은 아닙니다. 천국의 밥상은 차별이 없이 누구나 주님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상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그런 밥상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기회만 있으면 그렇게 격이 없이 상을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장에는 잃어버렸던 것을 찾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잃은 양 비유입니다.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그 양을 찾아 즐거워합니다. 그 잃은 양은 죄인을 말하는 것이고, 찾은 것은 죄인이 회개한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의 즐거움은 하늘의 즐거움입니다.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찾습니다. 부지런히 찾다가 발견하면 벗과 이웃을 불러 그 즐거움을 나눕니다.

셋째는 탕자비유입니다.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아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객지에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재산을 탕진합니다. 결국 고생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다리던 아버지가 잃은 아들을 찾았다며 잔치를 엽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밥을 먹는다고 원망했기 때문에 나온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밥상은 죄인을 회개케 하고, 죄인을 영접하는 상인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떡을 떼시면서 이것을 받아먹으라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해 뜯겨지는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들어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밥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제까지 세리와 죄인과 서슴없이 마주 대하고 밥상을 가지셨던 주님이, 이제 그 하나님 나라의 밥상을 완성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만 있으면 되는 소박하고 격이 없는 밥상. 그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이 성찬상은 누구나 초대됩니다.

특히 죄를 지은 자들이 이 상에서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과 한 상에서 밥을 먹게 되면서 회개했습니다. 세리로 일하면서 탈세하고 토색한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찬은 죄인을 회개시키는 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죄를 지은 줄로 알고 이 성찬 받기를 거리낍니다. 죄를 먹고 마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성찬을 받는 경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떡이 주님의 몸이라는 것과, 잔이 주님의 피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고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찬식 음식을 세상 음식처럼 여기는 경우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교우는 성찬식에 쓰는 떡이 너무 작다고 합니다. 잔도 더 크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찬은 양으로 먹는 식사가 아닙니다. 작은 조각의 떡이지만 그것으로 주님의 몸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한 모금이지만 그것으로 주님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피를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배반하고 갈릴리 바닷가로 되돌아간 제자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숯불에 떡과 고기를 구워 조반상을 차리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떡을 떼어 그들의 눈을 밝게 만드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이면 떡을 떼며 교제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밥상을 차리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밥상은 차별이 없는 상입니다. 누구나 주님과 한 상에 어울릴 수 있는 곳입니다.

메뉴는 초라합니다. 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즐겁게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밥상입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남아 광주리에 모을 수 있는 상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주님의 밥상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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