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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터닝 포인트 (롬 6: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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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성 목사 (멋진교회)

수영선수가 헤엄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얼굴을 물 속에 잠그고 거의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안경을 쓰긴 했지만 물살 때문에 앞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 코스를 벗어나지도 않고 곧장 헤엄을 치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그러다 반대편 벽에 손이 닿으면 몸을 홱 돌려서 발로 벽을 힘차게 내찹니다. 바로 그 장면을 수중 카메라가 잡아서 중계를 해줍니다. 몸을 홱 돌린 후 개구리처럼 발을 쭉 뻗으며 나가는 장면은 언제나 봐도 멋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터닝 포인트입니다.

터닝 포인트는 바로 가던 길을 돌이켜 가는 지점을 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아주 중요한 전환기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바꿔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시점입니다.

터닝 포인트는 인생에 대한 큰 깨달음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오늘 주일예배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는 바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누구나 세례 받을 때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 때의 감격을 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받을 때조차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세례의 의미를 잘 모르고 무턱대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례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물론 중요합니다. 동시에 이 세례식을 지켜보는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례식은 개인의 세례식이 아니라 멋진교회 공동체의 세례식이기 때문입니다.

노회 때 중간에 목사 안수식이 있습니다. 목사 후보생들이 안수를 받기 위해서 긴장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10 여 년 전에 제가 처음 안수를 받을 때를 회상합니다. 저는 다시 새롭게 목사의 사명을 다짐하곤 합니다.
여러분도 이 세례식을 통해서 예전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의 첫 번째 의미는 죄를 물로 씻는 것입니다.

세례를 한자로 씻을 세 ‘洗’ 예도 예 ‘禮’입니다. 즉 물로 씻는 예식입니다.
죄는 왜 물로 씻어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3:21 말씀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했습니다.

물 자체에 생명이 있거나 죄를 씻는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단지 죄를 씻는 상징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지순례를 다녀오셨습니다. 요단강에 가면 물을 담아 파는데 그 물을 사오셨습니다. 교회에서 세례식을 하는데 광고를 했습니다. 이번에 세례식은 특별히 요단강 물로 직접 세례식을 합니다. 신도들이 다른 때보다 세례 신청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물이 모자라 수돗물을 탔다고 합니다.
요단강 물로 세례를 받는다고 죄가 더 잘 씻기는 것 아닙니다.

침례교에서는 반드시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로교 같이 약식으로 머리에 물만 묻히는 것은 효력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성만찬에서 사용하는 떡과 잔이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그와 같이 세례식의 물은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상징입니다.
물로 온 몸을 적시느냐, 부분을 적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입니다.
물로 온 몸을 적셔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부분만 적시면 용서를 안 해주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온 몸을 물로 씻어야 한다면, 비누칠까지 해야 됩니다. 피부만 깨끗케 할 것이 아닙니다. 속을 씻기 위해 그 물을 일 리터씩은 마셔야 할 것입니다.
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엎드려 회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정 지난 잘못된 삶을 뉘우치느냐를 보십니다.

이 물은 상징입니다. 이 물이 내 머리에 닿을 때, 바로 그 순간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십니다. 다시는 지난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죄는 사라지고 우리의 온 몸과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이 처음 외친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식당에서 나온 사람이 치아에 빨간 고춧가루가 붙어 있습니다. 본인은 모릅니다. 가만히 있지 계속 치아를 보이며 웃으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옆에 있던 사람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창피하지 않게 조용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얼른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빼내겠지요.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냥 보면 깨끗해 보여도 환한 불에 비춰보면 흠과 티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환한 빛이셨습니다. 그 앞에서는 숨기지 못하고 죄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발견했습니다.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무슨 죄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거역한 죄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산 것이 죄입니다. 내 인생을 내 멋대로 계획하고, 내 멋대로 산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내 삶을 주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만드셨으니, 나의 주인도, 내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나 위주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죄인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잘못 살아온 길을 바꿔야 합니다. 이 돌이키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둘째, 세례의 의미는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집례하는 목사님이 머리에 안수합니다. 안수는 머리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 안수는 안수하는 자의 권한이나 능력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제자장이 후계자를 세울 때, 제사장직을 위임하면서 안수했습니다. 선지자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후계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축복할 때도 안수합니다. 그러면 복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안수할 때 잘못하면 죄와 저주도 넘어갑니다. 구약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 안수해서 잡았습니다. 그 때의 안수는 제물에게 죄를 넘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안수를 받으면 안 됩니다. 능력과 축복을 받으려 하다가, 악한 것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임목사의 허락 없이 안수기도 받을 기회가 생기면 거절하십시오.

세례 받을 때의 안수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인침이란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도장은 계약할 때 사용합니다. 세례는 하나님과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계약은 바로 이제부터 죄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천국 백성이 된다는 표를 받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9 말씀에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계시록 7 장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침으로 재앙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또 14 장에는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십사만 사천 명이 나옵니다. 이들은 구원받는 자들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수를 상징합니다.
반면에 짐승의 표 666을 이마에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세례는 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계약하면서 도장을 찍는 예식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이제부터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종에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신분이 바뀝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게 됩니다.
아무도 이 신분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천국 티켓을 이마에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의 세 번째 의미는 교회 공동체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세례는 구원의 표로 장차 천국 시민권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현재로는 교회의 멤버십을 얻게 됩니다. 교회는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곳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곳입니다. 세례를 받으므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이 되면 권리와 의무가 주어집니다.

권리는 우선 공동의회 회원이 됩니다. 공동의회는 교회 재정의 예산과 결산을 결의합니다. 또 교회에 필요한 일꾼을 뽑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중요한 사항들을 결의합니다. 공동의회는 교회에서는 최고의 기관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의회에서 직원을 뽑을 수도 있고, 뽑힐 수도 있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집니다.

그 다음 권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장로교는 세례를 받은 분에게만 이 성찬에 초대합니다. 세례를 받은 것은 성찬의 떡과 잔의 의미를 바로 알아,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 장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이 떡과 잔을 받으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교인의 의무입니다.

첫 번째 세례교인의 의무는 성수주일을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 나와 예배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 바로 영적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범하는 것은 죄입니다. 천지지변 외에 주일예배를 빠질 어떤 핑계거리도 없습니다.

두 번째 세례교인의 의무는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으면 십일조는 큰 돈입니다. 십일조를 떼면 살림에 커다란 구멍이 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믿음으로 실천해 보십시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더 크게 채워 주십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은 구약 말라기에서 도적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십일조 이야기를 하면 마음에 시험만 듭니다. “목사가 돈을 바치라고 꼬신다. 넘어가지 말아야지.”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면 헌금생활을 합니다.
십일조 안하는 분들이 십일조 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바보 같아 보입니다.

저희 집안의 어른께서 그러셨습니다. 주일 헌금은 언제나 100 원입니다. 언젠가 500 원을 넣으시고는 제게 자랑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셔서 그러셨습니다. 부끄럽게도 그 어르신은 임종 직전에야 하나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십일조하는 교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물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을 무례하게 하면 안 됩니다. 지난주일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일년 동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헤아리며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물질로 표한 것을 보니 그 고백들이 입에 발린 것들입니다.
헌금에 대한 설교는 잘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 들으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어린 아이들 세뱃돈 주는 것 모양 드리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리려면 양, 염소, 소를 잡아야 했습니다. 돈이 많이 듭니다. 가난한 백성을 위해 곡식을 갈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의 없이 헌금한 분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뉘우치고 감사예물을 다시 드렸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헤아리는 대로 헤아리십니다. 누가복음 6:38 말씀입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세 번째 의무는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세례교인은 교회가 신앙을 지도할 때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례의 네 번째 의미는 성령의 체험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의식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순간입니다.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체험입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초대교회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던 예수님께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비둘기 같이 온유한 성령이 임하면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습니다.

세례는 성령이 내리는 사건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성령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신앙고백을 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 받기 전에 반드시 문답을 합니다. 세례 받을 자격이 되나 봅니다.

문답 중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십니까?” 이 질문에 “예”하고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이 대답을 하지 못하면 세례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받은 자들은 성령 받은 것입니다. 세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입니다. 그런데 물세례를 제대로 받으면 반드시 동시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자는 성령을 받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세례의 의미는 죽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본문 3 절 말씀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세례는 죽는 예식입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옆에 도살장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백정이 큰 해머로 정수리를 내리쳐서 소와 돼지를 잡았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는 자기의 죽음을 압니다.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주인을 원망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돼지도 자기의 죽음을 압니다. 그런데 돼지는 반항을 합니다. 얼마나 꽥꽥대는지 돼지 잡을 때는 수업이 방해가 됩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소리를 지르면서 버팁니다. 소를 끌고 갈 때는 한 명이면 되는데, 돼지는 장정 세 네 명이 달라붙어야 합니다.

세례 받는 자리는 이와 같이 죽는 장소입니다. 이제까지 살았던 죄 때문에 그 값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합하여 함께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세례는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세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입니다.
세례는 주님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다시 사는 것입니다. 세례받기 이전의 나는 죽고 이제 예수 안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사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받으면 세례명을 받습니다. 예전의 이름은 지우고, 새로 태어난 새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4-5 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지난날의 나는 이제 죽습니다. 십자가에 죄와 함께 못 박혀 죽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어 새 삶을 주십니다. 이제는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세례를 통해 인생을 돌이키셨습니까? 사망을 향한 삶에서 생명을 향한 삶에로 돌아선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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