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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생명의 떡이다 (출 16:4~5, 요 6: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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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예수님께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첫 번째 자기 증명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미래학자들은 인구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집니다. 인구문제란 식량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지구의 생존 문제입니다. 인구문제는 미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즘의 삶을 보세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먹는 것, 마시는 것입니다. 건강에 좋다고 하면 안 먹는게 없습니다. 비타민C가 좋다고 한 때는 약국에서 싹쓸이 했습니다. 토마토가 좋다고 방송에서 한번 얘기하면 토마토를 살 수가 없습니다. 어디 좋은 물이 있다고 하면 구하려고 야단들입니다. 공해가 없고 깨끗한 식품이 있다면 애써 구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관심가지는 말이 웰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식량문제를 해결하십니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원래 120억 명이 살아도 넉넉한 공간과 먹거리가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스스로 해결하시는데 사람들이 욕심으로 차지하기에 좁고 모자란 환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흔히 인간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3M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는 맬더스(Malthus)의 인구론에 의한 방법입니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증산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산되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는 마르크스(Marx)의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식량문제는 자본주의에 기인한 것이므로 자본주의를 붕괴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허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교적 선교이념(Mission)입니다. 서로 보살피고, 도와주고, 나눠주고, 베푸는 것이 기아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지나친 욕망과 독점욕이 굶주림을 만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시험이나 아브라함의 시험이나 예수님의 첫 시험의 공통점은 먹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는 문제로 시험에 빠져 온 인류의 원죄를 일으켰습니다. 아브라함은 먹는 문제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아내의 정조를 내어주는 결정적 실수를 합니다. 먹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심각한 시험입니다.

  먹는 문제는 심각한 절대 절명의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양식의 문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살이(from hand to mouth) 인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먹기 위하여 하루 품을 파는 일은 중요한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은 우리의 떡이 되셔야 합니다. 특히 생명의 떡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이 되셔야 합니다.

  스캇 펙은 ‘끝나지 않은 여행’에서 지옥에서 세 명의 성직자가 만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세 명은 카톨릭 사제와 유대교 랍비와 뉴 에이지 목사였습니다. 이 세 성직자가 왜 지옥에 오게 되었을까요? 카톨릭의 사제는 술독에 빠져서 너무 술을 좋아해서 지옥에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유대교 랍비는 “햄 샌드위치 같은 음식을 먹었어요. 전 그런 음식 없이는 살 수 없어요. 그래서 지옥에 왔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뉴 에이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요?” 그 때 뉴 에이지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여긴 지옥입니다. 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요.” 스캇 펙의 이야기에 개신교 목사가 등장하지 않아서 큰 다행입니다. 먹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죄의 근본입니다.

  사실은 생명의 떡 아닌 게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누구나 먹어야 삽니다. 육신의 떡도 살기 위해 먹는다는 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생명이란 말이 헬라어에서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바이오’란 말이 있고, ‘조에’란 말이 있습니다. ‘바이오’는 육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조에’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떡은 생명인 ‘바이오’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인 ‘조에’를 위한 떡입니다.
  창세기 3:17에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에게 벌을 주십니다. 일을 하고 먹는 것은 평생을 지배하는 인간의 문제이며 시험입니다. 먹는 문제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한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 시험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식량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보고에 의하면 연간 곡물생산은 18억2690톤에 불과한 반면 소비는 19억 3210만톤이라고 합니다. 생산이 소비에 비해 1억 톤이나 부족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절실한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는 말씀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신 다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떡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했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물러가고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도 가겠느냐?”고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떡을 아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주리지 않게 하십니다.

  35절에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리지 않을 것”이란 말은 부정과거 가정법입니다. 이 말은 “내가 언제 배고팠었나?”라고 할 만큼 먹음으로 즉시 만족하는 상태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6:31에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주리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쓸데없는 염려에서 해방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지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 모든 것이 주리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먹지 못하고 굶주린 군중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적을 메시야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마귀의 시험도 보세요. 첫 번째 시험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주린 사람을 먹는 것으로 시험하고, 예수님은 주린 사람을 먹는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린 것이 시험이 되면 마귀의 역사이고, 주린 것이 채워지고 은혜가 되면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가일스 플레처(Giles Fletcher)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길 잃은 자에게 그 분은 길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이며, 굶주린 자에게 음식입니다. 묶인 자에게 자유이며, 약한 자에게 강함입니다. 죽은 자에게 삶이고, 병든 자에게 강건이며, 눈먼 자에게 광명이고, 가난한 자에게 부요입니다. 다시는 잃지 않는 즐거움이며, 도둑맞지 않는 보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배고픔도 스스로 해결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제일 배고파하는지 아십니까? 건강한 자입니다. 한참 자라는 아이입니다.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다면 끝장난 겁니다. 배는 고파야 하고 안 먹으면 먹고 싶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의 양식도, 생명의 떡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싶은 사람이 건강하고,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영적인 병이 든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5:6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주리고 목마른 갈구하는 마음 상태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떡은 주리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에 고파해야 합니다. 주리고 목말라 해야 건강하듯이 영이 건강한 자는 생명의 떡에 고파합니다. 수시로 먹으려고 해야 합니다. 안 먹으면 이미 병든 상태인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는 오랜 전통이 있답니다. 인품이 가장 뛰어난 최고의 승려들이 요리를 담당하게 되는 전통입니다. 언제나 사랑은 최고의 요리사를 만드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요리사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뛰어난 요리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가장 건강한 영혼을 만듭니다. 주리지 않는 영혼을 지어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십니다.

  33절에는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의 떡”이라고 합니다. 38절에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이라고 합니다. 41절에는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인 것은 그 근원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 혹은 “내가 주는 떡”이라고 하시는데 왜 목마르지 않고, 어떻게 배고프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기에 이 땅에서 나온 떡과는 근원부터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었습니다. 이 양식은 40년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있는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는 40년을 매일 한결같이 해가 뜨기 전에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쌓이는 양식이었습니다.

  마귀의 시험에 대한 굶주리신 예수님의 대응을 보세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 한 마디에 마귀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합니다. 이 말은 육신의 떡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서 오는 생명의 떡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생명의 떡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23에는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그 근원이 사람과 다릅니다. 하늘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일 수 있고, 영원할 수 있고, 주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떡은 먹고 나면 배가 고픕니다. 어떤 이는 먹고 돌아서면 또 배가 고프다고 합니다. 기적으로 먹여 놔도 다음날에는 또 먹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7에는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기에 살아 계십니다. 생명의 떡입니다. 동물 가운데는 죽은 고기만 먹는 동물이 있습니다. 반면에 죽은 고기는 먹지 않는 동물도 있습니다. 여우나 하이에나는 죽은 고기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죽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은 한결같이 성품이 포악합니다. 독수리가 시체를 먹는다고 하지만 흰머리 독수리는 죽은 고기는 절대 안 먹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애쓰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애쓰고 썩지 않는 양식을 먹어야 썩지 않는 삶을 삽니다.

  스티브 맥베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 음식 준비하느라 바빴고 졸립지도 않은데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마리아가 마르다 보다 나은 것은 생명의 양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하늘의 양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영생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 때문에 영생하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생명나무 과실은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사망을 아는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반드시 죽게 된 사람에게 예수님은 먹고 영원히 사는 영생하는 떡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주로 먹는 것 때문에 죄가 시작됩니다. 말하자면 탐식 때문입니다. 이거야말로 극복하기 힘든 유혹입니다. 잠언 23:2에는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고 합니다. 탐식은 죽을 각오를 하라는 말입니다. 먹는데 목매달지 말아야 합니다. 영생하지도 못하는 세상의 식물에 너무 목매달고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먹는 것으로 영생할 수 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망합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이 바로 그랬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렇게 사람들이 먹는데 탐하고 먹는데 온 정신을 다 쏟았답니다.

  성만찬 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 몸이니 이것을 먹으라, 그리고 이를 기념하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몸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십니다. 먹는 것도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입니다. 그렇다면 영생도 대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도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공짜입니다.
  예수님은 수가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영생하는 물에 대한 얘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마름이 없기에 다시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물이 부족하고 물 긷는 수고가 끝이 없는 여인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로마서 14:17을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왜 ‘아니요’라고 강조하시는지 아십니까? 너무 소중하고 너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은 즐거움이고, 천국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의 비유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먹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먹는 것은 그리 가치 있는 일은 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떡나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생명을 주는 떡이 십자가에서 자랍니다. 이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라는 떡을 먹으면 죽어도 삽니다. 이런 영원히 사는 축복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계시록 7:16에는 “저희가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영생하는 떡을 먹는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결론

  19세기 벨기에에 레이날드 3세라는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토지를 물려받은 공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동생은 형 레이날드의 것을 다 빼앗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형을 인적이 드문 곳에 감금하였습니다. 동생은 형을 죽이는 대신 간교한 책략을 꾸몄습니다. 거구인 레이날드를 문이 작은 방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나올 수만 있으면 방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땅도 돌려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형에게 맛있는 음식을 매일 제공하였습니다. 형은 맛있는 음식을 주는대로 다 받아먹고 점점 더 비대해져갔습니다. 결국 형은 그 작은 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맙니다. 음식에 훈련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망하는 법입니다. 세상의 떡에 취한 사람의 말로가 이러합니다. 우리는 영생의 떡에 고프고 배불러야 합니다.

  찰스 맨즈는 “우리는 너무 많은 음식을 먹거나 마신다. 사실 우리는 외면보다는 내면이 더 망가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즐겁게 하는 육신의 떡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육신뿐만 아니라 내면이 망가져 있습니다. 생명의 떡을 먹으면 내면뿐만 아니라 육체도 삽니다. 예수님만 먹고, 마시고 예수님으로 인해 배부르고 영생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경건주의자들은 “No Bible No Breakfast, No Cross No Crown”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조반을 먹지 않고,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 성경 없이는 밥도 없습니까? 밥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성경은 영원히 고프지 않은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주리지 않는 양식을 먹어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먹으면 죽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먹어도 죽습니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 우리가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사는 양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히 계실 분이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그 분은 “I am”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하는 떡입니다. 이 떡으로 배부르고, 만족하고, 살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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