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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없는 세대여 (막 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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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본문 19절을 봅시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탄식과 소망이 함께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이것은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이것은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없는 세대를 탄식하시면서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내가 너희를 대하여 참고 있는 이 기간 동안에는 너희가 믿음을 가질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믿음은 지켜가야 합니다. 또 믿음은 자라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본질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믿는 내가 주축이 아니고, 내가 믿는 대상이 주축입니다. ‘믿는다’라고 할 때 믿는 내가 믿음을 결정하는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이 믿음을 결정합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한 이 말씀 속에는 믿음의 주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대를 말합니다. 예수가 없는 믿음은 믿음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뢰입니다. 누구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믿음의 기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수용으로부터 그 믿음은 자라갑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수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기록한 종이입니다. 성경책이 없어진다고 해서 말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책을 찢어버렸다고 해서 말씀이 찢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불태웠다고 해서 말씀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움직이게 되고 자라가게 됩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이고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고, 그 말씀은 살아서 활동하는 것이고 일하고,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자라가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의 주, 보이지 않는 말씀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출발이지만 그 믿음은 보이는 것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는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으면 믿음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영으로 계신 하나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생명으로서의 말씀을 믿어야 믿음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주와 우리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지만 그 믿음을 믿는 자는 우리의 삶을 통해 믿음이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매는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증거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을 믿으면서 보이는 증거를 남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라고 주께서 탄식하신 것은 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평가 앞에서 그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다는 그 믿음은 내가 평가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가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여,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평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일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자기 분야에서 대가가 된 훌륭한 의사입니다. 영남 의료계에서는 그 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직장에 가면 어른입니다. 사회에 나가도 대우받는 성공한 인사입니다. 이 분은 교회에서도 장로입니다. 그가 교회를 섬길 때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입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분이 제일 부담을 많이 합니다. 조용히 부담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제직회를 하든지 당회를 할 때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저와 11년간 교회를 같이 섬겼는데 너무나 발언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언젠가 물었습니다. “장로님, 제직회나 당회를 할 때 좋은 생각을 많이 가지고 계실 텐데 발언하십시오” 했더니 웃으시면서 한 말씀 던지는데 그것이 격언처럼 제게 새겨졌습니다. “목사님, 저는 일만 하겠습니다. 일만 하면 되지 말까지 해야 합니까?” 저는 이 장로님의 말씀 속에 무게있는 믿음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 분의 신앙은 깊이가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지만 일하시는 것과 섬기는 것을 보면 깊이와 무게가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듭니까? 그 분 속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분 안에 계십니다. 조용하십니다. 교회에 오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하실 때는 그 믿음이 활동합니다. 역사합니다.

  에덴의 법칙

  믿음은 법칙이 주어져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하나님이 그 법칙을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는 곳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낙원을 만들어 놓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살도록 했습니다. 그저 살도록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복종하는 법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 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죄가 없는 에덴동산이 얼마나 좋은 곳입니까? 죽음의 불안이 없는, 인간의 갈등이 없는 에덴동산에서는 저절로 신앙으로 살아질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믿음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법의 첫 번째 법칙입니다. 그리고 각종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으라. 이것은 두 번째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이 두 가지 법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기꺼이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각종나무의 모든 실과를 마음껏 따 먹고 즐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 법칙이 우리 믿음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법칙은 불변합니다. 에덴동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하는 삶의 일터에, 직장에, 우리 가정생활에,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그 모든 발자국마다 에덴동산의 믿음의 법칙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은 하지 말아야 믿음이 성립됩니다. 그 분이 하라는 것을 기꺼이 복종해야 믿음이 성립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면에서 혼돈하고 망가져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은 그 아버지를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주여, 할 만하시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제일 강조되는 부분이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믿음의 비밀을 집합한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믿는 자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주님이 보실 때 믿는 자라는 평가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이도 교회에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는 자라고 하는 것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을 때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가 믿는 그 분이 나를 통해서 못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힘이 없는 사람인데 그 안에 믿음이 들어갈 때, 그 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실 때 놀라운 일을 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 이웃을 알게 됩니다. 그저 돈에만 집착하던 사람이 영적인 일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저 빼앗기만 하던 사람이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인색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놀라운 봉사를 하게 됩니다. 누가 하게 합니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하게 합니다. 믿는 자라는 말은 네 안에 그리스도가 있을 때, 내가 네 안에 들어갈 때 네가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뿌리가 내려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만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으로 오시면서 말씀으로 오십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으로 생략이 되는 과정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졌다. 그러나 길가의 씨들은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고, 가시덤불의 씨는 뿌리가 약해서 말라 버렸고, 돌밭의 씨는 뿌리가 내리지 못하여 말라 버렸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진 씨는 자라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얻었다. 이것이 천국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과정은 하나뿐입니다. 길가와 가시덤불과 돌밭은 형태는 다르지만 과정에 있어서는 똑같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도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도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도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돌밭, 가시밭, 길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공통적으로 그와 같은 밭들은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옥토의 결정적인 장점이 무엇입니까? 씨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옥토는 씨를 받아들입니다. 씨에서 싹이 나고 뿌리가 내릴 때 그 뿌리가 마음껏 뻗어가도록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곡식은 뿌리가 옥토에 그대로 뻗고 있는 것입니다. 이 뿌리가 뻗는 것이 막히면 곡식은 부실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어떤 형태가 아닙니다. 돌밭, 가시밭, 길가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어떤 형편에서 사시든, 풍부하든, 궁핍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뿌리가 내리는 사람에게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의 재물이 말씀의 뿌리를 막아버립니다. 우리의 욕심이 말씀의 뿌리를 막아버립니다. 우리의 이기심이 내 마음에 일어나는 시기, 질투, 남을 향한 미움, 적개심이 말씀의 뿌리를 막아 버립니다. 말씀의 뿌리가 소신껏 내려질 때 그 믿음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믿음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모세의 사명을 허락지 않습니다. 다윗은 다윗으로 하나님이 쓰십니다. 모세는 모세로 하나님이 쓰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대로 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제가 하는 일을 여러분이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여러분이 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말씀에 뿌리를 내릴 때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나를 통해 의도하신, 그 분이 나를 통해 영광 받고자 하는 그 일에 소신껏 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주일날 듣는 설교는 목사의 설교입니다. 내일부터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직장에 그 일터에는 제가 따라가서 오늘처럼 설교를 못합니다. 목사의 설교는 주일의 설교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는 내일부터는 여러분의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설교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만난 주님, 예배를 통해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이 사는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설교자로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고 빛을 발해야 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오늘 무엇을 구하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소원입니까? 인간적인 무엇을 구하러 여기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로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이 내 인격 속에서, 내 삶속에서 소신껏 뿌리를 내리도록 우리 자신이 말씀을 향하여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일터에서 실험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날 듣는 말씀은 오늘로서 제한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는 말씀으로서 연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잠잘 때는 눈을 감게 하셨습니다. 입도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닫고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귀는 24시간 열어놓으셨습니다. 아마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잠잘 때도 하나님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는 자”라고 하는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뿌리를 내리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응답하는 책임입니다. 그렇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보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이 그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요즘 명의는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닙니다. 병을 잘 찾아내는 의사가 명의입니다. 우리가 명의를 너무 과시합니다. 명의라고 해서 병을 다 고치는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명의라도 병은 고쳐지는 사람만 고치지 못 고치는 병이 많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의사가 치료하는 것은 기계가 없이는 치료를 하지 못합니다. 요즘은 ‘첨단기계 가지고 누가 병을 잘 찾아내는가?’입니다. 이 병원에서 못 찾아 낸 것을 저 병원에서 찾아내면 그 병원이 좋은 병원입니다. 명의입니다. 병원에 가는 사람이 의사에게 몸을 맡기고 각종 검사를 받을 때 어떤 마음으로 받습니까? ‘아! 내 몸에 있는 병이 전부 감추어져서 검사에 드러나지 않았으면... 이 의사가 내 병을 몰라야 할 텐데...’ 이런 자세로 검사 받습니까? 내 몸이 고장 나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고 치료해주기를 바라는 자세로 몸을 맡기고 돈을 들여서 검사를 받지 않습니까? 의사 앞에 나아가 몸을 맡기고, 그 의사가 하는 검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내 몸의 병든 부분을 찾아내 주기를 바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닫아 버립니까? 왜 닫고 사십니까? 왜 말씀의 뿌리가 내리지 못하도록 더러운 세상의 욕심으로 자꾸만 나를 받치고 있습니까? 돌멩이를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뿌리가 내립니다. 가시덤불을 거두어야 합니다. 길과 같이 단단한 밭을 기경해야 합니다. 옥토가 되어야 말씀의 뿌리가 내립니다.

  믿음의 단계

  우리의 삶속에서 보면 말씀을 거부하는 온갖 것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의사 앞에 자기 몸을 다 드러내는 환자처럼 오늘 우리 자신도 주님 앞에 다 노출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도 마음을 닫아 놓고 있다면 말씀은 여러분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주여! 내 모습이 이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더러운 죄인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행할 바를 못했고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에 몰두했던 죄인입니다. 말씀하옵소서! 듣겠나이다.’ 이 모습으로 우리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조건 안 믿는 단계입니다. 이런 사람은 전도를 거부합니다. 교회 오기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올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 오기 싫어하는 그 정도는 조금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교회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조건 믿지 않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형식상 믿는 단계가 있습니다. 교회는 다닙니다. 그러나 중심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서 몸을 다쳤습니다. 병상에 누워서 꼼짝을 못합니다. 그 지경에서 아하시야 왕이 신하를 보고 “저 바알세불에게 가서 내 병세가 어떠한지 물어보라. 나을 런지, 죽을 런지 물어보고 오너라.” 이 아하시야는 신앙의 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입니다. 그런데 병들어서 죽을 지경에서는 우상 바알세불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아하시야의 행동이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징입니다. 결정적인 행동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형식상 믿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보고 믿는 단계입니다. 경험을 중요시합니다. 이적과 기사를 중요시합니다. 내게 일어나는 현상을 중요시합니다. ‘내가 교회 다녔더니 정신도 맑아지고, 내 주변도 좋아지고, 사업도 잘 된다’ 이것은 보고 믿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 안에 포함되는 요소이지만 이것이 믿음으로 머물러 버릴 때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믿는데 자기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날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을 내밀에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말씀 더 하셨습니다. “도마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 복이 있도다.” 보고 믿는 믿음, 이것은 현상적인 것을 중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게 고난이 오든지, 감당 못할 시련이 오면 하나님과 자꾸 멀어지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와도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믿음은 그 믿음의 본질이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경험 중심이고, 현상 중심이 되면, 내 육신의 어떤 환경적인 현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리스도와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대하는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르쳐서 말씀으로의 믿음입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백부장이 주님께 나아와서 주여 내 하인이 병들어 죽어갑니다. “그래, 가서 내가 고쳐 주리라.” “주님,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을 내가 감당치 못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이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주님이 둘러 선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믿음은 말씀으로 ‘아멘’하는 믿음입니다.

  말씀으로만 행할 때 이 말씀은 능력이 됩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콩은 콩만 심어야 합니다. 콩을 거두려면 콩을 심어야 합니다. 팥을 거두려면 팥만 심어야 합니다. 팥과 콩을 같이 거두겠다고 한 자리에 콩과 팥을 함께 심으면 둘 다 망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으로만 됩니다. 이 말씀에 다른 것을 섞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것을 섞으면 말씀이 죽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을 듣는데도 이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습니까? 말씀에 자꾸 다른 것을 섞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말씀을 자꾸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인간의 욕심을 섞고, 인간의 걱정, 근심을 섞어 버리기 때문에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믿음은 “주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안수기도 하지 않아도 여기서 기도해 주셔도 내 하인이 나을 줄 믿습니다.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이 믿음의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자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이 그렇지 않던데요. 내가 한 평생 지금까지 주님을 믿고 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으로만 된다는 그 말씀은 모순 아닙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 사탄이 뭐라고 제안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 보아라.” 돌로 떡을 만들어 먹겠다는 심리를 버리지 않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잘 분석해보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자 하는 요행심과 사행심이 우리의 신앙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쉽게 무임승차하려 합니다.

  여러분, 돌 가지고 다른 것을 하면 안 됩니다. 왜 돌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서 죄를 짓습니까? 돌은 돌로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 돌을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떡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돌은 돌로 두시고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떡을 만들어 잡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하나님이 한 푼이라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돌로 떡 만드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소모합니까?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돌로 떡 만드는데 사용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되게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순종할 때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살았다 하는 거기에 돌로 떡 만드는 심리를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맺는 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말씀으로 만의 믿음이 되고, 우리 믿음이 그리스도가 내안의 주가 되고, 그 말씀이 소신껏 뿌리가 내리는 순종의 믿음이 될 때 우리 안에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믿음이 없는 세대를 향하여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참고 계십니다. “내가 오늘도 참고 있노라. 너희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참고 있노라.” 이 소망의 음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건축은 축복의 사역입니다. 우리에게 힘든 짐이지만 바깥에서는 부러워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기도해오고 있지만 성전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믿는 자가 되십시오. “믿는 자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그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믿는 자가 뭉칠 때 성전건축은 얼마든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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