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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하는 마음 (딤전 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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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지 목사 (목양교회)

오늘 본문 가운데 “자족하는 마음”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

이 “자족하는 마음”은 「개역성경」에는 “지족(知足)하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족, 지족, 같은 뜻입니다. 
이 말의 헬라어는 ‘아우타르케이아스(αύταρκείας)’인데 ’스스로‘라는 뜻을 가진 ’아우토스(αύτόσ)라는 말과 ’만족하다‘는 뜻을 가진 ’아르케이오(αρκεω)가 합해서 된 말이기 때문에 성경을 새로 번역할 때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자족하는 마음“이라고 한 것으로 압니다.

오늘은 ”자족하는 마음,“ 이 말씀을 중심으로, 
‘자족하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나?’
‘우리는 무엇에 자족해야 하는가?’ 
‘자족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이와 같은 것을 차례대로 살피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만족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성경의 알기 쉬운 번역들을 보면 「공동번역성서 개정판」은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 무리하지 않겠다, 지금 처지에 만족하겠다, 그럴 때 마음을 비웠다고 하지요.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밖의 여러 형편에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평화를 누리는 마음입니다.
자족, 원래 이 말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쓰던 말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5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스토아 철학자들과 쟁론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바로 이런 것, 바깥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나는 흔들리지 않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바깥에는 큰 물결이 일어도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오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을 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나는 할 일이 많다. 이 바다의 풍랑은 나를 어쩌지 못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풍랑이 이는 바다의 배에서도 평화롭게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세상의 풍랑이 참 심합니다. 너무 심합니다. 
그런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자족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남과 비교하려하지 않을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남과 자기를  비교하려고 해서는 자족하는 마음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다음에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보니까 요한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21:21b)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2)

이 말씀은 ‘네게는 너의 길이 있고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어! 너를 요한과 비교하지 말아!’ 하는 뜻입니다.

눈 높이를 낮출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힘쓸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475장을 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찬송을 부르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찬송이어서 다른 찬송으로 바꿨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는  자족할 수 있는 비결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를 성경 말씀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지만 이 찬송은 오늘의 본문을 잘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절입니다.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
구주의 뜻 행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그렇습니다. 구주의 뜻 행할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이 세상은 늘 변하고  험악한 일 많으나
주 은혜만 생각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그렇습니다. 주 은혜만 생각할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 은혜‘만’ 생각하는 것은 주 은혜‘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고 집중적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의 은혜일 수도 있다.’가 아닙니다.
‘이 일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이다’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이다.’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하고서 이어서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는 이것이 주 은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3절 가사입니다.

육신의 눈 못 볼 때에 신령한 눈 곧 밝히사
저 천성 문 보게 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저 천성 문을 볼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3절의 가사는 청교도 시인 밀턴을 생각나게 합니다. 밀턴은 중년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 내 육신의 눈을 닫으셔서 세상의 것들을 보지 않게 하시고 대신 내면의 눈을 열어주셔서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서 더욱 좋은 시들을 쓰기에 힘썼습니다.
「실락원」 「복락원」「투기사 삼손」 같은 명작들은 모두 그가 실명한 이후에 쓴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육신의 눈 못 볼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 본래의 영어 가사를 보면 ‘육신의 눈이 침침해질(dim)  때’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육신의 눈이 흐려집니다.
우선 육신의 눈이 흐려지기 전에 성경을 많이 읽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눈이 흐려지면 신령한 눈이 더 밝아지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4절 가사입니다.

내 마음과 내 영혼이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주 은혜로 성결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그렇습니다. 모든 욕심 다 버릴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5절 가사입니다.

이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이 더 좋으니
내 맘과 뜻 다 합하여 저 천성만 향해 가세

그렇습니다.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을 더 좋게 여길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주의 뜻을 준행하기에 힘써서, 주 은혜만 생각하기에 힘써서, 저 천성 문 보기에 힘써서,
모든 욕심 다 버리기에 힘써서,  신령한 복을 더 좋게 여겨서 자족하는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자족해야합니까?

먼저 물질에 대해서 자족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이 특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세요. 이 말씀은 재물에 대한 차원이 아주 높은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최소한의 것을 말합니다. 
아주 검소한 생활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실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이 말이 더욱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물질에 대한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시편 37편 16절은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라고 말합니다.
잠언 15장 16절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가르칩니다.
잠언 22장 1절과 2절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이 여러 가지를 요약하면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라.’ 이와 같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네 가지 땅은 길 가, 흙이 얕은 돌밭, 가시떨기 위, 좋은 땅입니다.
이 네 가지 땅 가운데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22절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자족함이 없는 마음, 재물에 대한 지나친 관심, 재물에 대한 욕심은 내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마태복음 19장 22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성경은 대단히 안타까운 결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는 것입니다.(마19:22)
이 청년은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시빈민운동가들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가난에 얽매어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이 중심이 되어 최근에 서울 변두리에서 ‘최저 생활비로 사는 체험하기’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중요합니다.
동시에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때 내가 살던 집,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내가 타던 차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내가 입었던 옷, 다 벗어두고 갑니다.
하나님께 갈 때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물질의 풍요,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혼의 풍요,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부자 되시는데 먼저 영혼의 풍요를 누리는 부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것이 영혼의 부자 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것이 영혼의 부자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 영혼의 부자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것, 우리의 마음,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더러운 마음,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깨끗한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자족해야 합니까?
나의 처지에 대해 자족해야 합니다.
나의 직분에 대해 자족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분량에 대해 자족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10장 13절에서는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고”의 “분수”는 “분량”과 같은 말입니다.
이 분량이라는 말은 ‘형태’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의  형태에 대해 자족해야합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신비체험을 주고  나에게는 주지 않나?’ 하기 쉽습니다.
신비체험 없이도 열심 있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축복입니다.

물질에 자족, 처지에 자족, 직분에 자족, 믿음의 분량에 자족, 그리고 여러분 한 걸음 더 나가서 목숨에 대해서도 자족함이 있어야합니다.
목숨에 대해서 자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명에 대해서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아, 갈 때가 되었구나!’ 하면서 갈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설흔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앞두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였습니다.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 찬송의 3절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
이 찬송은 슈몰크(B. Schmolck)이라는 독일 목사님이 화재로 두 아들을 잃고 지은 찬송인데 3절에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처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사는 것과 죽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 목숨에 자족하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편찮으셔서 입원을 하셨습니다. 병원에 심방을 가서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이 분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씀이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하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이 분을 평소에도 존경했지만 그 분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때문에 이 분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문 성경으로 9절을 보니까 “而然 敬虔 加上 知足的心 便是 大利了,” “경건에 지족하는 마음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큰 이익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떤 이익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동양에서는 자족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있지요.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함을 앎” 이런 뜻입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도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명심보감」은 “족한 줄 알면 즐거울 것이요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이 끊이지 않으리라(知足可樂務貪卽優)” 하였고 또 “족한 줄 아는 자는 빈천에 처해도 즐겁고 족한 줄 알지 못하는 이는 부귀에 처해도 역시 근심을 한다”(知足者貧賤亦樂不知足者富貴亦優)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특히 자족하는 마음과 경건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의 내용은 기도, 묵상, 성경 읽기, 예배, 전도, 성서적인 삶, 이런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족하는 마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의 중요한 한 항목입니다.

경건을 하나의 음식에 비교한다면 자족하는 마음은 조미료와 같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경건이 더욱 맛있는 것이 됩니다.

경건을 하나의 상품에 비교한다면 자족하는 마음은 포장과 같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경건이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경건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5절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경건은 ‘헛 경건’입니다.
종교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경건을 가진 사람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돠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종교를 영업화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다툼이 생기고 교권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5절 끝에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또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유혹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풍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족하는 사람도 욕망을 갖는데 그 욕망은 고상한 욕망입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자족이라는 말이 한 군데 더 나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입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리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다음에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저 유명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6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세요.
‘아, 나의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로구나!’ 
‘자족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구나!’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로구나!’ 깨닫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특별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많은 문제들,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고,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의 소중함을 알고, 자족하는 마음을 갖기에 힘써,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의 경건이 더욱 알차고 빛난 것이 되도록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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