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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가 있는 삶 (창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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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교통정보를 들으려고 라디오를 켰습니다. MC 두 분이 프로그램을 시작하시면서 인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분은 “부자 되세요!”, 다른 한 분은 “건강하세요!” 알고 보니 고정적으로 하는 인사 멘트였습니다.
또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행복하세요!”라고 인사 멘트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체로 기원하면서 인사할 때 이런 말들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기원하면서 인사할 때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물론 때에 따라 다르고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기원 인사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이것입니다. 바로 엡 6:24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찌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끼리 인사할 때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조건 없이 그리고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조건 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단서를 달지 않고 그냥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값없이 라는 것은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거저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주시고 거저 주신다고 싸구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동차나 보석 같은 것은 비싼 돈을 주고 삽니다. 그러나 햇볕이나 공기 같은 것은 공짜로 얻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동차나 보석은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햇볕이나 공기는 없으면 죽습니다. 조건 없이 대가 없이 그냥 공짜로 얻지만 우리에게 생명처럼 귀하고 값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그냥 주십니다. 거저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처럼 귀하고 값집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의 삶에 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할까요?

생존 때문입니다

얼마 전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여자]라는 책입니다. 여성의 본질을 생물학적으로 탐구하면서 여성의 우월성을 밝히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 내용을 읽다가 저는 제가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음이 기적과 같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여성이 평생 수 십 만개의 난자를 생산해 내는데, 그 중에 실제로 수정이 가능한 난자는 450개 정도가 된답니다. 수정이 되려면 이 450개 난자 중에 어느 하나가 자궁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남성의 정자는 한 번에 무려 3억 개 가까이가 여성의 몸속으로 들어온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난자와 결합해서 수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3억 개의 정자 중에 하나를 택하셨습니다. 3억 분의 1의 기적입니다. 난자의 입장에서 보면 또 450개 중에 하나를 택하셨습니다. 450분의 1의 기적이 입니다. 합해 보니까 1350억 분의 1의 기적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제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기까지 하나님의 이 기적과 같은 선택이 있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 2장을 보면 모세가 태어날 때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아기가 태어나면 남자 아이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석 달 동안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담아 강에 띠워 보냈습니다.

바로 그 때 하필 바로의 딸 그러니까 공주가 목욕하러 그곳에 나왔습니다. 공주의 눈에 발견되어 공주가 양자로 삼아 키우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하필 요게벳이 모세의 유모로 채택이 됩니다. 모세를 품에 안아 키우게 됩니다. 이렇게 모세가 태어나 자라나는 동안 이 ‘하필’의 기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이런 하필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하필의 기적,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후 12장을 보면 바울은 남다른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들에게 없는 육체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데 큰 장애였습니다. 마치 가시가 박혀있는 것처럼 자기를 괴롭혔습니다. 이것 좀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냉정하십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질병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질병 때문에 늘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늘 하나님 의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남다른 은사들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시고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질병까지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시고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 모두가 은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보면 그 어느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게 됩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장차 하나님 부르시는 날까지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최고의 은혜, 은혜 중의 은혜는 바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창 6:5-6을 보면 매우 심각한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 와서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시던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다고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심각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 시대 이후 점점 이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노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온통 악한 것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죄악 때문에, 사람들 생각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하늘을 찌릅니다. 하나님의 근심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한탄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근심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7절을 보면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없애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 없애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땅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홍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홍수로 다 죽었습니다.

히 9: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노아 시대의 홍수 대신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홍수와 같은 형태의 벌은 없을 것이고 대신 죽은 이후에 심판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준비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홍수를 대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7:23입니다.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유일하게 노아와 그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노아 가족만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이 6:8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홍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6:8에서 본격적으로 노아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노아를 소개하면서 처음 운을 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 말부터 꺼냈을까요? 오해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9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세상의 죄인들과 구분되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불완전한 자와 달리 완전한 자였기 때문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6:22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그가 세상 그 누구와도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의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여기서 못 박아 말하고자 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남달리 의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은혜로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허락하셨습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에게 그 무엇보다 큰 은혜가 저 방주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큰 은혜는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 2:8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은혜 중의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은혜, 최고의 은혜, 반드시 있어야 할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이 이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헌신 때문입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전 15:10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주를 위해 헌신해 온 시절을 돌아보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고전 15:8-9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자기가 그토록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이 자기 때문인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자기도 사도이기에 다른 사도하고 비교해 보았습니다. 부끄럽게도 자기는 사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성도들과 비교해 보니 자기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다른 은혜를 자기에게 주셨습니다. 부족하고 결함이 많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많은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이 커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많아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심이 굳건해서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구원 받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믿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일찍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단적으로 답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는 분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없었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낼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을 때 시작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구원하고, 나를 헌신케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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