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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의 광야길을 지나려면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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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춘수 목사 (강동교회)

지난 주간에 우리는 찜통같은 더위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연일 우리 지역의 낮의 온도가 35도를 넘었습니다.심지어 한밤의 온도도 30도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경험한 더위 중에서 정말 제일 극심한 더위였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찜질방에 가서 찜질을 하듯이 그냥 몸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릴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열대야 때문에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를 여름에는 더워야 하고 겨울에는 추워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그것이 자연의 정상적인 법칙이거든요.

오늘 우리가 더위를 만나도 물이 있고 선풍기가 있고 에어콘이 있는 분들에게는 더위가 문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더위가 왔는데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물이 없는 분들은 굉장히 괴로울 것입니다.그런데 때로 물이 없이 더위를 맞을때가 있습니다. 물이 없는 것도 고통이지만 물이 있는데 먹을 수 없는 물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예외없이 더위를 만나듯이 예외없이 만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기대감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대감 뒤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 때문에 우리는 힘들어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감격스러운 가운데 건넜습니다. 본문이 속한 출애굽기 15장 전반부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쁨으로 찬송하면서 즐거워합니다. 여인들은 춤을 추면서 즐거워합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이렇게 기적으로 기쁨의 기대감을 갖고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춤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오늘 본문22절부터 이스라엘에게는 수르광야길에 들어갔고 거기서 3일길을 걸었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광야길은 낮에 온도가 40-50도를 넘습니다. 광야에는 피할만한 그늘도 없습니다. 또 풀밭이나 나무도 없습니다. 그냥 모래와 흙과 돌과 먼지만 끝없이 펼쳐진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필수는 물입니다. 저희가 성지순례를 갔을때 다른 것은 못챙겨도 반드시 물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지순례를 하면서 광야를 나올때 물을 챙겨가지고 나왔짐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수를 챙기지 못햇습니다.홍해를 건너서 3일길을 걸엇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한 곳이 마라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물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그 물은 먹을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모세가 원망스러웠습니다.그래서 백성들은 모세를 대해서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탄식합니다. 여러분 생각하여 보십시오. 무려 어린아이나 여자까지 250만명이 광야에서 물을 마셔야 하는데 물은 없고 만난 샘물의 물은 써서 마시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목이 말라서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상상하여 보십시오.얼마나 울고 불고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이런 고난의 문제가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기대감을 갖고 출발한 믿음 생활인데 이내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그 고난을 맞이하고 해결하여야 합니까?


1. 고난은 하나님의 시험임을 알아야 합니다.

25절 하반절을 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할새“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광야를 주시고 광야에서 쓴물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시험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라고 하는 말은 3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혹의 의미로서의 시험입니다. 야고보서1장13절에서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이때 시험이라는 말은 유혹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파괴적 의미에서 유혹의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는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시험의 의미는 시련의 시험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련이란 병이나 사업실패나 어려움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가 당하면서 만나면서 자기를 단련하게 하기 위해서 주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주는 직접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시험하실 때 사용하는 방법들은 고난이라고 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바치는 시험을 하셧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라의 쓴물의 고통을 주시면서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이라는 말은 영어로 말을 하면 테스트의 의미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보는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학교에서 치는 시험이 비록 고통스럽지만 그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없애자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학생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시험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학생으로서의 실력을 키우고 학생으로서의 실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시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결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파괴적인 의도를 갖고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건설적인 의도를 갖고 시험합니다. 25절 하반절에 보면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마라의 쓴물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라 살아가는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의 백성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르는 순종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의미의 시험으로 마라의 쓴 물의 고통을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까?
3일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들은 너무 즐겁고 기쁘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송축했습니다. 3일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사건을 정말 기적의 역사였고 너무 너무 황홀한 사건이었습니다. 뒤에는 이집트 군인들이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바다엿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홍해바다가 갈아져서 그들이 바닷길을 육지길을 삼아서 무사히 건넌 것입니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애굽군인들은 물속으로 모두 몰사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들의 목숨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습니다. 지금 광야길에 3일간 있었고 거기에다가 마라의 쓴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하고 경배하던 그 일술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원초적인 본능으로 육신 앞에 반응하였습니다. 3일전에 그렇게 찬송하던 하나님,믿고 따르던 모세는 이미 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시험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니까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적을 주시니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복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여러분 때로 믿음이 없는 사람도 홍해가 갈라지고 기적이 일어나면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나에게 유익과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감사는 그런 차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시험하십니까? 조건없이 주님을 말씀과 함께 주님을 사랑하고 조건없이 주님을 순종하는 것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비록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고난이 계속되어도 조건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세상에는 3가지의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에의 사랑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것 저것을 해주면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이런 사랑의 경우에 자기 기대치에 어긋나면 실망하고 떠나갑니다.
때문에의 사랑이 있습니다.당신이 예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너무 멋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도 언제가 자기 조건에 충족하지 못하면 떠날 수 있고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나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비록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비록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다면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고통이 있습니까? 고난 앞에서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 나의 사랑 나의 믿음을 하나님이 시험하십니다. 어떤 고난 고통이 있어도 원망하지 마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듯이 나의 쓴환경이 단환경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 모두 합격할 수 있는 믿음들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2. 고난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6절, 여기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강조하는 메시지는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질병의 고통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면 하나이 치료의 하나님,’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때에 특별히 고난의 과정을 경험하게 하신 후에 자기를 계시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아르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여호와이레란 “준비하시는 하나님” 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지도자로서 확신이 없었던 지도자 기드온을 불러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을 기드온의 손에서 구할 사람으로 기드온을 하나님은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두려워하였고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다면 표징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하늘로서 불로 나타나셔서 고기와 무교전병을 태우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십니다.

지금 질병의 고통을 경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병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질병을 내리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을 치료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병을 치료하시고 환경을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고통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알려진 믿음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욥입니다.
욥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당합니까? 욥은 모든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모든 자식들을 다 잃었습니다. 욥은 건강도 잃었습니다. 친구도 아내도 떠나갔습니다. 그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욥이 나중에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고통을 경험하기까지 욥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경외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전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전까지 내가 설교자를 통하여 말로만 듣던 하나님 그냥 이론적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실제의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의 삶에 어떤 고통,고난이 있습니까?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다”라고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은 밝히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가 체험하게 합니다. 여기 모세는 그것을 체험하게 되고 이스라엘은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쓴물을 치료하기 위해 나뭇가지 하나를 던집니다. 그런데 물이 변했습니다.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마라의 쓴물의 고통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친히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어떤 고통의 자리에 있습니까?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비록 광야같고 지금 쓴물을 만난 이스라엘 같은 상황일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고통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이스라엘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던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게 하시고 죽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고통을 당할지라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엄청난 고통의 더위가 몰려와 우리를 괴롭게할 때 에어콘이 함께 있으면 더위는 잘 물리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더위를 만날 때 나에게 에어콘이 있다면 그것을 잘 활용하여 더위의 고통을 날릴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에어콘이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육관에 에어콘이 있는데 우리의 실수로 선이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에어콘이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그 에어콘을 고물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기능공을 불러서 선을 수리하고 가스를 주입하였더니 좋은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에 비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으로 그 악명 높은 독일 나치 정권하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써냈는데 그 중의 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많은 유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나이 많은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은 쉽게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이 달린 채 20여분 이상 발버둥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소의 유태인들이 여기저기서 탄식하며,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엘리에 비젤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비젤은 이때의 감동을 평생 가슴에 품고 고난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정처없이 고통가운데 행군할 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도 잊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보다. 여호와는 우리를 잊으셨는가 보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하셨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탄식을 보셨고, 들으셨고, 아셨습니다. 그들을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고통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3일동안이나 물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게다가 쓴물을 만났을때 그 입에서 불평이 왜 나오지 않겠습니까?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고난 앞에서도 본능적으로 반응하여서는 안됩니다. 내안에 믿음을 따라 반응을 하셔야 합니다.

오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고통 속에서 눈으로 보는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하시면서 메마른 광야를 넉넉히 극복하면서 통과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27절, 마라의 쓴물을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물 샘 열둘과 종려70주가 있는 곳을 만나게 됩니다.이곳의 이름은 엘림입니다.마라에서 엘림까지는 약 10키로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거리는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곳에 무려 물샘이 12개나 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 70그루나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오아시스인 것입니다.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그늘이 있는 나무와 풍성한 샘이 12개나 있는 곳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 종려나무가는 키가 커서 시원한 그늘도 제공하여 줄뿐 아니라 특히 맛이 좋은 열매가 있는 나무입니다. 종려나무가 맺은 열매는 꿀처럼 달고 맛이 좋아서 이스라엘의 키부츠같은 농장에서 집단으로 양육을 하고 그 열매를 생산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이라는 곳에 머물면서 물과 함께 꿀과 같이 단 이 열매를 맛있게 따서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무엇입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까? 엘림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라 저편에 하나님은 엘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풍성한 오아시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오늘 광야의 길을 걷는 것같이 우리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같지만 분명히 엘림이 있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죽을 것같은 쓴 고통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같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정말 이 고통은 끝이 없고 정말 이 고통은 계속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라의 쓴 우물 저 너머에 엘림의 오아시스가 있었던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 눈에 직접 오아시스 엘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고 엘림의 약속,엘림의 소망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마라의 쓴물의 고통없이 하나님이 빨리 엘림의 복을 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왜 고난없이 축복을 주지 않고 고난을 통해서 축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까?
마라의 쓴 물이 없이 엘림에 이르렀다고 가정하여 보십시오. 그렇다면 정말 물의 소중함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을까요? 아마도 물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그것을 마시면서도 별로 감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에서 우리 앞에 우리가 만나는 복들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고난 뒤에 경험하는 일상은 다릅니다. 오랫동안 다리가 부러져서 교회당을 출석하지 못하던 어떤 성도님은 이제 다리가 낫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이전에 경험하던 못하던 기쁨과 감사를 경험하면서 예배드립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순종의 사람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특별히 고통의 광야 길에서 나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면서 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하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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