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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양의 문이다 (렘 37:2~5, 요 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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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한국인은 귀소본능이 가장 발달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어디엘 갔다가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본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능 때문에 우리 민족은 유난히 고향을 찾고, 죽어서는 조상의 묘에 묻혀야 하고, 명절 때는 고향에 가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말들입니다.

  영어로는 올라가는 기계라는 뜻의 ‘엘리베이터’(elevator)를 우리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기계라는 뜻으로 ‘승강기’라고 합니다. 서랍을 빼낸다는 뜻으로 ‘드로어’(drawer)라고 하지만 우리는 빼냈다가 다시 닫는 의미로 ‘빼닫이’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분명하여 들어가는 쪽에서는 입구(entrance), 나오는 쪽에서는 출구(exit)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의미로 양쪽을 ‘출입구’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갈 때는 입구, 나올 때는 출구의 기능이지만 우리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출입구의 통합적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승강기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도 전에 탑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문의 역할도 복잡합니다. 인터넷에 찾은 우리나라 문을 기능 별로 찾아 봤습니다. 문은 기능에 따라 성문(城門), 궐문(闕門), 아문(衙門), 객사문(客舍門), 정려문(旌閭門), 홍살문(紅箭門), 대문(大門), 중문(中門), 정문(正門), 후문(後門), 샛문(夾門;側門),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또는 仁王門), 암문(暗門), 수구문(水口門) 등으로 나뉩니다. 이 문들이 뭔지 알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문이 복잡합디다.

  문의 역할은 들어가고 나오게 하는 통로입니다. 들어오게 하고 나가게 하는 것이 문의 역할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들어가며 나오며”라고 하는데 이런 성경적 의미로 볼 때에 출입구라고 하는 우리의 말이 더 정확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또 다른 자기 증거는 “나는 양의 문이다”...(I am the gate)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문이신 예수님께로 들어가면(enter) 구원을 받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come in and go out) 꼴을 얻습니다.
  목장의 하루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아침에 목자가 양을 불러내고, 양이 목자를 신뢰하여 그 음성을 듣고 따라 나섭니다. 목자와 양과의 삶을 묘사한 목장의 삶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웨스트콧이라는 주경가는 “목장 생활의 요소는 첫째 안전, 둘째 자유, 셋째 보급 즉 먹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전과 자유와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목장에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얻습니다.

  문이란 헬라어의 ‘투라’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의 문이란 정상적인 통로를 의미합니다. 넘어다니는 곳이 아니라 정상적이며, 안전하고, 평안한 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문입니다. 양이 들어가고 사람이 정상적으로 양에게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투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내가 양의 문이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예수님은 양을 위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원문의 뜻은 양들을 위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문이 되십니다. 문이 되는 것은 환영하는 것입니다. 문이 되는 것은 복잡하지만 꼭 있어야 하고 평안케 하는 도구입니다.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양들만의 문입니다. 양이 아니면 환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이 아니면 아예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양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리는 아무대로나 들어갑니다.

  성경의 양은 선한 동물입니다. 거룩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반면에 이리는 악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양과 이리를 대비하여 말씀하신 적이 많이 있습니다.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예수님을 “고난의 양”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9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세례 요한이 증언합니다. 그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대해 성경은 우리를 황송하게도 예수님처럼 양이라 부르십니다. 놀라운 은혜이고 크나 큰 영광이지요.

  이 문이 양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이리에게는 닫혀 있습니다. 양에게 그 문은 들어오게 하고, 보호하고, 소유합니다. 그 문은 좁으나 들어가면 엄청나게 넓은 목장이 있습니다. 그 목장에서 양은 쉼을 얻고, 꼴을 얻고, 평안을 얻습니다.
  1800년대 미국의 대초원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 어느 잡화점 주인에게 목장 주인이 들어와 양해를 구합니다. 울타리를 쳐야 하겠는데 외상으로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은 말합니다. “제이크씨, 이번 여름에 울타리를 칠겁니까?” “물론입니다.” “넓힐 겁니까, 아니면 줄일 겁니까?” “넓힐 겁니다. 강 건너까지 백만 평방미터 정도 확충할 계획입니다.” “좋은 계획이군요. 외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외상 거래를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때 주인은 말합니다. “울타리를 줄이는 사람은 소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지요. 넓히는 사람은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요. 저는 항상 울타리를 넓히는 사람에게만 외상을 줍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믿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울타리를 넓혀야 합니다. 좁은 문이지만 이 문을 넓혀야 합니다. 이 문에 믿고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시온의 대로가 있고, 넓은 세상의 복이 있습니다.

  양의 문이란 양이면 누구에게나 열리는 문입니다. 양이 두드리면 양에게 열리는 문입니다. 그런데 양이기를 거절하고, 두드리기를 주저합니다. 그래서 열리지 않고, 들어가지 못하고, 닫힌 채로 두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양이 되세요. 양에게 예수님은 열립니다. 이리가 되지 마세요. 두드리세요. 양이 두드리면 기쁘게 열어주시고 받아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문이신 것은 구원을 얻게 하시는 문입니다. “말미암아”라는 말은 “통하여”( through)라는 말입니다.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통하여 들어가야 구원을 받지, 비껴가거나, 넘어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비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비껴가는 것입니다.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예수다 라고 하는 사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비껴가는 사람과 넘어가는 사람에게 구원과는 멉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하여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except through me)라는 뜻입니다. 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문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이미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 이름도 구원자이십니다. 그 외에 구원자가 없습니다.
  그 구원자가 왜 문입니까? 예수님은 구원의 통로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싫어하고, 힘들어 하는 문입니다. 넓은 문은 세상으로 향한 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좋아하고 쉬운 문입니다.

  어떤 분은 재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옥에서 곧바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께서 본향에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앞문을 계속 열어놓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지금도 열려 있고, 앞으로도 열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모든 세상의 끝이 올 때는 닫힙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미국 동부의 밀레니엄 극장에서 본 ‘노아’ 뮤지컬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방주를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동물들이 각각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든 동물들이 다 들어가자 방주의 문이 닫힙니다. 문은 하나님이 직접 닫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창 7:16). 그 뮤지컬에서도 문은 사람이 닫지 않고 서서히 저절로 닫혔습니다.

  구원의 문은 열려 있을 동안에만 기회가 있습니다. 닫힌 후에는 열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는 “한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그 방주 안에는 온갖 꼴이 있습니다. 밖에는 홍수가 있지만 안에는 극도의 평안이 있습니다. 갇힌 것 같지만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간 것만 하더라도 무한한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열처녀의 비유를 보세요. 기름을 예배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갔다가 돌아와서 문이 닫힌 다음에 열어달라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10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모든 상황이 끝난 것입니다. 그 때 다섯 쳐녀들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애원했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였습니다. 무서운 상황이 아닙니까?

  찬송가 257장 2절입니다. “오는 사람들은 지체말고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우리 행할 길은 구주 예수니 어느 누구나 오라”. 예수님은 문입니다. 지금도 열고 기다리십니다. 문이 열렸을 때에 들어와야 합니다. 문이 열렸을 대에 아무쪼록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문 밖에서 있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문 안에 들어오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꼴을 얻게 하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꼴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무엇이다”고 하신 많은 말씀 가운데 첫째가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하신 것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떡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물며 양에게도 말할 필요 없이 꼴이 제일 중요합니다.

  문 안에는 끝없는 초장이 펼쳐집니다. 양들이 좋아하는 온갖 푸른 풀이 있습니다. 양들이 마실 수 있는 맑은 시냇물이 있습니다. 그 문안에는 이리가 없는 안전 지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꼴이 풍성하여 양들은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꼴이 얼마나 풍성한지 보세요.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문이 되신 이유입니다.

  꼴은 생명의 풍성을 줍니다. 문 안의 꼴은 풍성한 생명을 주는 꼴입니다. 빈약한 꼴이 아닙니다. 병원에서 주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식사입니다. 병상에서 겨우 호흡하며, 손가락을 힘들게 까딱거리게 하며, 말도 억지로 한 마디하는 빈약한 상태가 아니라 에너지가 넘치는 발랄한 젊은 생명이 풍성한 이런 은총을 문 안에서는 얻습니다.

  풍성한 꼴을 주시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 꼴은 부족함이 없는 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계셔서 꼴을 만드시고, 공급하시고, 먹이십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제2부 후반에 보면 절망거인(Giant Despair)으로부터 구출되는 낙심씨(Mr. Despondency)와 그의 딸 질겁(Much-afraid),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들의 순례길을 힘들게 만든 심약씨(Mr. Feeble mind)와 그의 삼촌 두려움씨(Mr. Fearing), 지팡이 없이는 조금도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 주저씨(Mr. Ready-to-halt)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유약한 인간의 모습, 인생의 여정이 아닙니다. 풍성한 꼴을 공급받고, 힘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양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꼴입니다. 힘입니다. 낙심을 없이 합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프랑스의 노틀담 성당은 유명한 이유가 있답니다.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곱추’ 소설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이곳에서 드골대통령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잔 다르크의 복권식을 이곳에서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복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도 이곳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면 성당에 예수님의 가시관과 십자가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고 자랑합니다.

  노틀담 성당의 전면 조각에는 천당문이 있고, 28 유대왕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후대에 조각하였다는 노틀담의 곱추와 노동자의 임금을 주지 않고 잘난 척 하는 신부는 기둥을 바치고 힘겹게 서 있습니다.
  한 때에 교회는 천당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이나 십자가의 일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되심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유일한 문입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양으로 이 문으로 들어가 구원을 맛보며,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매일매일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꼴을 얻고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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