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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름 받은 자의 삶의 자세(고후 11: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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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서정호 목사  (염암교회)


웰빙(well-being)의 의미 

작년부터 우리 사회에 많이 등장하는 말 가운데 웰빙이란 단어가 있는데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안녕, 번영, 행복, 복지라는 뜻으로 쓰이며 말하자면 안락하고 건강하고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는 뜻에서 모든 사람이 웰빙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웰빙인가요?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와 자유, 몸의 건강이고, 보람된 일을 해서 그 대가로 얻어지는 필요한 만큼의 물질이 충족되어 가족과 이웃에게 나눌 때 그것이 웰빙이 아닐까요? 마음의 평화뿐 아니라 건강과 물질도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살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웰빙은 신체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건강증진을 위한 생활습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상태의 육체적 웰빙, 자신에 대한 만족감과 자부심이 충만한 상태의 정신적 웰빙, 직장 또는 공동체에서 소속감과 함께 성취감을 느끼는 상태의 사회적 웰빙으로 웰빙을 규정하기도 합니다.

웰빙이 단순히 "잘 먹고 잘 살자 "로 해석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생활의 질을 좀 더 높이며, 몸과 마음 ,일과 휴식, 가정과 사회, 나와 이웃. 공동체가 모두 함께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웰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웰빙의 의미는 나를 찾자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나의 존재를 찾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보자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단 며칠의 휴가를 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휴식을 하며 쉬어 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나의 삶의 영역에서 작은 변화를 시도해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웰빙은 경제적으로 잘살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립하는 단순한 개념보다는 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는데 누구나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찾자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서 내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봅니다.

진정한 웰빙은 나를 찾는 것이며 내가 즐겁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하고 그러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웰빙은 단지 경제적인 자유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나를 찾고 나의 행복을 찾는데 그 목표가 있고 나의 삶을 사랑하고 나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추구해 가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삶의 변화를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으로 이미 웰빙의 삶은 시작되며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사실은 행복한 삶을 보장하시는 주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삶의 자유로움은 마음의 선택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삶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태도이며 마음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유로움을 원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재물이 많아질수록, 내 지위가 높아질수록, 내 삶의 경륜이 커질수록, 더 큰 자유 더 높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순한 마음의 선택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 현실에 대한 속상한 일들, 사람에 대한 섭섭함들, 병마에 대한 섭섭함들 다 접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아주 힘들게 사는 사람, 인생을 아주 복잡하게 사는 사람, 인생에 여러 사람을 흔들어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 모든 인생은 이래야 된다, 모든 사람이 저래야 된다는 어리석은 자기 판단이나 어리석은 자기편견의 결과일 뿐입니다. 선택이란 지불할 고통과 극기할 용기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칠 땐 항상 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면 조금은 덜 고통스럽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내 선택의 결과를 항상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주님의 선택이 더 나았습니다.
나라면 햇빛이 비치는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장미꽃이 흩뿌린 듯 피어 있고 앞을 가로막는
구름도 없으며 근심의 그림자도 전혀 없는.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 더 나은 길을 택하셨습니다.
햇빛이나 향내 나는 장미 대신 머리 위에는 구름이,
발밑에는 가시가 있는.
그래서 비록 발은 베어 아프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깊은 기쁨을 누리고 있으니 그건 샤론의 꽃 예수님 때문이랍니다.

햇빛에 관한 한, 그분의 아름다운 얼굴 자체가
제게는 완전한 햇빛이지요.

나라면 보다 능동적이고 강인하며 지칠 줄 모르는
인생을 택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는 인생을.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 더 나은 인생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자주 수반되는 인생이요
힘이 가장 필요할 때 주어지지 않으며
얻는 대신 잃어버려야만 하는 인생이랍니다.

주님은 내게 다른 종류의 일을 주셨는데
그건 내 생각과 너무 다른 일로
그분이 피 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위해
그분과 함께 하나님께 탄원하는 일이랍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그 분이 선택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그분 손에 맡겨 두기만 하면 그분은 실수 하나 없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눈이 먼 우리는 절대로 어둡고 험한 길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절대 발견하지 못하겠지요.
좌절과 곤란과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변함없는 그분에게로 돌아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신실하며 사랑 많으시고 지혜로운 분인지 알게 됩니다.

-아프리카 내륙 선교회 캐서린 밀러-의 글 중에서 

우리의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는 무엇인가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는 지금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결국 우리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내리는 결정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바르고 유익하고 성숙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선택에 의해 부름 받은 자로 살아가면서 보냄을 받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름 받는 자의 가치 

아무리 10만 원짜리 수표를 마구 구기고 발로 짓밟고 더럽게 했을 지라도 그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그 수표는 항상 10만 원짜리 수표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으며 실패라는 이름으로, 실수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 모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우리 인간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수표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수표와 같은 영원한 가치를 부름 받은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 복음을 위한 그의 전도사역은 너무 어렵고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하루라도 발 벗고 편히 누워 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그는 복음을 통하여 한 생명이라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평생 동안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스러운 상급만을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그 지역에 교회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자 그는 그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자마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은 사도가 아닐뿐더러 그의 가르침도 역시 문제가 있다고 선동하여 고린도 교회가 신앙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 뿐 아니라 그 어떤 교회도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아끼고 사랑하는데 그가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자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일꾼의 자격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가리켜 첨단기술문명의 시대라고 하면서 새로운 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인 가치로밖에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은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우리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첨단 과학의 시대에 과연 신앙이 은거할 자리는 어디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

바울은 평생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로마 전 지역을 돌면서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고린도 교회는 그가 특히 많은 정성을 쏟았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지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그만큼 고린도 지역이 중요하고 소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세웠던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복음의 진리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져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사도이자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확실한 증거로써 자기가 복음을 위하여 받았던 고난을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을 헐뜯고 비방하던 자들은 마치 자기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신들의 수고를 자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게 된 고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곧 육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넘치는 수고를 하고 옥에도 많이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아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탔던 배가 파선을 당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번 잠을 못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면서 그는 세상의 그 모든 좋은 것을 다 버리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전파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토록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바울은 그 어떤 사도보다 자기가 예수를 위한 고난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자기의 피눈물 나는 고난의 인생을 열거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성도들의 동정심이나 존경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그의 수고는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요 소망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비하면 감히 자랑할 만한 것이 전혀 못되었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면서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 위해 부득불 자랑 아닌 자랑을 열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받았던 고난을 통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실상 그리스도와 교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이 없으면 어려움이 올 때 피하게 됩니다. 그 누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고 구원의 확신과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으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환난과 매 맞음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 어떤 고난이 있었습니까? 신앙을 위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참된 주님의 일꾼은 그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는 이들은 참된 주님의 일꾼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그 어떤 고난도 없이 편하게 쉽게 믿으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를 피해 교외로 피신하고 있을 때 로마 쪽을 향하여 걸어오시는 예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슬픈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로마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피하기 때문에 내가 또다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로마로 들어가고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을 위한 일을 회피하며 도망하는 우리를 슬프게 바라보시며 십자가를 또 짊어지시고 통곡하시고 계십니다. 고난을 피하거나 십자가를 피하거나 주님의 일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써주시고 사용하옵소서" 라고 외치며 나서야 합니다. 그와 같은 고백이 부름 받은 자의 참된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교회에 대한 염려가 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바울의 사도권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허는 여우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데 그렇게 분열시킵니까? 교회는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헤치는 자들은 사탄에 의해 조종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헤치는 것은 무서운 병입니다. 특히 우리의 육신이 불치의 병에 걸리면 그 몸은 다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치의 병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헤치는 죄라는 영적인 병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죄는 영혼 속에 침투하는 영적인 병입니다. 영혼 속에 침투한 죄는 그 사람의 영을 죽이고 사탄의 종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죄는 사람에게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도 침투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전을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교회에 죄가 들어오면 그 공동체가 찢기고 나누어져 악한 세력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날마다 그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운 교회를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보살피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를 향한 그의 염려는 자기가 세운 교회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 속에 놀라운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함이라"(28절).

바울은 먹고사는 일, 출세하는 일, 인간관계 등으로 고민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이 모든 교회란 보편적 교회, 우주적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올바로 설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먹고사는 일, 자식 걱정, 건강 걱정, 자기의 자존심이 상한 것 때문에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하는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걱정을 하였으니 그는 참된 사도요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우리는 이제 좀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염려하고 교회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우리의 남은 생을 바쳐야 합니다. 이런 고귀한 일에 우리의 삶을 바치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람은 말로 행복해야 한다

사람은 말로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은 말의 영역입니다. 말은 너와 나의 약속이기에 네 말 내 말이 따로 없습니다. 친구들은 같은 말에 같이 웃고 친구들은 같은 말에 같이 웁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말로 살고 성실한 사람은 성실한 말로 삽니다. 어두운 사람은 어두운 말로 살고 추한 사람은 더러운 말로 삽니다. 우리가 어제의 말로 아파하는 것은 반성하는 오늘을 살기 때문이며 꿈꾸는 말에 함께 기뻐하는 것은 내일의 행복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살리는 일이 삶을 살리는 일이며 말을 빛내는 일이 삶을 빛내는 일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분되는 중요한 기준은 사람을 위하여 정성으로 말하는 사람과 자기를 위하여 말을 수단으로 쓰는 사람으로 갈라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말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고 더러운 말이 아닌 아름다운 말, 무책한 말이 아닌 성실한 말, 찌르고 공격하는 말이 아닌 살리고 세우고 채워주는 말, 절망적인 말이 아닌 희망적인 말, 불행한 말이 아닌 행복한 말을 해주어 말로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좋았던 것, 곧 바리새 가문, 높은 학문, 로마의 시민권 등을 가지고 있었을 때 했던 일이라고는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좋은 것을 가지고서는 마음이 교만해지고 자아도취에 빠져 사람들의 마음과 육신에 상처만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학벌, 문벌, 신분 등 그 모든 세상적인 배경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알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분으로 알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사도의 직분만큼은 결코 빼앗기거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한데 자기의 주장을 꺾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에만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나는 죽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그것만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삶은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좀 더 고생하고 염려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우리는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종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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